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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ㅣ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평점 :
악전고투 끝에 아나이스 닌의 일기 <헨리와 준>을 다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나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 책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수도 없이 책을 읽겠다고 집어 들었다가 내팽개쳤다가 또다시 집어 들고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독서모임을 하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이래서 홀로 하는 독서보다 함께하는 독서가 좋은 걸까.
아나이스 닌은 실재 인물로 개인적으로 보헤미안 같았던 그녀의 삶이 부러웠다. 특히 스페인어를 하는 아버지에, 프랑스어를 하는 어머니 그리고 미국에서 살았다는 그녀의 국제적인 커리어가 마냥 부럽더라. 제도 교육을 충실하게 받지 못한 아나이스는 11살부터 자신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살 즈음에 소설(<헨리와 준>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도 등장하는 자신의 남편 이언 휴고와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문화수도 파리는 당시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만나게 된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과의 만남은 아나이스의 삶에 극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아나이스는 책에서도 언급하다시피, 헨리가 자신의 문학적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준과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에도 헨리가 지닌 야수성과 그의 천재적 재능에 반해 기존의 결혼제도를 뛰어넘는 파격적 사랑에 돌입한다.
책을 읽다 보면, 아나이스는 자신의 은밀한 일기를 남편인 휴고가 볼 것을 염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휴고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의 부정을 과연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사랑의 조그만 부분이라도 차지하려는 생각으로 아나이스의 부정을 눈감아 줬던 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남편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일기를 헨리에게는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책에서 계속해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문학을 하는 시인이자 작가여서 그래도 괜찮다는 걸까? 보통사람의 사고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변명처럼 다가왔다.
또 한 가지 궁금했던 점으로는 헨리는 아나이스의 경제적 지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파리의 살롱에는 빠트롱(patron) 문화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형적 부르주아 직업군인 은행가 휴고를 남편으로 둔 아나이스는 헨리의 작품 활동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도 물론이고,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문학을 위해’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헨리를 돕는다. 그런데 이 헨리란 작자는 그렇게 지원받은 돈을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소진한다. 이들의 사랑은 정말 이해 불가하다.
휴고와 결혼을 유지하면서, 과거의 사랑이었던 사촌 에두아르도, 현재 불같은 사랑에 빠진 헨리 그리고 자신의 심리 분석을 해주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알렌디 박사와의 관계는 통속적인 삼각관계의 틀을 완전히 부숴버린다. 아나이스 닌이야말로 기존의 도덕관념과 사회적 통념의 벽을 모두 뛰어넘은 시대를 앞서 간 진정한 자유부인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작가가 쓴 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연 남성작가가 기술했다면 그녀의 감성처럼 그렇데 디테일한 묘사를 할 수가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헨리와 준>에서 가장 주목한 인물은 바로 알렌디 박사다. 알렌디 박사 앞에서는 아나이스가 하는 거짓말은 무장해제당한다. 남편 휴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느낀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스스로 준과 라이벌 관계를 설정하고 고통과 번민 속에 몰아넣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 상태를 알렌디 박사에게 고백하면서 아나이스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알렌디 박사 역시 환자 아나이스와의 정신 분석, 심리 분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팜므 파탈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 버린다. 기존의 통념에서 일탈한 주인공들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은 아나이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질문은 예술과 외설이라는 그야말로 해묵은 논쟁이다. 주도권을 행사한 주체가 여자냐 아니면, 객체로서 타자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른 이분법적 분류는 너무 도식적인 게 아닐까. 몇몇 어휘에 있어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헨리와 준>은 굳이 외설에까지 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나이스는 자신의 사적 기록인 일기를 작품으로 생각했을까? <헨리와 준>(1986)이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와 다른 모습이라는 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뜬 다음에 출간된 점을 고려해볼 때, 굳이 선정적 묘사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이 점은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자, 이제 처음에 던졌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내게는 왜 이렇게 <헨리와 준>이 읽기 어려웠을까? 책을 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닫게 됐다. 일기라는 사적 영역의 글이다 보니, 작가에게는 정말 익숙한 캐릭터지만 독자에게는 생소한 탓을 들 수가 있겠다. 심리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아나이스 내면세계에 접근하기란 정말 어려웠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부터 출간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다 보니, 정보 전달이라는 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자신에게는 편리하겠지만,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불친절할 순 없었을 것 같다. 이런 분석을 통해 책 읽기가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그리고 철저하게 가려진 그녀의 심리세계에 한 발짝 다가서기가 어려웠는지 이해가 됐다.
어쨌든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일단 완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독서였다. 다음에는 아나이스가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심지어 책이 출간되는데 재정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