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의 유령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박세형 옮김, 최용준 감수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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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에 속지 말자. 로베르토 볼라뇨의 새로운 책 <SF의 유령>은 에스에프와는 한참 거리가 먼 그런 소설이다. 나는 그의 팬이기 때문에 그가 설사, 제목으로 장난을 친다고 하더라도 전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의 책이 새로 나온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서 읽을 거니까 말이다.

 

어젯밤에 <SF의 유령>을 읽다 말고, 문득 12년 전에 처음 읽은 <칠레의 밤> 생각이 나서 서가의 볼라뇨 코너에서 그의 책을 찾아 펼쳐 들었다. 그리고 단박에 읽어 내렸다. 참 이상하기도 한 나의 독서 편력이 아닐 수 없다. 새로 나온 책을 읽다 말고, 이미 두 번이나 읽은 책을 다시 꺼내 읽다니.

 

<SF의 유령>에 보면 1984년이라고 쓴 날짜가 게재되어 있는데 아마 그의 초기작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그리고 읽다만 그의 대표작인 <야만스러운 탐정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볼라뇨의 첫 번째 망명지였던 멕시코 시티에서 벌어지는 청춘들의 좌충우돌 스토리가 심심하게 다가온다. 나도 소설을 이끌어 가는 한 슈레야(로베르토 볼라뇨), 레모 그리고 호세 아르코 삼총사 같이 살았던 시절이 있었던가. 너무 오래 전이라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볼라뇨 작가에게 SF를 기대하지 않았다. 작가가 자신의 부캐로 삼은 한은 그링고 출신 SF작가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날린다. 그들이 자신이 보낸 편지를 읽건 말건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저 편지라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생각들을 정리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폭력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온 라틴 아메리카의 문청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과 레모는 그들이 새로 둥지를 튼 멕시코시티에 왜 그렇게 많은 문예지와 잡지 그리고 시를 담은 문집들이 난무하는지 조사에 나선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과 그링고 청년들은 비디오에 열광했다. 영국에서는 팝스타가 되기 위해 청년들이 열광했다고 하던가. 21세기 K-팝스타가 떠오르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라틴 아메리카 청년들과 달랐던 건, 자신의 취미활동과 오락거리에 돈을 쓴 반면 가난한 우리의 아미고들의 선택지는 값싸고 초라한 시, 시 잡지였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상대적으로 돈이 들지 않는 문학 작품에 매진했던 게 아닐까. 최소한 상상력에는 돈이 들지 않으니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에도 그런 문학 붐이 일어나는 상상을 해본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너튜브라는 강력한 미디어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현실적 문제가 상존한다. 초단위로 새로운 오감을 자극하는 동영상 콘텐츠들이 수시로 업로드되는 마당에, 가다듬고 편집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는 문학 작품 혹은 시 쓰기에 누가 그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단 말인가. 설상가상으로 전자는 대박이 나면 금전이라는 보상이 뒤따르지만, 점점 독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후자는 물질적 보상도 기대할 수가 없다.

 

고백하건데 나는 SF 문학에는 거의 문외한인지라, 볼라뇨 작가가 숱하게 인용하는 SF 작가들의 이름이 그렇게 낯설게 들릴 수가 없었다. 설사 들어는 봤어도 그들의 작품에까지는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재기발랄한 문청이 의도하는 바를 제대로 짚었나 싶다.

 

소설의 한 축에 SF 소설의 불모지 라틴 아메리카에서 문학도로 성공하겠다는 한과 레모가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이제 막 사랑에 눈뜨기 시작한 청년들의 감정들이 너울거린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한정하다는 가정 아래, 썬업은 기본이고 장물 오토바이를 외상으로 사들여서 멕시코시티의 밤거리를 질주한다. 느닷없이 찾아오는 사랑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왠지 물설고 낯선 도시에서 청춘을 보낸 볼라뇨 작가의 단상을 엿보는 듯하다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소설에서 SF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시간여행이나 외계인, 스페이스 오페라 같이 장대한 요소들은 전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밤이 내린 도시의 곳곳을 누비며 사랑을 갈구하는 외로운 늑대 같은 사랑꾼의 모습들이 기대를 대신한다. 라우라와 레모가 사랑의 장소를 선택한 장소가 대중목욕탕인 힘나시오 목테수마라고 했던가. 목욕탕의 벽면을 장식한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황제의 시선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1984년작인 <SF의 유령>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볼라뇨를 읽을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시작은 <칠레의 밤>이었고, 지금은 <살인 창녀들>을 읽고 있다. 오늘은 야만적인 두께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샀다. 나에게 20225월은 볼라뇨의 달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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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5-10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칠레의 밤. 기억하겠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2-05-10 15:21   좋아요 1 | URL
볼라뇨의 시작은 <칠레의 밤>
으로 하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페넬로페 2022-05-10 15: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로베르토 볼라뇨?
역시나 처음 들어봅니다.
덕분에 새로운 작가를 많이 영접합니다^^

레삭매냐 2022-05-10 17:21   좋아요 2 | URL
제 마음 대로 저를 볼라뇨
전도사를 임명...

저희 오래된 독서모임에서
오래 전부터 볼라뇨의 책으로
독서 모임을 함 하자 노래를
부르던 시절 생각이 나네요.

결국 <칠레의 밤>으로 하긴
했었는데, 기대했던 것처럼
열변을 토하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하네요.

다시 한 번 더 잘할 자신이 ㅋ

라로 2022-05-10 17: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라뇨,,, 또 다른 작가를 읽어야 하는 리스트에,, 적자 적어.ㅠㅠ
매냐님 찬찬히 소개해 주세요,, 따라가기 벅참요.^^;;;

레삭매냐 2022-05-10 17:57   좋아요 0 | URL
볼라뇨는 12년 전에 처음
만난 순간부터 찌리릿~~~
하는 무언가를 만난 작가
라 그런지 더 애정하고
있답니다.

더군다나 칠레가 우리나라
처럼 혹독한 군사독재와
민주화의 과정을 거친 나라
라 그런지 더 애착이 가더
라는 -

moonnight 2022-05-10 2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볼라뇨씨는 사놓기만 한 수많은 작가들 중 한 분ㅠㅠ 언젠가는 읽겠지요. (또 체념조ㅠㅠ;)

레삭매냐 2022-05-11 08:56   좋아요 0 | URL
앞으로도 나올 책들이 있으니
마치 살아서 계속해서 집필하
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
랍니다.

언젠가는 반다시 읽습니다 젭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