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의 체스 민음사 외국문학 M
파올로 마우렌시그 지음, 이승수 옮김 / 민음사 / 2017년 5월
평점 :
절판



나는 책사냥꾼이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번씩 근처 중고서점 사이트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책이 시중에 나와 있나를 검색한다. 물론 우리 동네에 나와 책취향이 비슷한 경쟁자가 있어 서두르지 않으면 채갈 수 있다. 그렇게 몇 번 경험하고 나니 마음에 조바심이 생긴다.

 

그렇게 해서 어제 두 권의 책들을 수급했다. 하나는 민음사 M 시리즈로 지금은 절판된 파울로 마우렌시그의 <폰의 체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읽기 시작한 에드문도 데스노에스의 <저개발의 기억>이다. 두 권 모두 나의 사냥 목록에 올라 있던 책들이라 아주 흡족하다. 아 참 무슨 이벵으로 받은 도서상품권과 적립금으로 땡긴 안 비밀이다. 공짜 책의 즐거움이여.

 

<폰의 체스>는 홀로코스트와 체스의 절묘한 조합이다. 그러니까 체스 이야기로 출발해서 홀로코스트로 귀결이 된다는 것이다. <폰의 체스>는 골동품 악기 복원을 하던 파올로 마우렌시그가 나이 50세에 발표한 첫 소설이라고 한다. 참고로 저자는 올해 영면에 들어가셨다고 한다.

 

뮌헨과 빈을 오가며 살던 성공한 사업가이자 체스 거장 디터 프리슈가 살해당했다. 정확함과 규율의 독일인답게 반듯해 보이는 삶을 살던 프리슈가 별장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자 하인들의 그의 종적을 추적했고, 살해당한 그를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소설은 그가 죽기 며칠 전에 뮌헨에서 빈으로 오는 기차 안에서 갖게 된 특이한 만남을 설명한다. 물론 그 속에 프리슈의 죽음에 대한 단서가 숨겨져 있는 건 기본일 것이다.

 

뮌헨에서 빈으로 오는 길에 체스의 거장답게 프리슈는 친구 바움과 서너 판을 체스를 둔다. 이것 또한 고인의 패턴이었다. 그런데 그의 객실에 갑자기 나타난 청년이 거장에게 훈수를 두는 게 아닌가. 그것은 분명 도발이었다. 고인은 청년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 보고 정중하게 체스 두기를 청한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야기가 출발한다. 청년의 이름은 한스 마이어. 조실부모한 마이어가 어떻게 해서 체스라는 무궁무진한 세계에 빠져 들게 되었는지 저자는 간략하면서 강력하게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오래 전에 심슨 체스판을 사서 재미로 체스를 몇 판 두곤 했던 기억이 난다. 천성이 게을러서 그런진 몰라도, 그렇게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체스 게임이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되는 순간, 게임에 흥미를 잃어버렸지만 말이다.

 

그런데 나같이 쉽게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닌 한스 마이어나 디터 프리슈처럼 이마에 체스의 낙인이 찍힌 이들은 그렇지가 않았던 모양이다. 그들에게 체스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라, 뭐랄까 운명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단순히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던 마이어는 곧 체스 스승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그는 타보리라는 기인을 만나게 된다. 배움을 갈구하는 미래의 제자에게 타보리는 체스보드를 위해 희생과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냐고 묻는다. 그에 따를 후과를 생각하지 않은 마이어는 기꺼이 타보리의 폰(pawn)이 되었다.

 

그렇게 소설의 전반부는 타보리라는 문제적 인간이 무대에 오를 준비를 마친다. 훗날 그의 양자가 되는 한스 마이어는 그저 타보리가 오랜 시간을 들여 준비해온 복수를 위해 체스보드 위에 올려놓은 폰이었다.

 

유대인 출신 타보리는 체스 집안의 장자로 태어나 결국 체스 명인이 되어야 하는 숙명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타보리는 아버지는 엄격하게 그를 조련했다. 그리고 지난 세기를 주름 잡은 그야말로 체스계의 그랜드마스터들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를 필두로 해서 알레힌 그리고 아키바 루빈슈타인 같은 거장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사실 나도 체스 업계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그들의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는데, 글로만 들어도 그들이 체스의 레전드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타보리가 직접 만난 아키바 루빈슈타인 같은 거장은 그야말로 체스에 사로 잡혀 사는 그런 사람이었다. 게다가 체스는 승부를 내야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던가. 그 와중에 타보리는 평생의 라이벌 디터 프리슈라는 위험천만한 숙적과 만나게 된다. 타보리가 창조력 넘치는 변칙(베리에이션?) 즐겨 쓰는 플레이어라면, 라이벌 프리슈는 정통 아리안인답게 규칙을 준수하면서 정석을 추구하는 플레이어이다. 언제나 그렇듯 라이벌들은 서로를 의식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그렇게 체스보드 위에서 타보리와 프리슈가 치열하게 경쟁하는 가운데, 피할 수 없는 가혹한 광풍의 시기가 닥쳤다. 나치즘이 흥기한 독일에서 유대인 핍박이 시작된 것이다. 프리슈와의 마지막 공식 대결에서 타보리는 주최 측의 편파 판정에 이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욕까지 당한다. 결국 나치들은 독일의 모든 유대인들을 전멸시키기로 결정했고, 미리 망명하지 않고 피신해 있던 타보리 가족은 누군가의 밀고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베르겐벨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보리는 다시 한 번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된다.

 

파올로 마우렌시그 작가는 오묘하면서도 매력적인 체스의 세계로 우리 독자들을 유인해서 시대를 주름 잡은 체스 그랜드 마스터들의 향연의 맛을 살짝 보여준다. 그 다음에는 폰으로 선택받은 한스 마이어의 이야기를 지나, 진짜 서사인 타보리의 서사로 토스해준다. 한스 마이어의 이야기는 최종전을 위한 토너먼트 경기 정도였다.

 

인간으로서 존엄성이 모두 부정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한 만인에 대한 투쟁이 넘실거리던 강제 수용소에서 타보리는 상상할 수 없는 판돈을 걸고 체스보드 앞에서 숙적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영혼까지 쥐어 짜내서 이겨야 하는 절박함에 대한 작가는 묘사는 과연 이 소설의 그의 첫 번째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뭐라고 꼭 짚어서 말하긴 그렇지만, 아쉬운 점들이 좀 있었다. 속도감 있는 진행은 좋았지만, 서사는 밀도는 그만큼 떨어진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저자의 다른 책도 한 번 만나고 싶은데 국내에 유일하게 책이 <폰의 체스> 뿐이라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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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29 11: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폰의 체스> 리뷰 보니 왠지 츠바이크의 <체스이야기>가 떠올랐어요 ^^ 레삭매냐님하고 책사냥꾼하고 잘어울리는거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1-06-29 11:30   좋아요 4 | URL
저도 아직 만나 보진 않았지만
왠지 츠바이크의 <체스 이야기>
가 떠오르더라구요... 역시 대단
하십니다 !

한동안 책을 많이 정리했었는데
다시 책을 불고 있네요 ㅠㅠ

coolcat329 2021-06-29 13: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체스!하면 츠바이크가 생각나지요 ㅎㅎ
민음사 M시리즈는 처음 보네요. 폰의 복수라...짜릿한 반전 스릴이 예상되는데 절판이군요. 도서관에서 한 번 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6-29 13:09   좋아요 5 | URL
민음사는 모클 시리즈도 더 이상
내지 않고, M 시리즈는 왠지 간
만 보다가 그냥 흐지부지된 것
같습니다.

아쉬운 부분이 있긴 하지만 가독
성 하나는 끝내줍니다.

독서괭 2021-06-29 15: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현실에 존재하는 책사냥꾼이라니.. <꿈꾸는 책들의 도시>나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가 떠오릅니다. 놀라워요.

mini74 2021-06-30 15: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헉 최근에 csi시리즈에서 체스관련 살인사건을 보고 급 체스에 관해 관심이 생겼는데 ㅎㅎㅎ 폰의 체스 너무 재미있겠어요. 읽고싶은데 ㅠㅠ품절센터의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