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감독이다
에비사와 야스히사 지음, 오경화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도서관에는 보통 특정한 책을 빌리러 간다. 그런데 가끔 예상하지 못했던 책을 만나게 된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이틀 사이에 죽어라 읽은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의 <나는 감독이다>가 그런 책이었다. 소설의 원제는 감독(일본말로는 간토쿠라고 하더라)’. 제목부터 간결하다. 그리고 책은 드럽게 재밌었다. 내가 아마 야구를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나에게 스포츠는 오로지 야구뿐이다. 나는 축구도 농구도 보지 않는다. 오로지 나에게는 야구뿐이다.

 

그런 야구도 이번 시즌에는 코로나 때문에 시들해져 버렸다. 아니 예전에 가지고 있던 열정은 내가 열렬하게 응원하던 보스턴 레드삭스가 십 수 년 전에 그 놈의 지긋지긋한 소위 밤비노의 저주를 깨면서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에 춘수 씨의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만년 꼴찌팀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열심히도 응원하던 춘수 씨의 기억이 났다. 그랬지. 그런데 <나는 감독이다>는 바로 그 야쿠르트 스왈로즈를 실제 모델로 한 소설이라고 한다. 지지리도 야구를 못하는 팀, 엔젤스의 신임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은 바로 교진(요미우리 자이언츠) 유격수 출신의 히로오카 타츠로다. 전임 감독은 라인업을 짜기 위해 점쟁이를 찾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뭘 해도 안 되는 팀인 것이다. 구단주인 올림픽건설의 사장 오사카 사부로 씨는 아무리 팀이 꼴찌를 해도 인화를 중시하는 호걸이었다. 매년 팀에 투입되는 2억 엔이라는 거금은 어차피 세금으로 나갈 돈이라며 퉁친다고 했던가.

 

팀의 독소로는 수비 코치이자 왕년의 엔젤스 스타 타카야나기가 있는데, 다음 감독 자리는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굴러온 돌인 히로오카가 감독에 선임되자 에이스 오타키를 비롯한 선수들을 선동해서 쿠데타에 나선다. 시즌 도중에 감독 자리를 물려받은 내부의 격렬한 반발에 직면한다. 철저한 관리야구를 신봉하는 히로오카에 대항해서, 기존의 느슨한 팀플레이를 선호하는 선수들은 자기들 멋대로 야구를 계속하겠다는 거다. 팀의 기강은 바닥에 떨어지고, 아예 술에 취한 채 투수들이 마운드에 올랐다고 했던가.

 

이건 뭐 프로야구 선수의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 오합지졸 팀이 따로 없다. 이렇게 각자도생하는 팀이 어떻게 천하의 교진을 상대로 센트럴리그 우승에 도전할 수 있단 말인가. 타카야나기 일당의 쿠데타가 보기 좋게 실패하고, 도박에 나선 히로오카는 대망의 대권을 접수한다. 그리고 바로 팀의 체질 개선에 나선다. 안 되는 팀일수록 문제가 많은 법이다. 중견수 타카하라를 팀의 리더로 세우고, 포수 이치카와를 더해서 팀에 새로운 면모를 갖출 채비를 마친다.

 

야구를 잘 모르는 이들은 시즌만 관심 있게 보지만, 고수들은 오히려 핫스토브라 불리는 오프시즌과 스프링 트레이닝에 주목한다. 교진 같은 강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당대 최고의 선수이자 감독으로 추앙받은 나가시마 시게오 같은 명감독을 필두로 해서, 오 사다하루(왕정치), 하리모토 이사오(장훈) 그리고 니우라 히사오(김일융) 같은 훌륭한 자원들을 아낌없이 투입할 수 있는 프런트 오피스의 든든한 후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 마디로 말해 교진 시절 동료였던 나가시마 감독이 하지 않아도 될 그런 걱정을 히로오카는 해야 한다는것이었다. 현역 시절 3루수였던 나가시마는 유격수에게 날아가는 공조차 자신이 잡는 허슬 플레이로 히로오카를 맥 빠지게 만들곤 했다지 않은가. 현역 시절이나 감독 시절 모두, 나가시마는 히로오카의 장애물인 셈이다. 게다가 그는 교진 현역 시절, 야신이라 불리던 카와카미 테츠하루 감독과의 불화로 불명예스럽게 퇴진했으니 타도 교진은 비슷한 처지에서 코치로 영입한 절친 와타라이 요이치도 공유하는 공통의 모토가 되었다.

 

구단주 오사카 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히로오카는 빼어난 성적을 올렸지만 자신의 관리야구와는 거리가 먼 외국인 용병 1루수 허드슨을 트레이드시켜 버린다. 그의 면모에서 당장 나는 SK 와이번스 왕조를 건설했던 야신 김성근 감독이 떠올랐다. 하긴 그도 일본 출신 야구인이었지. 메이저리그에서는 절대 번트를 대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데, 일본 야구에서는 짜내는 야구가 기본이지 않았던가. 그러니 메이저리그 야구 맛을 본 팬들에게 일본 야구나 일본 야구를 계승한 한국 김성근 감독 스타일의 야구가 재밌을 리가 있나 그래.

 

어떻게 보면 필드에 나가서 뛰는 선수들은 모두 히로오카 감독이 조종하는 로봇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결론은 하나다, 이기는 야구를 하라는 명령이다. 야구의 기본은 간단하다. 27개의 아웃 카운트를 잡고 상대보다 점수를 더 내라는 것. 그런데 히로오카 감독은 공격보다 수비를 더 중시한다. 교진 야구가 그러하듯이. 공격으로 점수 내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잘 단련된 수비로 이기는 야구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히로오카 감독의 지론이었다. 하긴 10개의 공 중에서 3개의 공을 안타로 만들어도 강타자로 인정받는 것이 야구의 세계가 아니었던가. 농구 선수의 야투율이 30%라고 한다면, 당장 방출될 게 분명하다. 그만큼 타격의 기술은 쉽지 않다는 말이 아닐까.

 

히로오카 감독은 엉망진창인 엔젤스의 규율부터 세우는 일에 매진한다. 그리고 선수들에게 이기는 야구의 재미를 알게 만든다. 패배주의에 물든 선수들이 이기는 맛을 알게 되자, 개막전에서 교진을 상대로 연승을 내달리면서 그야말로 꿈같은 봄을 보낸다. 하지만, 130경기나 치르는 야구는 단기전이 아니다. 단기전은 포스트시즌이란 이름으로 각 리그의 승리자들에게 주어지는 보너스 경기다. 장장 6개월이나 되는 장기전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일들이 다 벌어진다. 그것은 마치 우리네 삶과도 비슷하다.

 

또 야구 승부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지는가. 다 이긴 경기도 어이없는 실책으로 경기가 뒤집히기도 하고,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경기도 선수들이 투지를 다잡아 엄청난 역전에 성공하기도 한다. 우리 야구팬들이 야구를 끊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게 아닌가. 경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명언도 다 있지 않은가.

 

주전 유격수 카노를 2루수로 이동하고, 2군에서 강철 어깨를 가진 우고를 끌어 올려 내야에서 가장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할 수 유격수에 히로오카 감독은 배치한다. 연봉협상에서 치욕을 당한 오타키는 새로 영입된 메이저리그 출신 찰리 헤밍웨이와 더불어 원투펀치로 마운드를 책임지게 된다. 물론 타카야나기라는 놈은 코치 자리를 유지하면서 호시탐탐 쿠데타를 도모한다. 아무 것도 입증되지 않은 신생 팀 같은 상황에서 히로오카 호는 우승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시즌이 긴 만큼, 슬럼프며 주전 선수의 부상 같은 일들은 다반사다. 주전 중견수 타카하라가 수비 도중에 중상을 당하면서 엔젤스 호는 침몰하기 시작한다.

 

이런 극도의 슬럼프 시기에는 감독도, 구단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슬럼프가 지나가길 바랄 뿐. 우리가 코로나 시절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속수무책처럼 이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저절로 사라지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백신이나 치료제 개발에 손 놓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만.

 

결국 엔젤스는 그야말로 드라마처럼 반등을 일구어내는데 성공했다. 경기는 어디까지나 선수들이 하는 것이다. 그러니 예의 슬럼프도 선수들이 알아서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타카하라가 복구하고, 선수들이 경기에 대한 감각을 스스로 깨우쳐 나가면서 엔젤스는 다시 한 번 우승 레이스를 달린다. 하지만 정규 시즌 레이스는 길고 험난했다. 막판에 팀의 에이스 오타키와 타카야나기의 승부 조작 혐의가 부상하면서 다시 한 번 팀은 위기에 처한다. , 엔젤스와 히로오카는 이 마지막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야알못 분들에게 <나는 감독이다>는 엄청 지루하고 재미없는 그런 소설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이 야구에 미친 사람들에게 <나는 감독이다>는 그야말로 독서 슬럼프를 탈출하기 위한 한줄기 빛자락 같은 존재였다. 어찌나 재밌던지, 여차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읽을 판이었다. 게다가 한 때 일본 야구를 주름 잡았던 왕년의 대스타들인 왕정치와 장훈 그리고 김일융 아저씨들이 나오니 이 어찌 반갑지 않을쏘냐 말이다.

 

게다가 에비사와 야스히사 작가는 야구 경기가 진행되는 현장 중계를 하는 듯한, 생생한 라이브 중계로 독자의 혼을 쏙 빼놓는다. 아니 이거 라디오 중계를 글로 풀어놓은 것 아냐 싶을 정도다. 나도 오래 전에 야구 중계를 들으며, 실제로 그 짓을 해보아서 잘 아는 바다.

 

간만에 야구 소설을 읽어서 그런지 기분이 째지는구나. 그럼 다음번엔 <유니버설 야구협회>에 다시 도전해야 하나 어쩌나.


[뱀다리] 그리고 보니 오케스트라 마에스트로와 야구 감독은 누구나 꿈꾸는 그런 직업이라 했던가. 마에스트로는 몰라도, 야구 감독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성적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라, 팀 전체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받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 같았다. 그런 스트레스를 감당하면서도 타카나야기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야구 감독이 되고자 하는 걸 보면 그만한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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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03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인물은 꼭 허구연씨 닮은듯 하네요!ㅎ 엘지 때문에 거의 20년 가까이 가슴앓이하는 1인입니다!ㅠ

레삭매냐 2020-12-03 16:35   좋아요 1 | URL
아~ 그리고 보니 한국에는 엘지
가 있었네요.

90년대 신바람 트리오가 활동
하던 시절의 엘지가 생각나네요.

stella.K 2020-12-03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자도 원작을 밤새워 읽었다던데 정말 재밌나 봅니다.
저는 야구에 대해선 1도 모르는데 올초던가? 스토브리근가 하는
야구 드라마 재밌게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책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설명에 의하면 처세와 자기계발에도 도움이 된다던네요? ㅋ

근데 표지가 만화로 오해하겠어요.

레삭매냐 2020-12-03 16:40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야구에 대해
잘 모르신다면... 홀딱 반해 버리실
것 같지는 않습니다.

번트 앤 런, 히트 앤 런 같은 야구
작전 용어들하며 6-4-3 병살타 같은
표현들이 어쩌면 진입장벽이 될 수도...

전 아주 재미지게 읽었답니다 :>

처세/자기계발은 쌩구라입니다 무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그런
스타일의 광고를 본 것 같은데, 일본
책들을 일반화시키는 광고문안 같네요.

coolcat329 2020-12-04 07: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중학생이 읽어도 될까요? 야구 지식은 어른 수준입니다.

레삭매냐 2020-12-04 09:08   좋아요 1 | URL
야구 지식만 볼 때는 갠춘해 보입니다.

다만 왕정치-나가시마, 장훈 그리고
김일융 아저씨에 대해 좀 더 알고
있다면 더더욱 좋은 독서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나무위키 검색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coolcat329 2020-12-04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감사합니다^^

scott 2020-12-04 2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존 그리샴도 야구 감독이 꿈이였었데요.
지금은 글로 돈 왕창 벌어서 고향 야구팀 사버렸으 ㅎㅎ 구단주 됨 ^.^

레삭매냐 2020-12-05 08:15   좋아요 1 | URL
아 그렇군요 :>

그야말로 드림 컴 트루네요.
책 써서 돈을 벌어 구단주가
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