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역사가 - 주경철의 역사 산책
주경철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 때 역사학도였다. 그래서 지금도 소설보다도 역사책을 소설보다 더 빨리 읽는다. 소설 다음으로 아마 많이 읽는 게 역사 장르가 아닐까 싶다. 이번에도 예전에 사두었던 주경철 교수의 <일요일의 역사가>를 다니엘 켈만의 소설을 읽자마자 집어 들었다. 그리고 반나절 만에 다 읽었다. 이제 완전 독서 슬럼프 탈출인가.

 

처음에 책을 받았을 때, 그 유명한 프리울리 사람 메노키오에 대한 이야기부터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모두 11개의 역사 에세이가 담겨 있는데 그리고 나선 나머지 10개는 읽지 않았던 거지. 그러다 이번에 나머지도 모두 다 읽었다.

 

중세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방의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는 어떻게 그렇게 독자적인 생각을 발전시켰을까? 열 권 남짓한 책을 읽고서 당대 지식인 계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제들과 이단재판에서 벌인 설전 기록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저자는 메노키오 재판을 엘리트 위주의 문자 문화와 일반 대중의 구술 문화의 충돌로 해석한다.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런 사유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이들의 도움 없이 일개 농부에 지나지 않는 메노키오가 오묘한 기독교 교리에 대해 독자적인 해석을 했다는 점만으로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미시사 <치즈와 구더기>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에 대한 재해석도 흥미롭다. 오래 전에 사둔 단턴이 그린 18세기 인쇄 직공들의 잔혹한 고양이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런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원전을 다시 한 번 읽어야지 싶기도 하다. 인쇄 길드의 장인들 역시 직인을 거쳐 부르주아 계급에 입성하는데 성공했지만, 정부의 규제 때문에 장인들의 수가 오히려 줄어들면서 직인들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인들을 더 이상 배출할 수 없는 시스템이 되어 버렸다.

 

장기간에 걸친 노동과 불공정한 보수에 불만은 품은 도제들은 주인이 기르는 고양이에게 앙심을 품고 기묘한 전략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를 고양이들에게 풀기 시작한다. 한편, 다른 장에서 고양이는 중세 마녀들의 상징으로도 등장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애꿎은 고양이들이 축제의 희생양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총에 맞기도 하고, 자루에 넣어져 화형당하기도 했다나. 현대 동물애호가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겠지만 말이다. 단턴은 가치 전복의 해방구였던 카니발이 서구 사회에서 일부 긍정적인 요소로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나탈리 데이비스는 카니발을 통해 전복의 권력을 맛본 여성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시대변화에 주역으로 활동했다는 점도 예리하게 짚어낸다.

 

개인적으로 천형과 시심에 시달리는 저자의 글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아즈테카 그러니까 지금의 멕시코의 인신 공양 제의에 대한 글이었다. <세계를 재다>에서도 등장했던 자그마치 2만 명이나 되는 이들을 인신공양으로 희생했다는 이야기를 바로 직전에 읽어서인지 정말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구대륙에서 일만 년 이상 동떨어진 채, 독자적인 문화를 개발해온 라틴 아메리카 인디오들의 문화에 대한 현대적 비판은 합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메리카 인디오들에게 에너지의 순환은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었고, 태양이 인간의 피를 원하기 때문에 에너지 순환과 공급을 위해 전쟁(꽃의 전쟁)에서 획득한 포로들을 처리하는 방법으로 인신 공양이 일반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서구사회에 알려진 대로 선한 야만인의 개념과는 정반대의 그것이 아닌가.

 

에스파나 출신 군인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테카를 정복한 후, 신대륙에 파도처럼 밀려든 에스파냐 출신 선교사들에게 그런 이교도적 신앙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그런 이단적인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가톨릭 선교사들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인디오들의 조상 대대로 믿어온 종교적 이미지와 묘하게 겹쳐지는 사실을 간파했다. 보수적 스콜라 철학자들이라면 펄쩍 뛸 일이겠지만, 신앙의 전파를 위해 선교사들은 이교적 색채를 허용하였고 인디오들은 기존의 인신 공양 제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충실한 교도들로 신앙의 트랜스포메이션을 감행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아니 현대에 들어와서는 오히려 그 역전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하지 않던가. 성 과달루페의 성모상도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저자는 전한다.

 

돈 후안이 문학적 상상력의 발산이라고 한다면, 이탈리아 출신 카사노바는 희대의 엽색가로 명성을 날린 계몽시대 자유인이었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이 벌어지기 이전, 앙시앵 레짐 시절 사교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은 바로 말 잘하는 그런 화술가였다. 장신에 직접 옷을 만들어 입을 줄도 아는 카사노바는 요즘 말로 하면 아마 슈퍼핵인싸가 아니었나 싶다. 악당 같은 이미지의 돈 후안과 달리 카사노바는 122명에 달하는 애인에게 두루 사랑을 받았던 모양이다. 여기서 이달에 만난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저술한 <음란한 소네트>에 나오는 기묘한 자세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왜 이렇게 반갑던지. 이런 맛에 책을 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정력제로 유명한 굴을 연인들이 서로 입으로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오래 전 영화 <나이 하프 위크>가 연상되기도 했다. 이미 수백 년 전부터 하던 사랑놀이였구만 그것은.

 

콩고자유국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으로 아프리카 대륙에 군주 자신의 사유 식민지를 만들어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착취를 일삼은 군주로 등장하는 레오폴드 2세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1830년대에 비로소 나라 같은 모양새를 갖추게 된 후발 제국주의 국가 벨기에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다 갈라 먹은 검은 황금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뒤늦게 뛰어든 벨기에의 군주 레오폴드 2세는 교묘한 외교술을 동원해서, 노예 제도에 반대한다며 콩고 강 유역의 땅들을 집어삼킨다. 그리고 자국의 76배에 달하는 거대한 콩고를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식민지에서 얻은 상아, 그리고 무엇보다 산업혁명의 결과 수요가 폭발한 천연고무를 얻기 위해 레오폴드의 지휘 아래 벨기에는 군대까지 동원한 잔혹한 수탈에 나서게 된다. 얼마 안되는 천연고무를 얻기 위해 원주민들의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재규어와 낙상으로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천연고무 채취를 강요했다. 이 악당 군주는 그야말로 양의 탈을 뒤집어 쓴 악당의 전형 같은 인물이었다. 이런 벨기에의 과거를 알고 있다면 그 나라 사람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뭐 이런 식의 드립은 날리지 않겠지. 최근 어느 예능에서도 비슷한 지적을 본 것 같다.

 

흥미진진한 열한 개의 이야기 다발을 <홀로코스트>로 끝내면서, 저자는 어떤 방식으로도 도저히 재현 불가능한 역사적 진실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일요일의 역사스토리를 마무리한다. 역사의 고수가 풀어 주는 역사 해석이 마음에 들었다. 그동안 역사는 소수 엘리트의 전유물이었는데, 새로운 시대를 맞아 주류 담론을 대신할 새로운 해석을 추구하는 일반 대중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저자의 발상에 전적으로 공감을 표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심오한 내공을 먼저 쌓아야겠지만 말이다.

 

[뱀다리] 바타비아 호의 조난 사건을 다룬 소설을 <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의 저자 라헐 판 코에이가 썼다고 한다. 왜 갠춘해 보이는 책들은 하나 같이 절판의 운명인지 모르겠다. 또다시 책사냥꾼을 본능이 꿈틀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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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03-23 17: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완전 보물이죠? 전 여행 다니는 동안 읽었는데 풍경 안 보고 책만 읽는다고 친구한테 엄청 한소리 들었던 기억 나요. 근데 내용은 벌써 가물가물거리네요, 아 보잘 것 없는 기억력 ㅠㅠ

레삭매냐 2020-03-23 18:56   좋아요 0 | URL
기대를 하지 않고 만난 책인데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었네요 그것도
단숨에!

여행 대신 책이라, 대단하십니다 ~~

초록별 2020-03-24 05: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사학도가 말씀해주시니 킵 해두었습니다. 감사드려요.

레삭매냐 2020-03-24 07:27   좋아요 0 | URL
무늬만 역사 학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