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10월에는 두 명의 작가와 만났다.

 

한 명은 현재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독일 출신의 작가 율리 체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지난 2005년에 작고하신 캐나디언-아메리칸 작가 솔 벨로다.

 

일단 율리 체는 지금까지 12권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 중에서 국내에 소개된 네 권의 소설들을 10월에 부지런히 읽었다. 법학 박사님 출신으로 현직 법조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소설가로도 자신의 본업 못지않은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좀 놀랐다.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는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연상되기도 했다.

 

자신의 작품에 평행우주 이론을 등장시켜 소설읽기를 사랑하는 나 같은 문과 출신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하고, 카나리아 군도의 란사로테로 독자를 유혹해서 독박육아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지닌 유년시절의 트라우마에 대한 단상을 엿보여 주기도 한다. 건강이 최고가 된 미래사회에서 병날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통제사회와 싸우는 SF적인 스토리를 제시해 보이기도 한다.

 

내가 꼽은 율리 체 최고의 작품은 역시 란사로테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치정극이자 전문적인 잠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돋보이는 <잠수 한계 시간>이다. 사람들이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에 나서는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해준 수작이다. 인간이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공기가 없는 우주에 대한 도전은 극히 어려운 반면, 상대적으로 수월한 물속으로 잠수복을 입고 웨이트 벨트를 차고 경이로운 세계로 침잠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아주 조금은 숭고해 보이기도 하더라. 내가 도전에 나섰다가 실패한 잠수에 대한 주제여서 더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새로운 책이 출간되고, 또 예전 책들은 계속해서 절판/품절되는 와중에 책사냥에 나서느라 약간(?)의 고생을 한 건 안비밀이다. 하긴 쉽게 얻은 건 그만큼 이야깃거리가 없기 마련이긴 하지만. 나머지 작품들도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음 타자는 솔 벨로. 순전히 제임스 설터의 위험한 책 <소설을 쓰고 싶다면> 때문에 읽게 되었다. 물론 우리 독서 모임인 달궁모임에서 솔 벨로가 기가 막히게 좋다는 이야기는 익히 들은 바 있다. 하지만 선뜻 손에 가지 않았다. 국내에 소개된 대표작 <오기 마치의 모험>(전미도서상), <허조그> 그리고 <비의 왕 헨더슨> 역시 품절/절판의 수순이다.

 

게다가 나의 컬렉션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가장 먼저 <비의 왕 헨더슨>을 읽기 시작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유진 H. 헨더슨은 아프리카의 돈키호테라고 부를 만하다. 보통 유대계 미국인을 주인공으로 등장하시는 솔 벨로는 헨더슨을 비유대인으로 설정했다. 헨더슨은 2차 세계대전 최고의 격전지로 알려진 이탈리아 몬테카지노 전투에서 생존한 전쟁영웅이다. 자신을 코네티컷의 돼지치기라고 부르는 이 남자는 중년의 나이에 무언가 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이끌려 친구 찰리 앨버트의 아프리카 신혼여행에 동반한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는 자신도 모른다.

 

그렇게 아프리카 여행 중에 만난 무패를 자랑하는 아르느위 부족의 이텔로 왕자와의 씨름 대결에서 특공대 출신의 기량으로 왕자를 두 번이나 메다꽂는 중년남자의 힘을 과시한다. 어느 인스타에서는 헨더슨 씨를 난봉꾼이라고 부르던데, 조금 공감했다. 딱 여기까지 읽고서 이번에는 <허조그> 1권이 도착해서 <허조그>에도 달려 들었다. 동시에 다른 책을 읽는 나의 엉뚱한 패기란.


아프리카를 이상향으로 삼은 돼지치기 헨더슨 씨가 우연히 만난 이텔로 왕자는 예상과 달리 영어를 사용했다. 일찍이 소아시아 미션 스쿨에 유학해서 영어를 배웠다는 왕자의 등장에 깜짝 놀랄 수밖에. 하긴 이미 탐험이 되지 않은 곳이 없었던 1950년대 말이 아니었던가. 서구인의 시선으로 재단된 제국주의적 시선이 이식된 듯한 느낌에 어리석은 독자는 화들짝 놀라 버린다.

 

아르느위 부족의 눈물 사절단에 헨더슨 씨는 식겁한다. 왜 이러는 거지? 알고 보니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재산이자 먹거리를 제공하는 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가뭄에 들어 그런가 싶었더니 그게 아니었다. 소들에게 먹일 물의 식수원이 개구리와 올챙이들에게 오염된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에게 선행을 베풀고 싶었던 거구의 헨더슨 씨가 나설 차례다. 과연 그의 등장이 재앙인지 축복인지는 나중에 밝혀질 테고.

 

미국 사회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방당한 헨더슨 씨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열망을 좇아 미지의 세계인 아프리카로 도피한다. 아니 좀 더 고상한 표현으로 하자면 순례길이라고 할까. 광기에 사로 잡혀 기사도를 실천하기 위해 세상에 나선 라만차의 돈키호테처럼 헨더슨 씨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아프리카의 돈키호테라... 긴 창 대신 매그넘으로 무장하고, 비루먹은 로시난테 대신 찰리 앨버트에게 뜯어낸 최신형 지프를 타고 그의 산초 판자인 로밀라유와 함께 모험에 나선다.

 

결국 돈키호테의 경우처럼 헨더슨 역시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만나는 긴 여정에 오른 것이다. 미지의 세계에서 자신이 그동안 옳다고 믿었던 것들이 시행착오로 귀결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삶에서 트라우마로 작동하는 것들을 폭바로 날려 버리면서 그는 자신 내부의 결핍을 해소한다. 결국 우리 인간의 삶이라는 것은 죽는 날까지 이어지는 성장이라는 것일까. 솔 벨로가 현대판 우화로 포장한 <비의 왕 헨더슨>은 그만큼 매력적인 작품이다.

   


<허조그><비의 왕 헨더슨>만큼이나 좀 더 자극적이고 재밌는 느낌이다. 물론 허조그는 주인공 모지스 허조그의 이름이다. 이 양반도 중년으로 대학교수 출신 유대인이다. 소설의 소개를 보니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나. 허조그는 오쟁이진 남편으로 두 번째 이혼을 앞두고 있다. 아니 그 순간에 이미 이혼했던가. 그 사실에 괴로워 하는 인간의 모습에서 동정을 느끼려는 순간, 이 인간 역시 이혼한 제자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 이게 뭐야! 그리고 허조그의 현실도피적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책도 일단은 여기까지.


단순히 오쟁이 진 불쌍한 주인공의 고독한 일기라고 생각하고 읽기 시작한 <허조그>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아내 매들린에게 철저하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주인공이 사방에 편지를 쓰고, 지식인으로서 본색을 드러내는 장면에서 그야말로 폭발한다. 한 시절, 세상의 모든 생산은 물론이고 지적 생산력까지 독점했던 미국이 가진 소프트파워가 느껴졌다. 세계대전과 대학살의 시대를 지나 인류의 지속적인 진보가 가능한가 그리고 지금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기술의 발전을 우리 인류가 수용가능한 수준인가에 대한 논의는 대단했다.

 

어느 순간, 철저한 개인사에서 공리적인 차원의 논제로 넘어가는 바탕에는 주인공 모지스 엘카너 허조그가 대학교수라는 점이 자리한다. 어느 작가라도, 이런 거대한 어젠다 세팅을 그야말로 돈에 미친 크로아티아 제철 노동자에게 맡기진 않았으리라. 당대 세계를 주도하던 미국의 학자야말로 이런 설정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아니었을까.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입맛이 씁쓸해진다.

 

어쨌든 이런 저런 이유들로 해서 솔 벨로는 나에게 10월의 놀라운 재발견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그의 책들을 몇 권 가지고 있다는 점이 주효했고, 바로 읽기 시작하니 만사 제쳐두고 이 책들부터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중이다. 그리고 지적 유희는 물론이고, 읽기에 재밌고 도대체 이 놈의 인간들이 어떻게 이야기를 마무리할 지도 무척이나 궁금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렇기 때문에 책에 매달리는 게 아닌가.

 

솔 벨로의 책들은 펭클과 민음사에서 나온 책들(그나마도 다 절판됐다)이 몇 권 되지 않는다. 퓰리처상에 전미도서상 3회 수상 그리고 무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임에도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다니... 고저 아쉬울 따름이다.



<비의 왕 헨더슨><허조그>를 차례로 읽고 난 뒤에는 대작 <오기 마치의 모험>에 도전할 차례다. 아직 <허조그> 두 번째 권과 <오기 마치> 마지막 권을 구하지 못한 것은 안비밀이다.


이번 솔 벨로 도전에 나서면서 한 가지 느낀 점. 일단 사둔 책은 언제고 읽게 된다는 간단한 진리. 그러니 언젠가 만나게 될 책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무슨 책을 사들일까 궁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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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0-29 1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기 마치의 모험>으로 솔 벨로우를 시작했다가, 아주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오기 마치....>가, 이거 참, 원래 그런지 아니면 (이렇게 말하면 진짜 실례지만) 반역적 번역을 했는지, 그거 읽고 벨로우는 미국 내 유대인 프리미엄을 가장 많이 받은 작가라고 단언하고 오랜 시간동안 읽지 않았다가 오늘 쓰신 <허조그>를 읽은 다음에 좋아하기 시작했습지요.
<...핸더슨>부터 읽으신 것이 어쩌면 최고의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레삭매냐 2020-10-29 13:19   좋아요 0 | URL
예전에 어디선가 솔 벨로가 미국
문학계의 짱이다라는 평을 듣고
부지런히 책을 모았습니다.

물론 읽지는 않구요... 글다가 설터
선생의 자극을 받아 읽기 시작했는데...

<비의 왕 헨더슨>이 신의 한수였나
봅니다. <오기 마치>는 세 권이라 ㅋㅋ
그리하야 오기 마치는 맨 끝에 읽는
것으로. <허조그>도 참 좋네요.

겨울호랑이 2020-10-29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어떤 분야나 융/복합이 대세인 듯 합니다. 덕분에 어느 분야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네요. 이를 다양한 분야를 알 수 있어 좋은 변화라 해야 할지,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느껴야 하니 안 좋은 변화라 해야할 지 잘 모르겠습니다...

레삭매냐 2020-10-29 13:22   좋아요 1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바야흐로 융복합의 시대라고
과언이 아닐 듯 합니다.

설터 샘의 인도를 따라 그냥
어중이 독자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독서를 하는 것으로 ㅋㅋ

그런데 방대한 독서를 하시는 다른
분들의 글을 보면 자극을 느끼곤
하지요. 다만 제 능력으로는 역부족
인지라 현실에 만족하려구요.

han22598 2020-10-31 1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님 덕에 알게 된 율리체..... 새해, 잠수 한계시간 두권 샀어요 ^^ 잠수한계시간이 괜찮다고 하시니 그것부터 시작해봐야겠네요. ^^

레삭매냐 2020-10-31 21:55   좋아요 0 | URL
<잠수 한계 시간> 정말 재밌습니다.

율리 체 박사님의 책이 다 그렇지만
<잠수 한계 시간>은 특히나...

페크(pek0501) 2020-11-11 13: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당선작으로 뽑히신 것 우선 축하드리고요...
솔 벨로의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급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