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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이레 / 2004년 11월
평점 :
절판

소문이 자자하던 그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책은 아마 오래 전에 수급해서 쟁여 두었던 모양이다. 책의 색깔이 다 바랠 정도였으니 말이다. 나름 봄철 독서 슬럼프인지 이 책, 저 책 시작은 많이 했는데 마무리 지은 책이 별로 없다. 이럴 땐 가독성이 뛰어나고 흥미진진한 그런 책을 읽어야 하는데. 그 때 책상머리에 얌전하게 놓여 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를 발견했다. 슐링크 작가의 다른 책들도 제법 읽었는데 왜 대표작인 <더 리더>는 읽지 않았는지.
여느 때처럼 인스타그램으로 검색해 보니, 영화에 대한 글들이 있더라. 그런데 이 소설/영화가 로맨스 영화였던가? 아마 보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 싶다. 물론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의 내 감상은 좀 달랐지만 말이다.
1958년 15세 소년 미하엘 베르크는 간염에 걸려 당분간 학교를 쉬게 된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한나 슈미츠 부인을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 ‘꼬마’는 자신보다 무려 21살이나 많은 한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플라토닉한 사랑이냐고? 절대 아니다. 아마 그랬다면 <더 리더>는 처음부터 독자의 흥미를 유발시키는데 실패했을 것이다.
철학교수의 아들 미하엘은 거의 매일처럼 반복되는 책 읽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란히 눕기라는 패턴 속에 자신의 엄마 뻘되는 여성 한나와 관계를 시작했다. 이미 성에 눈을 떠버린 꼬마는 고등학생답지 않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한다. 연상의 여인 한나에게 나란 존재는 도대체 누구인가라는.
꼬마 미하엘은 한나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베일에 쌓인 과거를 품고 있다. 지멘스사에서도 일하기도 했고, 전쟁 중에는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어지는 그녀의 설명은 꼬마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변덕스러운 한나의 감정 앞에 꼬마는 수치와 굴욕적인 기분을 느낄 때가 많다. 같이 떠난 밀월여행 기간 동안에는 아침식사와 장미를 준비하러 갔다가 벨트로 얼굴을 쳐 맞기도 한다. 아니 이렇게 폭력적일 수가 있나 그래. 어쩌면 슐링크 작가는 다가올 암울한 미래에 대한 하나의 징조를 심어놓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예상대로 전차 차장으로 일하던 한나는 아무런 소식도 없이 꼬마의 곁을 떠난다. 그전에 이미 꼬마는 한나를 배신했다는 이유로 스스로 유죄를 선고한다. 그리고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간다.
7년이 지나 이제 법학을 공부하는 대학생이 된 미하엘은 꿈에 그리던 한나를 법정에서 만나게 된다. 법정에서 밝혀지는 한나 슈미츠 부인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까지 전개되어온 방향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흘러간다. 한나는 1943년 자진해서 무장친위대에 들어갔다. 베어마흐트도 아니고 무장친위대에? 그리고 그녀가 아우슈비츠와 크라카우의 강제수용소에서 감시원으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충격이 아닌가? 갑자기 소환된 독일 과거사 청산 이슈에 그만 어안이 벙벙해진다. 중년 여성과 십대 소년의 철부지 같았던 사랑놀이의 이면에 그런 어마어마한 사실이 숨겨져 있었단 말인가. 믿을 수가 없지 않은가.
바로 이 지점에서 소설가이기 전에 법학전문가이자 교수로 맹활약해 온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전문 분야가 치솟아 오른다. 물론 치열한 투쟁이 벌어지는 법정 드라마 와중에 한나의 처벌을 경감해줄 치명적인 요소도 잘 준비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한나가 문맹이라는 점이었다. 그렇게 책읽기를 좋아하던 그녀는 글을 읽고 쓸 줄 몰랐던 것이다! 놀라운 설정이 아닌가. 그래서 한나는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했던 것이고, 지멘스사에서 승진이 예정되자 친위대 입대를 감행했고, 7년 전에도 비슷한 이유로 미하엘의 고향 도시에 모습을 감춘 것이다. 어때 이 정도면 소설의 개연성이 충분하게 설명이 되지 않는가. 그리고 자신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법정에서 종신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의 표면에 들어나는 그런 이야기들 말고, 기의적인 면에서 슐링크는 제3제국이 호령하던 시절 제국에 부역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정확하게 겨냥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부모 세대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히틀러와 나치들이 준동하던 시절, 그들의 부모들은 의도적인 문맹이었다는 것이다. 한나가 왜 글을 읽고 쓸 수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한나와는 상황이 달랐던 많은 수의 지식인들과 사업가들은 히틀러가 꿈꾸던 천년제국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기꺼이 눈과 귀를 가리고 기꺼이 부역에 나섰다.
이제 성인이 된 미하엘은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는 한나에게 자신이 읽은 책의 오디오 테이프를 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나는 예전 꼬마의 도움으로 글을 읽고 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핍박하던 유대인에 대한 사죄를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격랑처럼 회오리치던 소설의 엔딩은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진짜 슐링크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팩트)을 깨달았다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행동에 나서라고. 전후 나치주의자들은 독일연방공화국 곳곳에 스며들어, 요직을 차지하고 승승장구했다(어느 나라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지 않은가). 독일은 과거사청산의 모범적인 국가로 칭송되지만, 죽음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수긍할 만한 진정성이 담보되어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슐링크 작가가 구사하는 균형 잡기는 문학적으로도 쉽지 않아 보인다.
주말 저녁 가벼운 마음으로 펴들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더 리더>는 확실히 잠자고 있던 나의 독서 본능을 일깨우고 새벽잠마저 날아가 버리게 만들었다. 비록 몸은 피곤하지만, 좋은 책과 만난 즐거움으로 상쇄해 버릴 수 있지 않을까 위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