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김대중 1, 2>를 리뷰해주세요.
만화 김대중 2 - 행동하는 양심
백무현 글 그림 / 시대의창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1954년 드디어 목포에서 첫 번째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한 30대 초반의 김대중 선생은 첫 선거에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한다. 그리고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의 장면 부통령의 추천으로 민주당에 입당하게 되고, 천주교도로 세례도 받게 된다. 1958년 총선에서 다시 지역구를 인제로 옮겨 도전하지만 또 낙선한다. 잇단 낙선과 가정 형편의 악화로 고난을 겪던 중, 첫 번째 부인인 차용애 씨를 잃고 만다.

이승만 독재를 몰아낸 4·19혁명으로 장면 총리를 책임자로 하는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면서 민주당 대변인으로 결국 인제 보궐선거를 통해 원내에 진출하게 되지만 불과 이틀 뒤에 벌어진 5·16 군사 쿠데타로 의원직을 박탈당하게 되고 만다. 비슷한 체험을 한 미국의 링컨 대통령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불운한 선거의 주인공 김대중 선생이 있었다.

군정 시기에 동지이자 인생의 반려자로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 김대중 선생은 박정희가 이끄는 공화당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자신들이 만든 법조차 지키지 않는 박정희를 비판하면서 그 대척점에 서게 된다. 18년 독재를 알리는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박정희가 선출되면서 이 두 역사의 라이벌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1960년대 중반, 일본과의 국교 재개를 앞두고 벌어진 굴욕적인 한일회담 과정에서 유연한 태도를 취했던 김대중 선생에게 “사쿠라”라는 비난이 쏟아지기도 했다. 한편, 1964년 김준연 의원에 대한 구속동의안에 대한 장장 5시간 19분에 걸친 필리버스터(의사 진행 방해발언)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1967년 6·8 총선에서는 김대중 선생을 낙선시키기 위한 박정희 정권의 모략과 암투가 치열한 가운데 결국 선거에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체 선거에서는 집권 공화당이 개헌선을 넘기는 압승을 하면서 박정희는 3선 개헌에 대한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결국 박정희의 뜻대로 국회에서 날치기로 대통령 3선 개헌안이 통과된다. 김대중 선생은 야당이었던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서 40대 기수론을 들고 나온 김영삼에게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면서 1971년 대선에서 박정희와 피할 수 없는 운명적 대결에 나서게 된다.

선거를 앞둔 장충단 공원에서의 대중연설에서 김대중 선생은 선거에서 박정희가 이기게 되면, 앞으로는 선거도 없는 총통 시대가 올 거라는 예언을 한다. 그리고 그의 예언대로, 유신체제라는 해괴한 명분 아래 말도 안 되는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슬로건으로 박정희 종신독재의 문이 열리게 된다. 시퍼런 유신의 서슬 아래, 1973년 8월 김대중 선생 납치사건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져 나간다. 타오르는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연이은 긴급조치 발동으로 억누르던 박정희는 결국 자신의 수하 김재규의 총탄에 맞으면서 기나긴 독재의 조종을 울리게 된다.

개인적으로 2권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들은 바로 김대중 선생과 박정희의 정치적 대결이었다. 불법적인 군사 쿠데타로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집권하는데 성공한 박정희는 이후에는 지속적으로, 민주적 질서와 절차를 무시하고 독재정권의 영속적 존속을 위해 1971년 대선에서 온갖 부정과 불법적 공작을 저질렀다. 특히 그의 심복인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의 미의회 청문회에서의 증언으로 사실임이 밝혀졌고, 김대중 선생의 납치사건에도 중앙정보부가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이에 반해, 김대중 선생은 절대 불의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그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해온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건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고난으로 점철된 삶의 역정은 아직도 마지막 한 단계의 도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정희 사후, 그렇게 “서울의 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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