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의 상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66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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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읽었다. 어제 인천에 갔다가,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바로 <베니스의 상인>이었다. 기록을 찾아 보니 지금으로부터 딱 12년 전에 같은 책을 읽었던 모양이다. 시간이 가고, 독자의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들이 보이게 되는가 보다. 지금으로부터 또 십년 뒤에 <베니스의 상인>을 읽게 된다면 어떤 감정일지 자못 궁금하다.

 

사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의 줄거리는 간단한다. 베니스의 거상 앤토니오의 절친 바싸니오는 벨몬트의 후계자인 포오셔 양에게 청혼하기 위해 거금 3,000다가트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결혼도 그 당시에는 어쩌면 사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결혼 사업에 뛰어드는 이를 위해서는 투자비가 요구된다. 학자이자 군인인 바싸니오는 사람은 좋지만 그런 거금이 없다. 앤토니오 역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다 위에 띄워 놓은 상태다. 전 세계에서 향료와 비단을 실은 배들이 베니스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앤토니오는 고리대금업을 하던 유대인 상인 샤일록을 증오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자금을 융통한다. 그리고 자신을 모욕하는 앤토니오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샤일록은 90일의 약속 기간을 정하고 만약 자금 회수 일정을 지키지 못한다면, 앤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취한다는 보증서를 작성한다.

 

이 보증서는 처음부터 악랄한 샤일록의 계략이었다. 처절한 복수를 원하는 그에게 3,000다카트의 12배가 되는 36,000다카트도 필요 없다. 오직 그에게 필요한 건 앤토니오 심장 부근의 살 1파운드다. 정말 살벌한 계약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야만스러운 계약은 처음부터 성립되지 않는다는 걸 계약의 쌍방이 알고 있지 않았을까? 어쨌든 앤토니오는 계약을 지키지 못했고, 결국 사태는 파국으로 흐른다.

 

희곡의 다른 축에서, 자금은 융통한 바싸니오는 포오셔의 작고한 아버지가 마련한 마지막 시험을 통과하고 마침내 포오셔의 남편이 되는데 성공한다. 이제 자신의 은혜를 갚을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보니, 그전에 포오셔는 모로코 군주의 피부 색깔 때문에 그가 배우자의 관문을 통과하지 말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그 장면에서는 왠지 모를 인종차별주의적 시선이 느껴지기도 했다. 포오셔의 이미지는 오디세우스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페넬로페이아의 그것과 유사하게 느껴졌다. 또 다른 영국 출신 구혼자에게는 이탈리아 어를 못한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나. 그 장면에서는 또 제노포비아가... 아 너무 PC만 추구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어쨌든 포오셔는 바싸니오에게 언약의 반지를 건네 주고, 어떠한 경우에는 그 반지를 타인에게 양도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런데, 이런 설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앤토니오가 샤일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자신의 살점 1파운드를 떼낼 위기에 처한 것처럼, 바싸니오 역시 포오셔가 건네준 반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빌드업은 고전의 전형이라고 봐야 할까. 터부는 반드사 깨져야 하고, 깨진 터부가 불러온 운명의 소용돌이가 긴장감을 창출하는 내러티브의 근간을 이루기 때문이다.

 

법정에서 자비 대신 복수만을 울부짖던 샤일록은 벨라리오 박사의 추천을 받은 법률전문가(포오셔의 변장)의 등장으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처음에 사람들이 요청한 대로, 원금이나 그 이상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았다면 별 문제 없이 끝났을 재판의 진행이 자신의 명예와 평판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재산까지 송두리째 날리게 만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번에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읽으면서 샤일록이 정말 원한 것은 자신의 사업을 위협하는 경쟁자의 제거가 아니었나 싶다. 중세/근대 시대 고리대금업은 선량한 기독교인들이 할 법한 사업이 아니었다. 저주 받은 유대인들이나 하는 사업이라는 생각이 강했던 모양이다. 고리대금업을 천시하고, 원금에 대한 이자보상을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앤토니오가 샤일록의 눈에는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바싸니오는 앤토니오를 양심적 상인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는 정말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꾼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향료와 비단 수입이 엄청난 수지가 남는 장사라는 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전 재산을 그런 방식으로 투자하지는 않았다. 앤토니오가 샤일록을 통해 바싸니오에게 결혼 준비금을 융통해 주는 순간, 앤토니오의 모든 재산들은 바다 위에 불확실한 상태로 떠있었다. 만약 폭풍니나 해적에 의해 난파되거나 납치되었다면 앤토니오는 정말 알거지 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샤일록의 딸 제시커도 아버지의 뜻에 거슬러 다이아몬드 일체를 가지고 사랑의 도주행에 나서지 않았던가. 아무리 이교도의 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일탈은 허용되지 않았으리라. 중세 내내 탄압받던 유대인들을 이교도로 몰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라는 주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법정에서 앤토니오의 심장 부근에서 살점 1파운드를 떼내겠다고, 샤일록이 시퍼렇게 칼날을 가는 장면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빌드업에 성공한 희곡 <베니스의 상인>의 절정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자초한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앤토니오가 덤덤하게 받아 들이겠다며 친구 바싸니오에게 말하는 장면은 희극적이기도 하다. 만약 사태가 그대로 진행됐다면, 친구의 도움을 받아 포오셔와 결혼하게 되는데 성공한 바싸니오가 과연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러지 못했으리라. 그가 진정 양심적인 학자이자 군인이었다면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자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죽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이렇기 때문에 아내 포오셔가 나서서 조금은 사기가 연루(?)된 현명한 방식으로 해피 엔딩으로 이끌어 가지 않았던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그동안 제목 <베니스의 상인>이 악랄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다시 읽어 보니 멍청한 상인 앤토니오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상당히 중의적인 의미가 아닐까. 또 한편으로는 상인이 추구하는 목적인 이윤이 샤일록이 집요하게 구가하다가 결국 패가망신한 복수에 우선하고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셰익스피어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그래 고전은 원래 이렇게 다시 읽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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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3-11-26 15: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것 예전에 읽었는데 살을 베어가겠다는 말이 나오죠.ㅋ

레삭매냐 2023-11-26 18:58   좋아요 0 | URL
이번에 다시 읽어 보니,
정확하게 어디라고는 명시되어 있지
않고 그저 살 1파운드라고 되어 있더
군요.

그걸 샤일록이 무기 삼아 심장 부근
에서 살을 베어가겠다고...

법규정 적용의 허술한 점을 정확하게
타격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물감 2023-11-26 15: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크으으 이거 진짜 재미있습죠.
셰익스피어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있더라는.

레삭매냐 2023-11-26 18:59   좋아요 1 | URL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들이 섞여 있
어서 그런지 말씀해 주신 대로 매력
뿜뿜이었습니다.

앤타이-세미티즘은 그 시절부터 존재
했었나 봅니다.

새파랑 2023-11-26 16: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고전은 다시 읽어야 하는 법이군요~!! 레삭매냐님 리뷰 읽어보니 이 책 엄청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3-11-26 19:04   좋아요 1 | URL
대략의 줄거리들은 알고 있었으나
또 새롭게 보이니, 역시 고전 파워
가 아닌가 싶습니다 :>

페넬로페 2023-11-26 1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릴 때 단순히 느꼈던 권선징악의 결과와는 다른,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유대인을 사악하게 몰아가는 법과 관습들이 지독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도 해봤어요~~

레삭매냐 2023-11-26 22:21   좋아요 1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저도 단순하게
권선징악으로만 보았는데 다시 또
읽어 보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
습니다.

기독교 중심 사회에서 유대인들을
이교도로 보고, 십자군 전쟁 때도
그랬지만 유구한 차별의 역사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