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퇴근길 라디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그리고 영화의 원작인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에 대해서도. 재개정판이 나오기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하던데, 과연 천페이지가 넘는 그 책을 누가 다 읽을까 싶기도 하고.

 

암튼 영화/평전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 개발 계획이었던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책임자였던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그가 유럽 대륙 출신 망명 과학자로 착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미국에서 태어난 과학자였다. 다만, 그의 아버지가 독일 출신 유대계였다고 한다. 하버드 화학과 출신이고.

 

19455, 유럽 대륙에서 히틀러의 독일 제3제국을 붕괴시킨 연합군의 다음 목표는 태평양에서 여전히 싸우고 있던 일본이었다. 당시 일본은 1억 총옥쇄라는 말도 안되는 구호 아래, 미국의 상륙을 대비한 본토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태평양의 사이판-이오지마 그리고 오키나와에서 죽음을 불사한 일본군을 상대하느라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기록한 미국 정부는 단박에 전쟁을 끝낼 이른바 한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막 개발된 핵폭탄을 일본에 투하해서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정이었다. 본토결전 시뮬레이션을 돌려본 결과 미군 100만 명이 희생된다는 결과에 미국 정부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그래서 미영 연합군은 유럽 전쟁을 끝낸 소련의 스탈린에게 대일전 참전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제2전선을 신속하게 열어서 독일군의 대소전 역량을 감소시켜 달라는 요청을 미국과 영국이 지연시켰던 것처럼, 소련은 그럴 마음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힘이 다 빠진 다음에 느긋하게 만주로 진공해서 거저 먹겠다는 속셈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앤터니 비버의 <베를린 함락 1945>에 따르면, 소련군이 미군보다 먼저 베를린 공략에 나선 이유 중에 하나가 히틀러의 비밀 프로젝트였던 핵무기 개발 연구소를 미군보다 먼저 장악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왜 이렇게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소련은 미국에 심어 놓은 스파이가 보내준 정보로 맨해튼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어제 들은 라디오 방송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핵무기 개발을 위해 거의 전국가적인 차원의 노력을 동원했다. 심지어 농축우라늄을 만들기 위한 원심분리에 도체로 사용되는 구리가 모자라서(이 부분은 운전 중에서 잘 모르겠다) 재무성이 보유하고 있던 은을 14,000톤을 공출했다가 사용했다나 어쨌다나. 이렇게 개발한 핵무기를 1945716일 시험에 성공하고 채 한 달이 못되어 실전에 사용하게 된다.

 

194586일 미국은 히로시마에 리틀보이로 명명된 핵폭탄을 투하했다. 오펜하이머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파괴왕 혹은 죽음의 신이 된 것이다. 이거야말로 역설이 아닌가. 모든 파괴를 멈추기 위해 개발한 가공할 위력을 핵무기가 어쩌면 인류를 공멸시킬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 말이다. 사태는 소련의 대일참전으로 더욱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과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참전으로 미국은 나가사키에 한 번 더 핵무기를 투하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우리는 미국의 원폭투하로 태평양전쟁이 끝났다고 알고 있었지만, 전후에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일본의 무조건항복에 결정적 이유는 소련군의 참전이었다. 사실 일본은 원폭을 맞은 뒤에도 군부 위주로 결사항전 기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남방전선으로 주력 관동군이 차출된 만주주둔 일본군의 전력은 사실상 허깨비 수준이었고 소련군은 단 일주일 만에 일본이 전쟁에 돌입한 핵심 이유 중의 하나였던 만주를 휩쓸어 버렸다. 결국 더 버틸 수 없었던 일본은 무조건항복을 선언했다.

 

라디오 방송을 다 듣지 못해, 전후 오펜하이머 박사의 행적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스파이로 몰려 씁쓸한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수소폭탄 개발에도 오펜하이머는 반대했다고 알려진다. 영화에서 핵무기 개발을 주도한 사람으로서 도덕과 윤리 문제는 또 어떻게 다루어졌을지 궁금하다. 영화에 19금 설정이 많이 나온다며 가족과 같이 관람하러 갔다가 민망했다는 이야기도 들리는데 그 부분도 살짝 궁금하긴 하다. 오펜하이머는 후두암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나중에 과연 내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보게 될까? 아마 아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읽기 시작한 <베를린 함락 1945>나 읽어야지. 책은 무지 재밌다. 지도 첫 페이지부터 오탈자가 등장해서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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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8-19 11: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로 보시죠. 물론 전 극장간지가 넘 오래되서 가서 볼 거 같지는 않지만 흥미롭긴 하더군요. 얼마전 알쓸별잡과 인물사담회에서도 다루었고요. ㅎ

레삭매냐 2023-08-19 22:26   좋아요 2 | URL
그렇지요.
저도 언급해 주신 프로들 본다고
하고서는 미처 못 보고 있네요.
아마 그 프로들을 보았다면 저의
허접한 포스팅의 퀄이 좀 더...

극장은 얼마 전에 톰형 보러
수년 만에 갔더랬답니다.
돈이 아끕지 않더라구요.
말씀해 두신 대로 책 대신
아마 영화로 보게 될 것 같은
강렬한 느낌적 느낌이~

서니데이 2023-08-26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펜하이머 영화 보러가는 분들 많다고 들었어요.
놀란 감독 신작이라서 개봉전 소식 들었을 떄부터 보고 싶긴 한데,
여름이 너무 더워서 주말에도 영화관을 가는게 잘 안되네요.
책도 페이지가 많다고 하니 쉽게 시작하긴 어렵겠고요.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3-08-31 14:42   좋아요 1 | URL
저도 벽돌책 읽을 자신은 없고...
영화로나마 보고 싶다는 생각을
초큼 해봤습니다. 감사합니다.

페크pek0501 2023-08-26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책이 인기인가 봅니다. 그런데 책값이 비싸네요.
이 책도 벽돌책인가요?

레삭매냐 2023-08-31 14:43   좋아요 0 | URL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급은
아니지만, 준벽돌급이라고 할까요.

얄라알라 2023-08-27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흑. 첫페이지^^;;;

레삭매냐 2023-08-31 14:43   좋아요 1 | URL
퀘니히스베르크라고 되어 있더라구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