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인 악사 대산세계문학총서 164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지음, 오원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책들은 영혼을 두들겨 대는 그런 느낌을 주는 책들이 있다. 또 어떤 책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충격적인 그런 정보를 전달해 주는 책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번 연휴에 작정하고 만난 블라디미르 코롤렌코의 <맹인 악사>는 어떤 범주에 들어가는 책일까 물어본다.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하지 않지만,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광대한 우크라이나의 대자연과 삶에서 비극을 만난 이들이 겪는 일상이 잔향을 남기는 그런 작품이다. 읽을 때보다 오히려 다 읽고 나서 더 생각할 거리들을 만드는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블라디미르 코볼렌코, 역시나 처음 들어보는 러시아 작가다. 아니 우크라이나 작가라고 해야 할까. 제정 러시아 시대 사람이니 아무래도 러시아 사람으로 분류해야지 싶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지토미르 출신으로 수도 모스크바의 페트로프 농림업 아카데미 출신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지식인 그룹이 아닐까 싶다.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인민주의 운동에 투신해서 시베리아에 유형을 두 번이나 살았다지. 나중에 복귀해서 작품 활동을 전개했고, <맹인 악사>는 저자의 인도주의 스타일을 반영하는 대표작이라고 한다.

 

<맹인 악사>에서는 모두 4편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첫 작품은 <마카르의 꿈>이다. 타이가 지역 찰란에 사는 시골 농부 마카르가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에 보드카가 없으면 못사는 주정뱅이다. 왠지 그의 삶에서 신산한 러시아 농민들의 삶의 흔적이 엿보인다. 성탄절 전야에 그 좋아하는 보드카도 한 병 살 돈이 없는 마카르는 장작 다섯수레를 담보로 1루블을 땡겨서 보드카를 사서 질탕 퍼마신다.

 

원래 그 보드카는 아내하고 같이 마셔야 하는 술이었는데. 그 결과, 아내에게 내쫓겨 사냥을 위해 놓은 덫에 걸린 여우라고 잡을 속셈으로 타이가로 향한다. 호기로운 타이가행이 우리의 주인공 마카르의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나. 죽기 전에 친하게 지내던 이반 신부의 안내로 대심판관 토이온 앞에 선 거짓말쟁이이자 주정뱅이 마카르는 심판의 저울대 앞에 선다. 누가 봐도 마카르의 운명은 빤해 보였지만, 예상과 달리 토이온 앞에서 조목조목 자신을 변론하는 마카르. 저자 코롤렌코는 마카르를 통해 러시아 인민들에게도 자신들만의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지식인 계급에게 알리고자 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부자들이 더 천국에 들어가기 힘들다는 성경의 구절도 있지 않은가.

 

저자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는 <나쁜 패거리>에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리던 주인공 소년이 마을에서 추방된 소위 나쁜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는 과정을 담겼다. 19세기 러시아 역사에 대해 일천한 관계로 당시 러시아 민중들의 사회경제적 삶에 대해 잘 모르지만, 저자가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면 기득권 계급에 의해 배척된 일명 노숙자나 부랑자들은 당장의 끼니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섬의 폐허가 된 성에 주거하던 일단의 무리들은 빌런 야누슈의 소탕 작전으로 쫓겨나고, 지역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변신하기에 이른다. 소외와 배척이 어떤 사회적 문제들을 야기하는지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주인공 바샤는 무리들의 리더 격인 귀족 틔부르치 드랍의 아이들은 발렉 그리고 마루샤와 어울리게 된다. 기묘하게 구성된 사회적 계급제도 때문에 어른들 간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새로운 세대인 아이들 간의 교류를 통한 신분제 타파의 메시지까지 간다면 내가 너무 나간 걸까? 바샤는 자신에게 씌워진 부랑아, 나쁜 패거리의 일원이라는 오명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소한 방종과 자잘한 악덕 그리고 부패를 지닌 틔부르치 집단과의 교류를 마다하지 않는다. 동생 소냐의 인형 소동에 이은, 소녀 마루샤의 죽음으로 갱스터 활동은 중단된다.

 

다시 한 번 우크라이나의 울창한 타이가를 연상시키는 <숲이 술렁거린다>는 폴레시예 지방의 전설이라는 타이틀로 독자를 숲으로 인도한다. 남부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지방의 지주/귀족이라는 판은 로만에게 옥사나를 아내로 얻어 주려고 부단한 노력을 한다. 어째 설계부터 파국을 향한 무언가가 슬쩍 비치는 느낌이다. 거친 대자연에 사는 이들은 어쩌면 난폭할 수밖에 없도록 창조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명확하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대강의 윤곽선으로 살펴 볼 때 판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단의 사건에서 훗날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 반역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 이제 표제작인 <맹인 악사>를 만날 차례가 되었다. 어쩌면 앞선 세 개의 이야기들은 본 프로를 위한 사전 준비작업이었는지 모르겠다. 지주의 아들 표트르 포펠스키는 날 때부터 저주 받은 아이였다. 이유는 그가 맹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시각적 심상을 느껴 보지 못한 맹인은 꿈을 꿀 수 없다는 사실도 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됐다.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 본다. ‘맹인 악사. 그렇다면 좀 클리셰이 같긴 하지만, 우리의 표트르가 맹인 답게 타고난 청력을 바탕으로 악사가 된다는 말일 게다.

 

코롤렌코 작가는 표트르가 아이에서부터 청년으로 성장하는 과정에 막심 야첸코라는 한 때 열렬한 갈리발디주의자로 이탈리아 혁명운동에 참여했다가 불구가 된 소년의 외삼촌을 전진 배치한다. 항상 목발을 짚고 다니는 한 시절 혁명가는 소년의 성장기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소년 표트르에게 진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마무 출신 이오힘이었다. 우크라이나 스타일의 나무 피리 연주의 대가였던 이오힘은 어린 표트르에게 음악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다. 이에 소년의 어머니 안나는 마치 배틀이라도 하듯, 물 건너 오스트리아에서 피아노를 공수해온다. 그리고 젊어서 배운 현란한 피아노 기술을 동원해서 이오힘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초반 승부는 소년이 더불어 자라는 우크라이나의 대자연의 모습을 담은 이오힘에게 기울었으나, 장애를 가진 자녀의 어머니였던 안나 역시 만만치 않은 맞수였다.

 

작가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며, 자신의 존재 의미에 회의하는 표트르의 내면 묘사에 할애한다. 보통의 청소년들도 성장 과정에서 숱한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하게 되는데, 가뜩이나 예민한 성격의 보유자인 표트르 포펠스키는 오죽했을까. 그나마 그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지주 출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스승을 자처하는 외삼촌 막심의 후원이었다. 이웃 소녀인 에벨리나가 합류하면서 표트르가 느끼는 지평의 세계는 확장에 들어간다.

 

어느새 청년이 표트르의 고민은 실존적이다. 나는 왜 존재하는 것일까? 자신의 시력 장애가 저주 받은 것이며, 악의적일 지도 모른다는 유추에 도달하기도 한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접하는 세계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주변사람들이 표트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해 봐야, 자신의 각성 이전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말잔치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물질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교활한 수도원 종지기 예고르가 반면교사가 아닐까 싶다.

 

보이지 않는 저주를 받은 자신보다 거리에서 구걸하는 걸인들이 더 행복하다는 그의 생각은 결국 상대적인 게 아니었을까? 가난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추체험하지 못한 청년 표트르는 결국 외삼촌 막심과 짜고 키에프로 피아노 유학 간다는 핑계로 대고, 걸인 패거리에 합류해서 거리의 삶에 도전한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표트르의 엄마 안나는 길길이 날뛰지만, 마침내 길고 회의적이었던 어둠의 터널을 지나 빛의 세계에 진입할 준비를 마친 표트르의 모습에 안도하기도 한다.

 

결국 인도주의 작가답게 코롤렌코는 <맹인 악사>의 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마무리짓는다. 에벨리나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순간 그는 빛을 본 것이다. 그것은 사나이에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로 구원의 메시지 전파에 나선다.

 

후반으로 갈수록 동어 반복과 주인공 표트르 포펠스키 내면세계의 쟁투가 좀 짜증이 나기는 했지만, 19세기 역동적인 역사의 움직임이 꿈틀대던 러시아-우크라이나로 떠난 여행은 만족스러웠다. 계획대로 이번 명절 연휴 동안에 책도 다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었다. 그것으로 됐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1-02-14 22: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연휴에 읽으려고 샀지만...! 못 읽었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02-15 09:05   좋아요 3 | URL
염통을 쫄깃하게 만들 정도의
수작은 아니지만, 잔잔바리로
삶과 존재 이유에 대해 자꾸만
생각해 보게 해주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고.고.씽.

scott 2021-03-05 15: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의 당선 ! 추카!추카!
맹인 악사 주섬 주섬 장바구니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