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나치 문학 을유세계문학전집 17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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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모든 일에는 시작이 있는 법이다. 오래 전 을유문화사에서 새로운 문학전집 시리즈가 나온다 하여 잔뜩 기대를 했다. 그 중에서 나의 원픽은 듣도 보도 못한 칠레 출신 스페인 망명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이라는 책이었다. 그 결과는 대박이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그 때 아마 이 양반은 저 하늘의 별이 되었을 터인데, 고인이 구사하는 놀라울 정도로 뻔뻔한 블랙 코미디에 그만 뻑이 가 버렸다.


나중에 보니 이 작가가 미국에서도 대박이 났더라. 그러니까 요절한 작가라는 미국 독자들이 대환장하는 강력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데다, 그네들이 맛볼 수 없었는 독재문학이라는 신선한 장르를 무기로 삼아 아메리카 대륙을 공략하는데 성공했지 싶다. 무엇보다 영화 <나우 앤 씨>에선가 우디 해럴슨이 볼라뇨의 대표작이자 벽돌책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는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그래 미국에서도 이 정도란 말이지.


볼라뇨를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나치와 2차 세계대전은 조국 칠레의 암담했던 상황 만큼이나 작가가 사랑하는 주제다. 이번에는 나치즘의 본토인 독일이 아닌 대서양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생한 자생적(?) 나치 추종자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코미디 드라마에 초점을 맞춘다. 볼라뇨의 이 백과사전식 파시스트 열전을 넷플릭스에서 만들어 주면 어떨까라는 작은 바람이 있다. 최근 넷플릭스가 전 세계의 이야기들을 모두 웹드라마로 만들 기세를 보면 볼라뇨의 작품들도 곧 영화화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스물스물 피어오른다.


첫 번째 나치 추종자로 등장하는 에델미라 톰슨 데 멘딜루세는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나치의 대모 같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부르주아 집안 출신의 재력을 바탕으로 시인과 문인 행세를 하며 계속해서 허섭쓰레기 같은 작품을 발표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어느 작가의 작품이 생명력을 얻어 계속해서 문학 세계라는 험난한 바다를 자력으로 항해할 수 있다는 더 바랄 게 없겠지만, 우리 책쟁이들이 알다시피 그러기에는 정말 쉽지 않은 게 바로 이 바닥의 생리다. 하지만, 또 에델미라 아줌마의 경우처럼 돈이 많다거나 지속적으로 파시스트 작가들의 문단활동을 후원할 수 있는 자금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그건 또 다른 이야기일 것이다. 이 유한마담의 자손들 역시 엄마와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참 그녀의 딸이 히틀러와 같이 찍은 사진을 두고두고 울궈 먹는다는 설정은 정말!


에델미라 같이 문단에서 활동한 인사들이 있다면, 이름은 까먹어 버렸지만(너무 많은 이들이 등장하다 보니 이름조차 다 외울 수가 없다, 부디 양해해 주시길) 콜롬비아 출신 영맨 시인들인 이그나시오 수비에타와 고메스 등은 아예 무장친위대로 변신해서 전장에 나선다. 세상에 다른 부대도 아니고 바펜 SS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최정예 부대로 전투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전쟁범죄도 마다하지 않았던 그런 극악의 부대가 아니었던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드디어 유럽에 상륙한 미군 부대들이 바펜 SS에 학을 뗀 나머지, 바펜 SS 출신 포로는 잡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콜롬비아 출신 의용군 전사는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유일무이하게 히틀러에게 철십자훈장을 받을 정도로 순수 아리안족을 능가하는 출중한 전투력을 전장에서 보여준 바 있다. 개인적으로 이 서사가 과연 볼라뇨의 독창적 상상의 결과물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의 소설적 변용인지가 사실 궁금했다.


그 동네의 걸출한 멕시코 출신 여성 지식인 이르마 카라스코에 대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카라스코의 작품 세계보다는 스탈린주의자로 알려진 건축가였던 남편 가비노 바레다와 있었던 ‘사랑과 전쟁’은 요즘 너튜브에서 대유행 중인 스케치 코미디 부부생활을 능가하는 재미를 선사한다. 스페인 내전에서 내셔널리스트 편에 서서 맹활약을 한 카라스코와 정치적으로 너무 달랐던 남편 바레다와의 결혼 생활은 어쩌면 시작부터 파국을 예고했던 게 아닐까. 빈번하게 발생하는 구타라는 이름의 도메스틱 바이얼런스에도 불구하고 이별과 재결합이 교차하는 희비극이 블랙 유머가 가미된 볼라뇨 스타일로 너울거린다.


개인적으로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 등장하는 빌런 중에서 가장 문제적 캐릭터는 바로 아이티 출신(포르토프랭스)의 막스 미르발레가 아닐까 싶다. 글로 밥 벌어 먹고 살겠다는 이들은 자신에게 문재(文才)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바로 접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못하고, 다른 괴랄한 방식으로 얼치기 문학가라는 자신의 입지를 사수하려는 인물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문학계의 엄정한 현실을 볼라뇨는 예리하게 저격한다. 표절로 날아가 버렸다고 생각한 어느 작가가 문학이 주는 꿀을 포기할 수가 없어 다시 돌아온 장면을 보면서 이 동네가 거의 아수라판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볼라뇨가 살아 있어서 우리네 문단에서 횡행하는 이 꼴을 알았다면 얼마나 신랄하게 깠을까. 그러지 못하고 여전히 상부상조하는 주례사 비평의 거품은 꺼지지 않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파블로 네루다와 옥타비오 파스를 가차 없이 깠던 볼라뇨 정도의 패기를 지닌 비평가나 동업자들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더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막스 미르발레라는 문제적 사이비 작가는 출발부터 타인의 작품들을 표절했다. 그가 얼마나 교묘하게 표절을 했는지 심지어 원작자도 모를 정도였다고 했던가. 표절의 기술이 늘면서, 미르발레는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을 만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집해서 자신이 개발한 극강의 표절 수법으로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냈다. 오, 놀랍지 않는가 말이다. 미르발레가 얼마나 표절을 잘 했는지, 그의 눈부신 재능을 탐낸 이들이 표절 전문가의 표절작을 다시 한 번 표절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역시 무언가에 득도하게 되면, 윤리의식을 뛰어넘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생산해 내게 되는 모양인가 보다. 뭐 이 정도라면 표절문학이라는 장르가 하나 생겨나도 무방하지 싶다.


대미를 장식하는 카를로스 라미레스 호프만 중위의 서사는 확장된 <먼 별>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지난주에 <먼 별>을 읽기 전에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에 수록된 부분을 먼저 읽고 <먼 별>을 주파했다. 주인공들의 이름이나 몇 가지 소소하게 달라진 부분들이 있었지만, 역시나 중편으로 개작하기에 충분히 넉넉한 공간들을 볼라뇨는 잘 활용해서 청어람 같은 작품을 생산해냈다. 이 또한 강력한 서사의 힘에 덧댄 게 아닐까 추정해 본다.


파시스트 작가 열전의 양식을 띠고 있는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의 구조는 건조하고 딱딱하다. 잊지 마시라, 볼라뇨가 얼마나 친절하지 않은 작가인지에 대해. 아메리카 대륙에 분포한 파시스트 작가들의 생몰연대를 기본적으로 다루면서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게 되었는지, 성장과정에서 파시즘에 서서히 물들어 가는 보통 사람들로서 그네들의 삶에 작가는 천착한다. 어느 누구도 태어나면서부터 괴물은 아니었다. 멘딜루세 패밀리만 보더라도, 멘딜루세 여사의 영향력 아래 자란 자녀들이 파시스트 작가로 걷게 될 미래가 빤히 보이지 않던가 말이다. 볼라뇨가 이 책에서 전달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누구나 파시즘에 경도된 몬스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증편향과 보고 싶어 하는 사실만 보게 되는 진영 논리의 틀에 갇혀 나와 다른 이들과의 공존을 맹렬하게 거부하고 있지 않은가. 상대방이 옳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한 시간이다. 나와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기본 명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주말에는 잠시 쉬었다가 다시 볼라뇨를 읽기 시작했다.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등장하는 <부적>과 침술사 피에르 팽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팽 선생>을 동시에 읽고 있다. 이러다가 이야기가 헛갈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나의 5월 볼라뇨 읽기는 그렇게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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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16 17: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볼리뇨 도장깨기입니까 매냐님 ㅎㅎ 작가들 전작읽기 넘 좋아보입니다. *^^*

레삭매냐 2022-05-16 17:51   좋아요 2 | URL
거의 재독이라 그런지,
아주 술술 넘어가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나치 문학>은 무려
삼독이었네요.

페넬로페 2022-05-16 18:5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오늘도 로베르토 볼라뇨 작가의 매력을 뿜어 주시네요~~
칠레 출신이라 더 쓸 것이 많겠어요.
저도 도장깨기 중입니다^^
다른 책으로요~~

레삭매냐 2022-05-16 20:03   좋아요 3 | URL
그니깐요. 제가 오래 전 이 바닥
에 투신할 무렵에 작고하신 루
이스 세풀베다 샘의 책들을 넘나
좋아했었는데... 그 분도 가시고
다른 칠레 작가로 점 찍은 선수
가 바로 볼라뇨 되겠습니다.

책들이 많으니 선택의 폭이 넓지
않나 싶습니다. 부디 볼라뇨의
매력에 흠뻑 빠지시길 기대해
보렵니다.

새파랑 2022-05-16 18: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레삭매냐님 저번에 글 보고 볼라뇨 책을 읽어볼까 하고 우주점에 갔더니 이 책이 딱 있더라구요. 그래서 살까 말까 고민하다가 좀 어려워 보여서 안샀는데 별 세개라니 좀 그런가 보군요. (삼독이셔서 별 세개?)

아직 안팔렸는지 검색해봐야 겠습니다 ㅋ

레삭매냐 2022-05-16 20:05   좋아요 3 | URL
제가 처음으로 볼라뇨를 이 책
으로 만났을 적에는 그야말로
뻑이 갔었습니다. 아마 그 당시
에는 별 다섯 개를 주지 않았나
싶네요.

그런데 두 번 그리고 세 번 읽
게 되니 그리고 볼라뇨의 다른
책들이 원체 좋다 보니 좀 짜
게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쓰리 앤 하프 정도가 되지 않
나 싶습니다.

사실 볼라뇨 작가에게 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기냥 다 좋
습니다.

건수하 2022-05-17 08: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에서 볼라뇨 나오기 시작했을 때 궁금해서 이 책부터 시작해봤었는데
라틴 아메리카를 잘 모르고 다 허구이다보니 생소해서 읽기가 어려웠었습니다.

레삭매냐님 글 보니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22-05-17 16:03   좋아요 1 | URL
오래 전을 되짚어 보면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볼라뇨 작가의 방대한 라틴
아메리카 문단에 대한 지식
이 그대로 휘몰아 치다 보니
소화가 쉽지 않았습니다.

다시 읽어 보시면 또 색다른
재미를 느끼시지 않을까 추
정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