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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창녀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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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책들은 어떤 책들인가. 일단 내가 애정하는 작가들의 책은 덮어 놓고 사들인다. 제임스 설터가 그렇고 로맹 가리가 그렇다. 내 마음대로 이달의 작가로 선정한 로베르토 볼라뇨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물론 사들인 책을 모두 읽는 건 아니다. 이러저러한 이유 때문에 방치되어 있다가, 별의 순간이 오면 맹수처럼 달려들어 읽어제낀다. 8년 전에 산 <살인 창녀들>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내가 이 책을 안 읽었단 말인가? 명색이 볼라뇨 팬인데. 하여튼 8년만의 완독을 자축하는 바이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이달 들어 다시 볼라뇨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 그리고 보니 계기가 있었구나. 볼라뇨의 유작 <SF의 유령>에서 촉발되지 않았나 싶다. <칠레의 밤>을 필두로 해서 <살인 창녀들>까지 세 권을 읽었다. 지금은 <먼 별>과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동시다발적으로 읽고 있다. 이제사 왠지 슬럼프에 빠졌던 책읽기의 본궤도 오른 느낌이랄까.
제목도 거시키한 <살인 창녀들>에는 모두 13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다. 개인적으로 장편 소설보다 짧게 짧게 끊어치는 단편 리뷰가 더 어렵지 않나 싶다. 한 작품마다 리뷰를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래도 강렬한 이미지의 잔상이 남아 있는 단편 위주의 리뷰로 흘러가지 않나 싶다. 보통 출퇴근길 버스에서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데, 학생들이 볼까 두려워 책 제목을 마스킹 테이프로 가렸다. 포장지로 제목을 가린 애덤 써웰의 <나의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이래 처음이지 싶다.
나는 축구에 대하 문외한이지만 서로의 피를 공유하는 축구 선수들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바>가 참 매력적이었다. 뛰어난 실력을 바탕으로 바르셀로나로 이적한 화자 아베세도는 부상으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다. 비싼 몸값을 자랑하는 외국인 용병이기에 더 그랬을까? 룸메이트이자 동료로 아프리카 출신 부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돋우기 시작한다. 팀의 승리를 위해, 부과 영광을 위해 서로 피를 나누는 세리머니를 통해 아베세도와 부바 그리고 에레라는 기묘한 주술 의식을 경기 전날 치르기 시작한다. 사실 단편의 엔딩은 중요하지 않다. MLB의 광팬인 나는 야구 선수들이 돈과 명성을 얻기 위해 자신들에게 금지된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축구나 야구 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가 약물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지 않나 싶다. 가장 강력한 약물 방지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는 올림픽에서도 줄줄이 도핑 선수가 나오는 걸 보면 말이다.
표제작 <살인 창녀들>에서는 창녀에게 생포되어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남자의 이야기다. 정확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 시스템에서 착취당하는 계급의 일원이 포식자가 된다는 소설적 상상이 보여주는 가치의 전도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가에 대한 인과성의 부족해서 콘텐츠에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하긴 우리의 볼라뇨가 그렇게 친절한 작가는 아니니까.
모두 69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무도회 수첩>에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거장 파블로 네루다와 보르헤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 작가들이 라틴 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모두까기의 달인 볼라뇨에게 자비란 존재하지 않았다. 볼라뇨는 선배 작가 네루다 보다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음을 비판한 걸까?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문학의 사회적 기능 그리고 그 문학을 생산해내는 작가들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 문학의 이단아에게 성역이란 1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볼라뇨가 계속 살아남아 기성 문단 작가가 되었을 때, 그 역시 이런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하늘의 별이 된 지금, 요절 작가에 대한 신랄한 비판보다는 숭배와 추앙이 대세가 된 마당에 그 누가 볼라뇨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개인적으로 <살인 창녀들>의 문제작은 바로 <랄로 쿠라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포르노그래피가 지금은 야동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달고 사회의 이곳저곳을 횡행하게 되었지만, 오래 전에는 손에 넣기가 쉽지 않은 그런 아이템이었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돈이 된다는 것이다. 포르노 배우와 사제의 아들로 태어난 랄로 쿠라가 들려주는 그 동네 연대기는 서글픈 현실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과연 예술이란 무언가에 대한 볼라뇨의 생각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멕시코시티에서 보낸 십대 시절, 아마 볼라뇨는 시 창작에 매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저술한 거의 모든 작품에 시 창작과 시 동호회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시 창작이 고상함과 숭고함의 극단이라고 한다면, 그 대척점에는 랄로 쿠라가 추적하는 포르노그래피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저속함의 대표선수로 버티고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상호 극단을 오가는 예술의 가치나 정의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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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같이 여행 가서 내내 책만 읽는 청년의 이야기도 마음에 들었다. 멀리 아카풀코까지 가서 쾌락을 추구하는 아버지를 혐오하면서, 초현실주의 작품을 읽는 아들의 모습에서 내가 추구하는 다른 의미의 쾌락이 언뜻 보이는가 싶었다. 일상에서의 일탈을 의미하는 여행에서 반드시 맛있는 것을 먹고, 무언가 새롭고 자극적인 것만을 추구해야 한다는 천편일률적인 사고에 대한 강력한 어퍼컷이 아닐 수 없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속세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은 좋다. 여행하는 내내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다. 단 한 순간만이라도 ‘아, 이래서 내가 여행을 떠났지’라는 각성의 순간이 온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지난주에 방문했던 고성 왕곡마을의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그리고 개울가에서 노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 말이다.
몹시 불친절한 볼라뇨 씨의 책들을 하나하나 독파하면서 그가 서술하는 모든 걸 수용하고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나의 능력으로서는 그럴 수도 없고, 그걸 의지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순수함과 사악함 사이에서 자유자재로 노니는 이 문학적 공상가를 어찌 애정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씹을수록 무언가 오묘한 맛이 느껴지는 칡 같은 작가다.
[뱀다리] 일단 산 책들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읽는다. 이 책을 읽는데 무려 8년이 걸렸다. 그러니 책 사는데 아무런 걱정은 하지 마시라. 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전혀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책을 사고, 읽어라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