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없다 - 카르멘 라포렛 탄생 100주년 기념판
카르멘 라포렛 지음, 김수진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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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사에 큰 상흔을 남긴 전쟁으로 지난 세기의 스페인 내전과 베트남 전쟁이 꼽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944, 스페인 출신의 23살난 작가 카르멘 포렛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니힐리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제목의 소설로 혜성처럼 스페인 문단을 폭격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바로 스페인 내전이 끝난 1942년에서 1943년 사이의 스페인 바르셀로나다. 어떤 시절로 잡아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절에 유럽은 그야말로 전화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이데올로기 때문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스페인에는 전화가 미치지 않았다. 독재자 프랑코의 줄타기 외교의 승리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이제 막 고아 소녀가 된 18세 안드레아는 대학 진학을 위해 바르셀로나로 상경한다. 이러한 도식은 상당히 고전적이라고 볼 수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바우 거리에 사는 안드레아의 외할머니와 앙구스티아스 이모 그리고 후안(+외숙모 글로리아)과 로만 삼촌 그리고 가정부 안토니아가 사는 대략 80년 전 스페인 막장드라마 속으로 뛰어 들어가 보자.

 

일단 등장인물들의 성격들이 보통이 아니다. 우선 안드레아를 옥죄는 역할을 담당한 앙구스티아스 이모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그녀는 현대 스페인 여자들에게 선택지는 결혼 아니면 수녀원이라는 대단히 프랑코일파가 좋아할 만한 그런 이분법적 사고를 지닌 여성이다. 프랑코가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바로 가톨릭 신앙에 근거한 스페인 전통 질서의 복원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모는 작고하신 외할아버지의 반대로 헤로니모 산스와 결혼에 실패하고, 신대륙으로 건너가 성공하고 돌아온 돈 헤로니모와 다른 곳도 아닌 교회에서 밀회를 즐기지 않았다고 했던가. 이 스페인식 막장 드라마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근거가 희박하다 보니 어디까지나 진실이고 또 거짓인지 판단할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앙구스티아스는 안드레아를 붙들어 놓고는, 안드레아가 더 어렸다면 폭력까지 써가면서 훈육했을 거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내가 보기에 앙구스티아스는 스페인 사회를 중세로 돌려 버린 프랑코 총통의 대변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종류의 억압과 속박에도 저항하는 캐릭터인 안드레아는 프랑코 총통에게 패배한 스페인 민중이라고나 할까. 시골에서 자신을 억압한 사촌 언니로부터 바르셀로나로 도주했건만, 자유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바르셀로나에는 한술 더 뜨는 강적이 안드레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안드레아에게 유일한 해방구는 대학에서 만난 친구 에나였다. 부유한 상인 집안 출신의 에나 가정을 안드레아는 마냥 부러워한다. 아리바우 거리의 집에서는 뜨거운 물조차 나오지 않아 한겨울에도 찬물로 샤워를 해야 했다. 이제 막 대학시절을 시작한 청춘에게 처절한 가난은 친한 친구에게 숨기고 싶은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에나의 가정과 자신이 더부살이하고 있는 아리바우 거리의 그것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전자가 자신이 꿈에 그리던 이상향이었다면, 후자는 악몽 그 자체였다. 화가를 자처하는 후안과 팜므 파탈 스타일의 외숙모 글로리아의 육박전은 일상이었다. 무능력한 가장이었던 후안은 가정폭력을 일삼았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의 폭력을 구사했다. 이것도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동족상잔의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동생 로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프랑코가 내전에서 승리한 뒤, 로만은 그들에게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로만이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다고 해서 자신의 누나 앙구스티아스의 연애편지와 일기를 훔쳐보는 일이 용납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카의 가방도 마구 뒤지지 않았던가. 도대체 이 집구석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건지 싶을 정도다.

 

안드레아를 괴롭히던 앙구스티아스 이모가 결국 봉쇄 수도원행을 택하면서 안드레아에게는 자유가 주어지게 된다. 외할머니 댁에 더부살이하던 안드레아는 연금을 자신이 직접 수령하게 되면서 자신의 관계를 재설정하겠다고 나선다. 아리바우 패밀리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그런 안드레아를 만류하고, 규모 있는 소비를 하지 못한 안드레아는 밥 사 먹을 돈이 없어 야채 삶은 물을 들이키는 궁상에 처하기도 한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실소가 나오던지.

 

나는 이 소설을 굉장히 정치적으로 읽었는데, 냉혹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공화주의자들이 결국 내전에서 프랑코 일파에게 패배하고 독재자의 가혹한 통치를 받게 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콩가루 같은 아리바우 가족의 모습은 내전 당시, 단결해서 프랑코 파시스트들과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분열로 자멸해 버린 인민전선의 모습이 연상됐다.

 

결국 자유를 꿈꾸던 영혼은 마드리드로 떠나게 되는 에나의 가정에 의탁해서 지긋지긋한 아리바우 거리에 이별을 고한다. 쓸쓸한 엔딩을 보면서 과연 안드레아가 마드리드로 가서 행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아리바우에서도 성공하지 못한 자아 찾기와 행복 추구가 전적으로 에나 가족에 의존해서 가능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코 통치 시절을 교묘하게 비판한 소설 <아무것도 없다>가 당시의 검열관들을 따돌리고 출간된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독재의 부역자들은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출간해도 체제 유지에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던 게 아닐까. 그 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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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21-10-08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당선 축하해요^^

서니데이 2021-10-08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새파랑 2021-10-08 1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축하드려요~!! 아무것도 없는게 아니었군요 ^^

그레이스 2021-10-08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독서괭 2021-10-08 20: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선 축하드립니다~^^

초딩 2021-10-13 09: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 축하드려요 ^^
좋은 하루 되세요~

thkang1001 2021-10-13 13: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 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