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정신 - 체념과 물러섬의 대가 몽테뉴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유유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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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미셸 드 몽테뉴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지 그의 이름만 알고 있었다. <에세>라는 이름의 자유로운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 주었다는 점 정도만. 그러다 이달에 홋타 요시에 선생의 저작들을 만나게 됐고 그의 저술을 통해 몽테뉴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다만 홋타 요시에 선생의 3권 짜리 몽테뉴 평전은 절판되어 구할 수가 없었다.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몽테뉴 평전을 사서 읽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에는 가톨릭과 위그노가 격렬하게 종교전쟁을 치른 당대 프랑스의 이모저모에 대한 디테일이 담겨 있다고 하는데, 츠바이크의 몽테뉴 전기는 오롯하게 몽테뉴라는 문제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스코뉴 보르도 출신의 몽테뉴는 1533228일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청어를 파는 생선 장수였다. 아버지는 프랑스 군주를 따라 군인으로 전쟁에 참여하면서 비로소 귀족 행세를 하게 됐다. 어머니 가계는 에스파냐의 개종한 유대인 출신의 위그노였다고 한다. 법관과 보르도 시장을 역임한 피에르 에켐은 아들 미셸에게 특별한 교육을 시켰다. 그것은 당대 상류 계층으로 나갈 수 있는 마법의 도구였던 라틴어 교육이었다. 아직 모국어인 프랑스어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 아들을 위해 독일에서 프랑스어는 한 마디로 하지 못하는 라틴어 교사들을 초빙해 왔다고 했던가. 샤토 몽테뉴가 왠지 스카이 캐슬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버지 피에르 에켐이 제공한 금수저 덕분에 몽테뉴는 미래의 뛰어난 지성인이자 문필가로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뒤에는 법학 공부를 마치고 법관으로 봉직하기도 했다. 샤를 9세의 시종으로 루앙 포위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일평생 가톨릭 신자의 삶을 살았던 몽테뉴가 살았던 16세기는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촉발된 종교전쟁과 내란의 시기였다. 같은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종교적 갈등과 폭력은 프랑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관용의 정신을 어디에서고 찾아볼 수 없었으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예 시도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저자 츠바이크가 가장 싫어한 집단 광증과 선동이 난무하던 그런 시기였다. 츠바이크는 1940년대 자기 삶의 말년에도 몽테뉴의 시절과 비슷한 체험을 했는데, 그로부터 또 8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터무니없는 음모론과 가짜 뉴스, 전염병(몽테뉴 시절에는 페스트였다) 그리고 집단 광증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역사는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만 재현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위대한 지성인이자 철학자는 집단 광기의 시대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에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주려 해도 그들은 거부했다. 몽테뉴는 강호가 어지러워질수록,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했다. 광신도들과 극단적 종교 이데올로기 투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하나의 자구책이 아니었을까. 몽테뉴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영어로 된 짧은 너튜브 철학 동영상(그렇다 이제 너튜브는 진리까지 독점해 버렸다)을 찾아보니, 르네상스의 후예인 그가 당시 유행하던 고대 철학자들의 책들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자아 탐구에 천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십대 후반에 공직에서 은퇴하고 샤토 몽테뉴로 돌아온 철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은거에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 속인들처럼 철인 몽테뉴 역시 먹고사니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아마 우리로 치면 선비 같은 인물이라고나 할까. 자신이 직접 노동은 하지 않더라도, 가족과 자그마치 6명이나 되는 딸들(그중에서 성인으로 성장한 자식은 한 명 뿐이었다)을 먹이고, 자신의 영지를 관리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좋아하는 책을 사기 위해서라도 금전은 반드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책이 상당히 고가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가 소장한 천권의 책들이 얼마나 대단한 재산이었을까.

 

대법관으로 승진을 포기하고 자신의 거성에서 <수상록>을 집필하던 시절이야말로 몽테뉴 인생의 최절정기가 아니었을까. 그는 전문적인 문인이나 역사가가 아니었기에, 일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극단과 전란의 시기에 어느 편에 서지 않고 중도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의 지키며 시간을 보내기에 책읽기와 집필만한 것이 또 있었을까.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아무런 구속이나 속박 없이 쓰고, 자신을 묘사했다. 츠바이크는 젊어서 만난 몽테뉴의 생각들이 얼마나 대단한 사유의 향연이었는지 나중에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그의 <수상록>이나 여행기를 만나 보지 못했기에 그저 대가의 가르침을 얼치기처럼 따를 수밖에 없다.

 

책읽기의 대선배 몽테뉴는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었다. 허무주의에까지 도달하진 않았겠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공부해 가면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What do I know? 진정한 의미에서 순도 백퍼센트의 자유주의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타인의 자유를 제한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 말은 자신도 타인들로부터 어떠한 자유의 제한도 원하지 않는다는 선언이 아닐까.

 

아울러 그는 에피쿠로스의 영향 아래, 자신이 좋은 것을 하라고 충고한다. 그게 사냥이 공부든 부동산 투자든 뭐든 간에 말이다. 책이 좋은 사람을 책을 읽으란다. 우리 독서인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격려가 존재할 수 있는지 나는 묻고 싶다. 다만, 즐거움의 경계까지는 가되, 그 경계는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뒤에 기다리는 것은 고통이니까. 이 위대한 예언자는 미래의 책읽기 동지들이 어떤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인지 이미 알고 있었나. 이 지점이야말로 내가 이 책에서 최고로 꼽는 부분이다. 무슈 몽테뉴가 내게 하는 위로의 정수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니 츠바이크 선생과의 합작품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샤토 몽테뉴에서 십년간의 은둔 생활을 마친 무슈 몽테뉴는 여행길에 나선다. 2년 동안, 프랑스-스위스-독일-오스트리아 그리고 이탈리아를 위대한 정신은 여행했다. 아무런 목적도 없는 자기 자신을 찾는 여행이었다. 아니 어쩌면 젊었던 시절의 나와 똑같은 여행 스타일인지 깜짝 놀랄 정도다.

 

하지만 세상은 이 위대한 철인이 자유를 만끽하는 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향 사람들은 그에게 아버지 피에르 에켐처럼 시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국왕까지 나서서 명령을 하는 바람에 영원한 자유인이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6세기 후반, 종교전쟁의 피바람 속에서 프랑스 왕국은 다시 한 번 큰 위기에 휩싸인다.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후계자로 부르봉 가문의 나바르 공 앙리가 추대되었던 것이다. 살리카 법에 따라 부르봉 가의 앙리가 프랑스 왕국의 대권을 얻게 된 것이다. 유혈사태 없이 왕위계승이라는 권력의 트랜지션을 위해 나바르 공 앙리의 개종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이상적 중재자로 무슈 몽테뉴가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홋타 요시에의 다른 저작 <라 로슈푸코>의 주인공 프랑수아 라 로슈푸코 6세가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을 정도로 무슈 몽테뉴는 정치와 행정 그리고 문학까지 아우르는 다방면에서 빼어난 능력을 보여준 마지막 르네상스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보르도를 덮친 페스트를 피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쫄보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라 로슈푸코가 인간에 대한 본질이라고 주장한) 자기애 덩어리로서 무슈 몽테뉴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해 본다. Nobody's perfect. 훗날 나바르 공 앙리가 왕이 되었을 때, 명실상부한 왕의 고문관으로 엄청난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지만 안분지족을 아는 미덕의 소유자였던 무슈 몽테뉴는 깨끗하게 공직 생활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조용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홋타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대신해서 만난 츠바이크의 <위로하는 정신>은 기대이상의 수확이었다. 위대한 정신과의 만남의 감동과 과정을 부족한 리뷰에 다 담을 수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구하지 못해 읽지 못하는 책에 대한 갈급함은 어찌 달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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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1-01-30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시에 선생의 몽테뉴 평전을 구하시면 꼭! 리뷰 부탁드립니다^^ 책세상에서 나온 ‘식인종에 대하여‘도 읽고 아주 좋았어요. 역자가 주석도 세심하게 달아주시고요.

레삭매냐 2021-01-30 21:25   좋아요 0 | URL
20년도 전에 나온 책이라,
구할 수가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한길사에서 다시 내주면 좋겠으나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coolcat329 2021-01-30 2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1월 츠바이크를 몰아서 읽고 있는 중입니다. 이 책도 구해야겠네요.독서인생이 너무 짧아 딱히 열광하는 작가가 없는데 츠바이크는 앙뜨와네뜨 전기소설 읽고 단번에 팬이 됐습니다. 레삭님의 리뷰가 제 가슴을 설레이게 하네요☺

레삭매냐 2021-02-01 11:52   좋아요 1 | URL
저도 슈테판 츠바이크의 열렬 팬입니다.
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 아닐 수 없습
니다. 더 오래 사셔도 인류에게 더 많은
책들을 남겨 주셨어야 했는데 그저 아쉬
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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