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1 오늘의 일본문학 3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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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인데 아프다. 4일 중에 3일을 앓고 있다. 그래도 손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구나. 책쟁이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인천에 갔다가, 무언가 재미난 책이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언제 샀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을 두 권 만났다. <남쪽으로 튀어!> 오쿠다 히데오의 책이다. 그리고 내가 한동안 괴짜 의사 이라부가 등장하는 <공중그네> 시리즈를 열심히 읽지 않았던가. 명절에 제격인 책을 만났다. 그리고 700쪽 짜리 책을 단박에 읽어 버렸다.

 

시간적 배경은 2005년 봄의 어느 때쯤 그리고 공간은 도쿄도 나카노 어디라고. 내가 일본 지명에 대해 좀 더 안다면 지리적 인과관계를 알겠지만, 그런 건 모르고 그렇다고 해서 예전처럼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보지도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읽는다.

 

소설 <남쪽으로 튀어>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건들은 11살 짜리 초등학교 6학년 우에하라 지로의 시선으로 처리된다. 과거 혁공동 출신의 전설적 투사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지닌 아버지 이치로, 동네에서 자그마한 찻집 <아르가타>를 운영하는 어머니 사쿠라, 9살 터울의 누나 교코 그리고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4학년 모모코가 우에하라 집안의 구성원들이다.

 

아버지는 말은 프리라이터라고 하지만, 거의 백수에 가까운 존재다. 딱히 하는 일은 없다. 대신 반국가주의 아나키스트답게 국민연금과 세금 따위는 낼 수 없다면 공무원들과 그야말로 전쟁을 치른다. 아마 한국의 사회복지 담당자들이 이런 사상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정말 어떨지 사실 좀 궁금하긴 했다. 이치로 아저씨는 그냥 돈이 아까워서 못내겠다는 게 아니라, 국가가 왜 필요한가 그리고 내 자유의지로 살겠다는데 왜 자신의 삶에 간섭하겠냐는 아니키스트인 동시에 어느 지도자를 떠올리게 하는 절대 자유주의자이기도 하다.

 

지로는 여느 십대 초반의 아이들처럼 준과 무카이 그리고 구로키 같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학창시절을 보낸다. , 이치로 아저씨는 학교에도 꼭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리고 어린 지로의 삶을 대혼란과 고통으로 몰아넣은 빌런으로 중학생 가쓰가 등장한다. 요즘 표현으로 하자면, 악직 학폭 주동자이자 아이들을 돈을 뜯는 최악의 악당이다. 어른들은 이런 악당의 존재를 어른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가해지는 제재는 일시적인 것일 뿐 그들의 보복은 예상보다 집요하고 악랄하다.

 

아들 지로의 이런 고민을 주워들은 아버지 이치로는 혁공동 전사답게 당당하게 빌런에게 맞서 싸우라고 주문한다. 자신이 나서서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리고 쇠파이프를 이용하라는 혁공동 투사다운 팁을 알려준다. 세상에나, 이게 아버지가 할 말인가. 어쨌든 가쓰 문제는 어느새 아버지의 식객으로 우에하라 가문에 침투한 나카무라 아라키 씨가 말끔하게 해결해 준다. 문제아 구로키와 동반으로 가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큰 일탈은 아니고 작은 해프닝 정도로 끝난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세상의 간단한 이치리를 아버지 이치로는 아들 지로에게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남쪽으로 튀어>는 성장소설의 전범을 보여주기도 한다.

 

세상 친근하던 아라키 아저씨의 테러가 공론화되면서, 우에하라 집안은 결국 조용하게 살던 나카노에서 쫓겨날 처지에 처한다. , 지로는 가쓰와의 대결에서 세상 조용해 보이는 엄마 사쿠라가 오래 전 누군가를 칼로 찌르고 형무소 생활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을 전해 듣기도 한다. 아버지 이치로는 후텐마 투쟁에서 팬텀기를 불사른 사건의 주모자였다는 말도 들었던가. 분가해서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나는 누나 교코는 지로가 12살이 되는 날, 집안의 비밀에 대해 알려 주겠다는 말도 한다. 아니 이 집구석 잘 돌아가는구나.

 

지로는 엄마 사쿠라가 알고 보니, 잘나가는 전통의상집의 부유한 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리고 엄마도 아빠처럼 젊은 시절 잔다르크 뺨치는 활동가였다는 점도. 아니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이야기를 도대체 어디로 인도하려고 이렇게 방대한 설정을 짰단 말인가. 어찌어찌해서 근 20년간 의절하고 살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외삼촌 가족을 만나게 되는 지로와 모모코. 하지만, 몇 번의 방문을 통해 자신의 사촌들이 자신들과 다른 세계에 산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라키 사건을 거치고 전광석화처럼 오키나와 이리오모테 아이주가 결정되면서, 외할머니 집과의 인연은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다. 개인적으로 이 집안과의 인연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키나와에 정착한 우에하라 집안이 개발 저지 투쟁을 위한 총력전에 투입되면서 휘발해 버렸다.

 

오키나와에 가서는 상라 어르신과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에하라 가족들은 큰 위기 없이 정착할 것처럼 보였다. 대도시 도쿄에서는 천지분간하지 못하고 날뛰던 아버지 이치로 역시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는 외딴 섬의 오지에서는 자급자족을 모토로 삼아, 가족을 위한 치열한 보급투쟁에 나선다. 2005년에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지로와 모모코의 의향 따위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완벽하게 현지에 적응한다.

 

지로의 증조부 간진 어른이 오키나와 현지에 남긴 전설의 광휘는 대단했다. 선대의 조상들이 남긴 후광을 후손들이 받는다고 해야 할까.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아카하치 집안의 전설에 대해 굳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으면서, 아버지 이치로는 지로에게 인간은 모두가 전설을 원하는 법이라고 말한다.

 

과연 우에하라 이치로는 모든 불의에 대항해서 맞서 싸운 반골 조상들의 후예다웠다. 도쿄에서 긴급하게 최소한의 짐만으로 오키나와로 튀었지만, 현지 사람들은 간진 어른의 손자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마치 자기 집안일을 하듯, 음식을 마련해서 대접하고 각종 생필품을 물론이고 먹거리들을 하루가 멀다하고 제공한다. 그리고 폐허가 된 집을 수리해서, 자기네 집 드나들 듯 방문해서 소주를 마시고 사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인스타에서 보니 우리네도 언젠가 그런 적이 있다고 하던데, 과연 이리오모테 섬이야말로 우에하라들이 꿈꾸던 그런 낙원이자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가족들이 느낀 행복한 순간들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리조트 개발 문제가 등장하면서, 애써 터를 일군 우에하라들의 거처가 도쿄의 개발사의 사주를 받은 현지 하청업자들의 불도저에 파괴될 위기에 처한다. , 우에하라들은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우리 사회에 과연 변혁이 가능한가라는 거창한 담론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철지난 사회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전설적 투사 우에하라 이치로 가족의 좌충우돌 소동극에 녹여냈다. 국가란 무엇인가? 왜 국가라는 이름의 권력이 무슨 권리로 나의 자유를 통제하고 억압한단 말인가? 우에하라 이치로는 전통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그리고 다시 자유주의자로 계속해서 변신을 거듭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삶을 산다. 어떤 점에서 이치로는 극단적 자유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냥 자신을 자유롭게 살게 놔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개인이 생존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의식주까지 책임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미래의 사회보장제도라는 미명 아래, 세금과 세금에 준하는 국민연금을 뜯어가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이치로 아저씨의 투쟁이 일견 수긍이 갔다. 국가가 개인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지지 못한다면 왜 존재해야 하는지 나는 묻고 싶다.

 

오키나와 리조트 개발저지 투쟁 과정에서 등장하는 매스 미디어의 과다경쟁에 대해서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일침을 놓는다. 과거 전설적 투사가 등장해서, 오키나와에서 새로운 투쟁을 시작했다. 자극적 기사를 원하는 언론들의 특종 경쟁이 시작됐다. 그들은 균형 잡힌 보도나 양측의 주장을 공정하게 다루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무대와 판에 전설적 영웅이 등장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지 않았을까. 전설과 유대인 뜨내기 여행자가 불도저 군단을 함정에 빠트리고, 체포되었다가 도주한 용의자들이 다이너마이트로 현지개발사의 자재창고를 폭파하는 서사를 도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소설 제목에 등장하는 남쪽은 어쩌면 우리 도시인들이 이제는 영원히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방향이 아닐까 싶다. 기억이 쇠락한 자리에 채색된 전설이 채워지면서 갈 수 없게 된 이상향에 대한 동경을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은 짚어낸다. 나도 파이파티로마에 가보고 싶어졌다.


[뱀다리] 아마 이 책은 십년도 전에 사둔 책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포인트 하나, 언제고 산 책은 반드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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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10-0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고, 지금은 괜찮으신지. 김윤석이 주인공이었던 영화 재밌게 본 기억이 있어요.

레삭매냐 2023-10-01 21:02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조금 쉬어서 많이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김윤석 배우가 나오는 한국영화가 있네요.
전 당연히 일본 영화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죠.

페넬로페 2023-10-01 1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빨리 쾌차히세요^^

레삭매냐 2023-10-01 21:0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아직 명절이 이틀 남았으니
그 안에 낫겠지요. 캄솨 ~~~

자성지 2023-10-01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픈 중에도 책을 놓지 않는 레삭매냐 님 쾌차를 바랍니다.

레삭매냐 2023-10-01 21:04   좋아요 0 | URL
배우자들이 상대방의 취미생활로
가장 좋아하는 게 독서와 영화감상이
라고 하더군요 ^^

아파도 그나마 할 수 있는 게 책 읽는
게 아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자성지님.

cyrus 2023-10-01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파도 손에 책을 놓지 않으려는 정신. 아주 좋아요. 연휴 아직 남았으니 끝나기 전에 푹 쉬시면서 몸 상태가 원래대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

레삭매냐 2023-10-01 21:05   좋아요 0 | URL
평소에 게을러졌던 독서 욕망이
아프면서 부스트업~ 된 게 아닌가.

빨랑 나서서 주말 달궁 모임에 출격
해야 하는데 걱정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