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하루 - 피란델로 단편 선집
루이지 피란델로 지음, 정경희 옮김 / 본북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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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중고서점에서 산 책이다. 허구한 날 적립금 쿠폰을 뿌려 대니 도저히 책을 안사고 배길 재간이 없구나 그래. 게다가 예전부터 언젠가 한 번 읽어 보겠다고 작심하고 있던 이탈리아 시칠리아 출신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의 책이니 더더욱 안살 수가 없었노라고 나는 변명해 본다.

 

희곡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는데, 루이지 피란델로는 단편 소설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다. 생전에 자그마치 250편에 달하는 단편들을 썼다고 한다. 이 정도면 스탕달에 버금가는 소설 쓰는 기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루에 소설을 한 편이라도 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았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소설집 <어느 하루>에 담긴 9편의 단편들은 이런 저런 방식으로 영화화된 작품들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루이지 피란델로의 단편 소설들은 그야말로 이탈리아 영화감독들의 보물창고였지 싶다.

 

9편의 단편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만난 작품은 <유모>(죽은) <어머니와의 대화>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소설들은 시칠리아 이야기로마 이야기로 나뉜다고 하는 <유모>는 그 중간 정도가 되지 않나 싶다. 로마에 사는 부유한 변호사의 아내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돌볼 유모가 필요하다. 그래서 아내의 친정에서 시칠리아 출신 건장한 산모, 그러니까 다른 아이를 돌볼 안니키아를 로마로 보낸다. 물론 안니키아에게도 갓난쟁이가 있다. 유배당한 남편 대신 돈벌이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안니키아는 어린 자식과 생이별을 하고 물설고 낯선 로마로 증기선과 기차를 타고 떠난다. 고향을 떠나는 안니키아에게 시어머니는 저주를 퍼붓는다. 그녀의 저주가 먹힌 걸까, 결국 고향이 남은 안니키아의 아들은 죽고 만다. 자신의 젖을 먹여 키운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에르실리아 아씨의 아이에게 집착하는 안니키아 그리고 그녀를 내쫓는 고용인들. 이것은 비극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는 이탈리아 통일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에 대한 작가의 추모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다른 단편인 <또 다른 아들>에 등장하는 어떤 어머니는 첫 두 아들만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불가피하게 낳은 막내아들은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꿈과의 희망의 나라 아메리카로 떠나 소식 없는 아들들을 기다리는 시칠리아 출신의 사모곡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고향을 떠나, 이국 땅에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는 걸 알았다면 그 어머니의 심정은 또 어땠을까.

다시 <어머니의 대화>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대단한 기백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다. 오죽하면 시칠리아 봉건왕국의 군인들이 쳐들어오면 딸들에게 투신하라는 말까지 하겠는가 말이다. 얼마 전에 만난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영화 <표범>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리발디의 시민군과 보르보네 왕군이 격렬하게 시가전을 치르지 않았던가.

 

또 다른 어느 어머니는 아버지를 모르고 자란 십대 소년 아들 체사리노 브레이를 기숙학교에 들여보내고, 몰래 다른 동생을 낳고 그만 죽는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도대체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쨌든 갓난쟁이에 대해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 소년은 교장의 도움으로 문부성 서기 일을 하면서 그야말로 고학으로 공부도 하고 아기도 돌본다. 그야말로 20세기판 막장 드라마급의 이야기가 아닌가. 도대체 아기의 아버지는 누구란 말이지? 어머니가 남긴 쪽지에서 알베르토라는 이름을 체사리노는 알아낸다. 그 다음에, 아기의 아버지가 아기를 찾아온다.

 

구시대의 상징으로 봉건사회였던 시칠리아가 근대화 시기로 돌입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가난한 프롤레타리아들은 죽어서도 묻힐 땅 한 뙈기가 없어 마르가리 영주를 상대로 한 투쟁에 돌입한다. 죽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숙명이다. 죽어가는 노인이 산 채로 자신이 묻힐 곳에 가서 묻힐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나, 그런 그에게 줄 땅은 없다며 공권력을 동원하는 마르가리 영주의 비정함이 오늘날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됐다.

 

깨진 항아리의 보수를 놓고, 기술자 지 디마 리카시와 항아리의 주인장 돈 롤로 지라파가 벌이는 해프닝도 흥미진진하다. 아니 어떻게 기술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항아리 안에 들어가서 항아리를 보수하는 작업을 해서 결국 스스로 갇히게 된 거지? 이런 땜장이에게 왜 돈을 주어야 한단 말인가? 결국 애써 고친 항아리를 깨부수지 않고, 땜장이를 꺼낼 방법이 없지 않은가. 루이지 피란델로 작가는 결국 이런 타협이 어려운 이슈에 대한 상충하는 의견을 들어 당대 이탈리아가 겪고 있던 사회적 갈등도 마찬가지라는 결론을 도출한 게 아니었을까. 누가 점심값을 낼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만난 루이지 피란델로의 소설들에 합격점을 주고 싶다. 물론 모든 이야기가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특히 늑대인간 스토리!), 정선되어 출간된 단편들이니만큼 그 콘텐츠의 완성도는 보장되지 않았나 싶다. 읽어야할 책들이 줄 지어 대기 중인 3월이 지나가고 나면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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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1-03-06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말씀처럼 정말 많은 단편을 썼네요. 소개해 주신 덕분에 저도 이 단편들을 읽고 싶어졌어요. 보관함에 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레삭매냐 2021-03-06 13:42   좋아요 0 | URL
세상은 넓고, 참으로 모르는
작가들이 넘쳐 나는 것 같습니다.

피란델로 선생의 책들을 좀 더
찾아 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