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통은 허겁지겁 그렇게 책을 읽어댄다. 결말이 너무나 궁금하기 때문에 한 번 궤도에 오르면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일부러 책읽기의 속도를 조절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엔딩에 도달해 버리기가 싫을 정도로 내용이 좋기 때문이라고 해두자. 이번에 내가 만난 <하버드 스퀘어>가 그랬다.

 

사실 안드레 애시먼 작가의 팬을 자처하는 나는 <하버드 스퀘어>의 번역을 기다리지 못하고 2년 전, 원서를 주문했다. 하지만 모국어도 아닌 영어 읽기의 스트레스 때문에 조금 읽다가 내팽개쳐버렸다. 그러다 보니 번역이 되어 출간되었지 무언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 하버드 스퀘어의 밤거리를 누비는 택시의 불빛이 아른 거리는

원서의 표지는 정말 일품이다. 국내 번역서도 차라리 그냥 원서

의 표지를 그대로 쓰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버드 스퀘어>는 안드레 애시먼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다. 때는 1977년 여름, 하버드 스퀘어가 위치한 케임브리지를 배경으로 한다. 이집트 출신 유대인인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에 도전하고 있다. 세 번의 종합시험 가운데 두 번을 떨어지고 1월에 있을 마지막 시험마저 떨어진다면 그 후의 기약은 없다. 아니 모든 것이 불확실한 그런 삶 속으로 내던져진 느낌이랄까. 그런데 제법 살다 보니,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어떤 것도 우리에게 확실하게 약속해 주는 법이 없더라. 그저 오늘 하루를 살 뿐.

 

그리고 화자인 나는 카페 알제에서 요즘 말로 하면 관종격인 택시 드라이버 칼라슈니코프, 아니 칼라지를 만나게 된다. 내가 이 자전적 소설을 통해 접하게 된 튀니스의 시디 부 사이드 출신 칼라지는 대단히 뻔뻔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일전에 창조한 그리스인 조르바와 너무 많이 닮았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해준다.

 

이 칼라지라는 남자는 자신감의 화신이고, 세상에 모르는 게 없는 그런 남자다. 세상에 두려울 게 하나 없는 칼라지는 미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권리인 영주권을 원한다. 반대로 나는 영주권을 가지고 있고, 박사 학위를 원한다. 엘리트 코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박사 학위, 그것도 다른 대학도 아닌 하버드의 박사 학위라니. 이런 두 이질적인 존재가 과연 치고 박고 싸우면서 과연 우정을 직조해낼 수 있을 것인가?

 

소설을 읽다 보면 나라는 캐릭터는 정말 비겁한 엘리트의 전형이라는 점이 등장한다. 지중해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아메리카에서 도리 없는 이방인이라는 점까지도 똑같다. 자기혐오라는 특질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아니 처음에 그 둘을 이어준 것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였다. 한 명은 자신감에 넘치는 아랍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심한 엘리트 유대인이기도 했다. 서로 상극이 아니던가. 아니 그런데 초반에는 이런 형식적인 온갖 장애물들을 뛰어 넘는 우정의 탄생을 목격하는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점점 더 박사 학위에 가까워질수록 칼라지와는 거리를 두게 된다. 나는 칼라지가 누리는 자신감 넘치는 자유를 부러워하면서도 동시에 그의 무분별한 행동에 질려 하고 결국에 가서는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마음먹기도 한다. , 그 둘을 이어주는 또하나의 공통점 중의 하나는 바로 가난도 있었다. 특별한 즐거움을 원하면서도, 나는 항상 호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야 했다. 월세는 물론이고, 먹을 것부터 시작해서 연애에 이르기까지 돈이 필요하지 않은 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유럽으로 어디로 새로운 경험을 찾아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이 떠나면 나는 에어컨도 하나 없는 무더운 케임브리지에 남아 종합시험 준비와 호구 걱정을 해야했다.

 

그런 순간에 등장한 칼라지라는 존재에 나는 감사하면서도 동시에 걱정하기 시작한다. 특히 부잣집 딸인 앨리슨 집안과 관계를 맺고, 하버드의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 칼라지가 등장할 때는 더더욱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나는 어쩔 수 없는 속물이었다는 것이다. 자신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결국 사단이 나고 만다. 그리고 칼라지는 조국을 떠나 17년간 이룬 것 하나 없는 타국생활에 대한 환멸을 나에게 털어 놓는다. 그렇게 강할 거라고 생각한 남자가 미래의 잘나가는 교수이자 작가가 될 하버드 대학원생에게 기대는 장면은 참...

 

그렇게 시작된 관계의 미세한 균열은 치유할 방법이 없다. 아니 내가 동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그를 의식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파국은 시작되었다. 아니 관계의 용도가 이미 폐기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우리 모두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나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된다면, 귀찮음도 마다하면서 기꺼이 상대방을 도울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바로 등을 돌리기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자신의 이런 이중성에 대해 칼라지가 신랄하게 비난했다면 의 속은 아마 후련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의 칼라지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이미 숱한 그런 관계의 순환을 경험한 칼라지는 물러설 때를 잘 알고 있었다. 칼라지가 쏘아 보내는 비난의 눈빛에 아마 나의 양심을 산산조각이 났을 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양심이란 게 있었다면 말이다.

 

다시 한 번 소설 <하버드 스퀘어>를 통해 인간관계가 가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의 화자는 칼라지가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마다, 그의 요청에 어떤 방식으로든 응했다. 물론 얄팍한 계산과 변명도 첨가되긴 했지만 말이다. 과연 타인에게 그가 원하는 완벽한 도움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관계에서 일방의 희생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데, “의 노력에도 많은 점수를 줄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심지어 택시 운전을 못하게 된 칼라지에게 하버드 대학 객원 프랑스어 강사직도 마련해 주지 않았던가. 21세기에는 어림도 없었을 그런 일이 지난 세기에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하나의 에피소드로서는 정말 제격이 아니었나 싶다.

 

이방인들의 안식처로 등장하는 카페 알제도 인상적이다. 소설의 출발점이 바로 카페 알제가 아니었던가. 외로운 영혼들은 말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안식을 주는 공간으로 발걸음을 하기 마련인가 보다. 화자(저자)는 카페 알제에 우연히 들렀다가, 결국 칼라지를 만나게 되고 이렇게 수수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다양한 각도의 생각들과 오래된 추억들을 되새기게 하는 그런 멋진 이야기의 출발을 선보여 주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닌 타인의 삶 속에 침잠하기가 어려운 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부단하게 나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타인의 행복도 존중해 주는 그런 스탠스를 취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나 싶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들에 대한 오기가 못내 아쉽다. 아무래도 역자가 현지 사정을 모르다 보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좀 더 세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자전적 소설 <하버드 스퀘어>를 읽으면서 이제는 거의 휘발된 빈타운에 대한 기억들이 구석에서 슬며시 피어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고 하던데, 기억 혹은 추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파랑 2022-03-01 07:3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안드레 애치먼 작품을 한편밖에 안읽었지만 정말 섬세하다는 느낌이 들더라구요. 이 책도 왠지 그런 느낌인가 보네요. 레삭매냐님 별다섯에 너무 좋았다고 하시니 더 기대가 됩니다 ㅋ

레삭매냐 2022-03-01 09:48   좋아요 4 | URL
앞으로 애시먼 작가의 책이
두 권 더 나온다고 하니
기대만빵입니다 :>

지명에 대한 오기 때문에
별을 하나 빼려 했으나...
그건 저자의 잘못이 아니
니.,. 암튼 그랬다고 합니다.

mini74 2022-03-01 09: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페이지 줄어드는게 아까웠어요.~

레삭매냐 2022-03-01 09:49   좋아요 4 | URL
뭐랄까 새로운 관계 속으로
뛰어 드는 사람에 대한 심
리 묘사가 탁월했습니다.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마지막 책장 넘기는데 살짝
괴로웠더라는.

미미 2022-03-01 12: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저 지역에서 지내셨었나봐요!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이 더듬어 가는 추억이
제 추억이 된 것마냥 즐거웠습니다.

저도 그려지는 이미지가 있다면 훨씬 더 흥미롭게 읽었을것 같아요.
음미하시면서 아껴 읽으신거 넘 이해가 됩니다.^^*

레삭매냐 2022-03-01 13:44   좋아요 2 | URL
이십대의 초큼을 보낸 곳이라
그런진 몰라도 격이 새록새록 -

그 시절에는 참 사진도 많이
찍고 그랬었는데... 싸이가
망하는 바람에 사진이 다 사
라져 버렸네요 ^^

책은 참 재밌었습니다.

얄라알라 2022-03-01 12: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 거의 못 읽고 지낸 이번 주, 간만에 알라딘 들어와서 플친님들 리뷰 읽는데
독서를 넘 행복하게 하셨구나....샘이 날 지경으로 재미있게 읽으셨다는 걸 느끼겠어요

레삭매냐님, 2년 전 원서로 읽으시고 재독이시니
더 깊이 읽으셨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03-01 13:48   좋아요 2 | URL
새책으로 안드레 애시먼의 책을
그리고 구간으로는 타리크 알리
의 책들을 다시 읽고 있는데 넘나
재미지지 뭡니까 그래.

원서로는 못 다 읽었어요 힝~~~
그래서 이번에 번역서로 다 읽었
답니다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