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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
하인리히 뵐 지음, 곽복록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평점 :
지금도 지구별의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유사 이래, 지구상에 전쟁(혹은 폭력적 분쟁)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나 싶다. 대화나 타협으로 갈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결국 무력이라는 폭력적 해결 방식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우리가 그동안 수립해온 이성에 의한 문제 해결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다.
1972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하인리히 뵐 작가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고발 문학을 자신의 주력상품으로 만들었다. 1951년에 발표된 <아담, 너는 어디에 가 있었나> 역시 강제 징집되어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자전적 경험담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나 싶다.
시대적 배경은 독일이 거의 모든 전선에서 몰리기 시작한 1944년의 여름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암살 시도가 7월 20일에 있었고, 암살 기도에 가담한 독일 장성들과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미 노르망디에는 미영연합군이 상륙했고, 동부전선에서는 복수심에 불타는 스탈린의 적군 이반 부대가 6월 22일 강력한 바그라티온 공세를 개시해서 한 때 전유럽을 석권했던 나치 독일군 부대는 모든 전선에서 밀리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망조가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파인할스라는 사병의 시선으로 혹은 다양한 군상들의 시선으로 패전이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시절에 대한 스케치를 시도한다. 이전까지가 타국의 점령지에서의 전투였다면 이제는 독일 본토를 사수하기 위한 다른 차원의 전투가 전방의 독일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련군의 맹공 앞에 독일 중부집단군이 궤멸적 패배를 당하면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헝가리와 루마니아의 운명도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가 되었다. 어제의 후방이 오늘의 최전방이 되고, 쉴 새 없이 날아드는 소련군의 가공할 카츄사 로켓탄 앞에 독일의 패전은 이제 되돌릴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우크라이나로부터 계속해서 후퇴하는 독일군들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사관학교를 마치고 이제 막 전선에 도착한 신입 장교들에 비해 전선의 하사관들은 그야말로 산전수전 모두 경험한 백전노장들에 가슴팍에는 훈장도 수두룩했다. 아무 것도 아닌 쇳조각 하나를 타기 위해, 그야말로 부나방처럼 총탄이 빗발치는 적진에 향해 뛰어드는 병사들의 심리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총합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미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된 부상병들은 차라리 운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전직 상인이었던 어느 상사는 토카이 와인 트렁크를 전선에서 끌고 다니다가 그만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토카이 와인은 산 자들의 몫이 되고 만다. 그렇게 하인리히 뵐은 바로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전달하는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독일군에게 함바 장사를 하고 숙소를 제공하는 아주머니의 이야기는 어떠한가. 아마 빨치산들이 파괴한 다리를 다시 만들고 또 다시 파괴하기를 거듭하는 독일군들의 기계적 행동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모르겠다. 게다가 매사에 꼼꼼한 이들은 이전의 다리보다도 더 튼튼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함바 아주머니는 생존을 위해 독일군들과 거래를 했을지 모르지만, 해방의 날 혹시 독일군 부역자로 곤경에 처하지는 않았을까라는 우려가 들었다. 심판의 날에 이성과 동정 따위는 아마 설 자리가 없었으리라.
파인할스는 우연히 만난 유대계 헝가리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 독일군에게 유대인들은 전멸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우리의 금사빠 주인공 파인할스는 말도 통하지 않는 여성에게도 사랑을 느끼고, 또 유대인 여성에게도 키스를 날리고 훗날을 약속한다. 전쟁이라는 가혹한 조건이 청년 파인할스를 이런 상황에 몰아넣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워낙 전쟁이라는 상황이 비정상이다 보니,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의 연속일 수밖에 없지 않나 추정해 본다.
독일군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끌려간 파인할스가 사랑한 유대인 여성교사 일로너 커르퇴크의 운명 또한 기구하다. 자칭 노래를 좋아한다는 수용소장이자 골수 나치였던 필스카이트는 일로너에게 노래를 시키고 그녀가 기대 이상으로 노래를 잘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녀가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총을 난사해서 그녀를 죽이고 만다. 혹시 일로너가 너무 노래를 잘해서 필스카이트의 마음에 들어 살아남는데 성공하지 않을까라는 독자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하인리히 뵐이 냉혹한 현실주의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필요 없지 않나 싶다.
천신만고 끝에 종전 즈음에 고향으로 돌아온 파인할스가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유탄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는 시퀀스는 정말 하인리히 뵐 다운 결말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렇지, 전쟁이라는 비극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지 해피엔딩으로 분식하면 안 되겠지.
소설의 제목이 등장하는 “아담”은 바로 우리 인간이라는 실존을 호칭하는 상징이다. 그리고 작가는 성경 구절을 인용해서 인간성 상실의 현장이 된 전쟁의 와중에 너희 실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했느냐는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아돌프 아이히만을 연상시키는 필스카이트 같이 보통의 평범하고 충실한 이들이 전쟁의 톱니바퀴로 너무 성실하게 일한 나머지, 상상을 초월하는 홀로코스트의 비극에 일조하지 않았던가. 아마 나도 예외는 아니겠지만, 아무런 사유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수행하다 보면 정도에서 어긋난 궤도에 올라선 자신을 발견하고 낯설게 느끼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을 되돌리기에는 너무나 멀리 와 있기에 어쩔 수 없이 하던 일들을 그대로 속행하게 되는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인간은 사유하기를 멈춰서도 안 되고 또 깨달은 바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그런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