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스트리트가 말할 수 있다면
제임스 볼드윈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건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흑인 청년이 순진한 푸에르토리코 여자를 성폭행했다. 소설의 화자는 18세 소녀 티시(클레멘타인). 티시의 미래 남편감인 포니(알론조 헌트)는 위의 죄목으로 툼스(맨해튼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 이야기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벌어진 일들을 역추적하고, 티시와 그녀의 가족들이 상황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 그리고 아직 미혼인 티시는 포니의 아이를 가졌다. 뉴욕의 가난한 가정 출신들인 티시와 포니는 십 수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의 계보를 자랑한다. 포니의 엄마는 독실한 신자로 포니의 두 누나들과는 다른 결을 가진 외아들이 처한 문제의 원흉으로 티시를 지목한다.

 

교도소에 가서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리고 집에 돌아와 가족들에게도 그 사실을 알린 티시. 티시의 부모는 사돈에게도 그 소식을 알려야 한다며 그들을 집으로 초대한다.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사태들은 21세기 어느 나라의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그런 막장을 연출한다. 마음씨 착한 티시와는 다른 언니 어네스틴은 동생에게 막말을 퍼붓는 유사 시집 식구들에게 대거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도 아주 쎈 방식으로.

 

포니는 푸에르토리코에서 엔지니어 남편을 따라 본토로 이주한 빅토리아 로저스를 성폭행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있다. 모든 정황이 그가 무죄라는 점을 가리키고 있지만, 그를 체포한 인종차별주의자 벨 경관과 로저스 여사의 확실하지 않아 보이는 범인 지목으로 포니는 꼼짝 없이 유죄 판결을 받고 교도소 생활을 할 상황이다. 어네스틴의 주선으로 포니의 무죄방면을 위해 선임된 헤이워드 변호사에 대해서도 티시는 못미더워한다. 2020년에도 억울하게 흑인들이 백주대낮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마당에 50년 전에는 오죽했을까.

 

툼스에 갇힌 포니 일병 구하기는 두 가지 축으로 나뉜다. 하나는 포니와 같이 교도소에 갇힌 대니얼이 증언 번복을 하지 않게 하는 것과 푸에르토리코의 로저스 여사 찾기다. 전자도 쉽지 않은 미션이지만, 후자는 더더욱 어렵다. 이런 불가능한 미션 수행에 나선 사람은 바로 티시의 엄마 샤론이다. 역시 어려울 때는 누구보다 가족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의 법칙이라는 걸 1974년작 <빌 스트리트>를 통해 깨닫게 된다.

 

포니와 티시가 아파트를 구하던 와중에 토마토를 사러 간 티시가 어느 백인 건달에게 성추행 당한다. 그리고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주먹질을 한 포니를 폭행죄로 체포하려 한 게 바로 벨 경관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온 주인 아줌마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나지만, 대중 앞에서 유색인종(person of color)에게 개망신당했다고 생각한 벨 경관은 복수를 다짐한다. 결국 포니가 툼스에 갇히게 된 건 바로 그런 악연에서 유래된 것이다.

 

주인공 티시는 이제 자신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새 생명을 세상에 내보내야 하는 고귀한 사명과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포니를 툼스에서 구해내야 하는 이중 임무를 지니게 되었다. 여성이야말로 세상의 구원자일 수밖에 없다는 작가의 생각을 나는 여기서 읽는다. 그리고 남성 작가가 향수 가게에서 일하는 임산부 티시가 초보엄마로 경험하게 되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이렇게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경제적 부담 역시나 주목해야 하는 지점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아이 아빠인 포니는 지금 교도소에 갇혀 있다. 자신도 포니의 면회와 출산 준비를 위해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 추가적으로 포니의 변호 비용 그리고 엄마 샤론의 푸에르토리코행 모두 돈이 들어가는 일들뿐이다. 그래서 헌트 집안의 프랭크와 티시의 아빠 조지프는 추가근무도 그리고 사소한 물건들의 위치이동도 마다하지 않는다. 모두가 포니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감내할 준비가 되어있다. 헌트 부인과 포니의 누나들인 에이드리엔과 실라를 빼놓고 말이다. 신앙심에 도취된 헌트 부인은 포니와 티시의 사랑을 음행이라고 부른다. 더 이상의 막장으로 치닫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흑인 청년은 교도소에 마침내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적응을 시작한다.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슬을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선언도 뼈를 때린다. 반세기가 지나도록 인종주의 문제는 미국 사회가 품은 아킬레스 건으로 그리고 언제 발화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이 작동하고 있다. 인종주의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인식의 극적인 전환이 필요한 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지 나는 회의적이다.

 

내가 읽을 볼드윈 선생의 다음 작품은 <단지 흑인이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일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작년에 나온 <조반니의 방>도 만나보고 싶다.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 그것은 언제나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20-08-10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하군요. 마치 영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엔 당연한 것은 없는 건데, 그것에 길들여지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게 되죠. 인종주의도 그렇죠. 백인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 건데요...

레삭매냐 2020-08-10 11:48   좋아요 1 | URL
2018년에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해서 배리 젠킨스라는 감독이 영화
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기회가 된다면 영화도 만나 보고
싶네요.

오랜 세월 구축되어온 인종주의
를 부수는 건 난망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