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옹 도르의 여인
시배스천 폭스 지음, 이예원 옮김 / 열린책들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나에게 새로운 작가의 소설은 하나의 도전이다. 전혀 새로운 문체,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 따위를 고민하게 만드는 작가의 책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기해년에는 그렇게 시배스천 폭스의 책을 만나게 됐다. 아마 <새의 노래>라는 책으로 작가를 알게 되었고, 당장 중고서점으로 달려가 살 수 있는 책을 골랐다. 그게 바로 1989년에 발표된 폭스의 두 번째 작품인 <리옹 도르의 여인>이었다. 데뷔작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관계로 그의 작품 세계로 들어가는 입문서라고 하기에 무리가 없을 것 같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어느날, 바닷가 기차역에 갈색 머리 소녀가 도착한다. 안 마리 테레즈라는 이름만으로 그녀는 자신의 신원을 숨긴다. 처음부터 안은 비밀을 안고 있는 설정이다. 호텔 리옹 도르에 웨이트리스로 취직하게 된 그녀를 대하는 주변 환경은 적대적이다. 그녀를 기차역에서 픽업한 롤랑은 욕실 타일을 뜯어내고 목욕 중인 그녀를 훔쳐본다. 호텔의 지배인 부앵 부인은 엄격한 규칙을 적용해서 안을 괴롭힌다. 음식재료로 돼지죽을 만드는 주방장 브루노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수석 웨이터 피에르만이 그나마 좀 낫다고나 할까.

 

루베 씨로부터 도망친 소녀 안은 시골 마을에 둥지를 튼 대도시 출신 변호사 샤를 아르트만에게 호감을 가진다. 그에 대해 잠깐 소개를 하자면, 할아버지는 빈 출신의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무신론자였다고 한다. 유산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아내 크리스틴이 있다. 잠깐 아트르만이 유부남이라고? 대충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전재될지 감이 잡힌다. 아, 그리고 아르트만은 1차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언론담당 장교였다.

 

아트르만에게 호감을 느낀 안은 루셀 씨가 공사 중인 아트르만 씨네 집 먼지 청소를 위한 하인으로 자청해서 일자리를 얻는 데 성공한다. 모두 3부로 구성된 <리옹 도르의 여인>의 1부의 말미에서 안은 아르트만이 설정한 심리적 안전장치를 뚫어 버린다. 14년 동안이나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는 시배스천 폭스의 등장인물들에 대한 심리묘사는 탁월하다. 주인공인 안과 아르트만 그리고 그의 아내 크리스틴에 이르는 모든 등장인물들의 들쭉날쭉한 감정선이 그야말로 펄떡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는 무엇일까? 호텔 손님에게 거의 모욕에 가까운 비난을 받은 안을 위해 아르트만은 적극적인 변호에 나선다. 아마 그가 아니었다면 가여운 웨이트리스 아가씨는 일자리를 잃었을 지도 모르겠다. 위선으로 가득한 부르주아 계급의 사나이의 호의는 직업 구제에 그치지 않고, 안에게 그럴싸한 숙소를 얻어 주는 데까지 나아간다. 당연히 그의 아내 크리스틴은 조금씩 이야기에서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녀 역시 미세하게 바뀌기 시작하는 남편의 변화를 감지한다.

 

부르주아 위선자의 욕망은 멈출 줄 몰랐다. 아르트만은 결국 아내 대신 안을 대동하고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게 되고, 넘어서는 안될 선을 넘고야 만다. 처음부터 그 시점이 언제일지 궁금해 하던 독자는 마침내 이루어진 결론에 안도한다. 그리고 안은 자신이 가진 비밀을 털어 놓는다. 바로 그 지점에서 시배스천 폭스의 장기인 포스트워 문학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마른과 베르됭에서 싸운 안의 아버지가 장교를 죽인 혐의로 처형되었고, 고향에서 남편의 귀향을 기다리던 안의 어머니는 남편이 남긴 엽총으로 모든 굴욕을 끝내고 말았다. 홀로 남은 안은 스스로 서야만 했고, 지금까지 달려온 것이다. 안의 고백과 함께 그렇게 2부가 끝난다.

 

결국 소설은 이런 험난한 세파를 모두 헤치고 살아남아야 하는 안의 용기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하지만 아무런 배경도 없는 어린 여성의 홀로서기란 쉽지 않은 미션이었다. 안은 부유한 부르주아 계급 출신의 아르트만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고, 그 호감에서 비롯된 감정은 곧 넘어서는 안될 선을 가뿐하게 뛰어 넘고 안-아르트만-크리스틴 사이의 긴장을 촉발시키는 매개로 작동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인 장빌리에의 호젓한 분위기 속에 시배스천 폭스가 고안한 감정들이 부유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아르트만이 경험한 자신만의 고유한 느낌/감정을 타인에게 전달하기가 정말 어렵다는 이야기는 공감이 갔다. 안과 아르트만의 스캔들은 악덕이 언제 어디서고 번식할 기회를 노리고, 승리를 쟁취할 거라는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사랑하는 남편을 안이라는 유력한 경쟁자에게 잃을 위기에 처한 크리스틴의 놀라운 자제력은 또 어떤가. 감정을 모두 감추고 조용하게 집안일에 매진하던 안을 불러 자신의 유리한 위치를 각인시키는 장면은 정말 대단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르트만의 부르주아적인 양심을 간파하고,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최종 승리는 크리스틴의 것이었다.노동자들의 주 40시간 근무제를 비판하는 크리스틴의 모습은 최저임금 때문에 나라가 결단난다고 외쳐 대는 유사언론의 행태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좌파 출신 정치인의 스캔들로 파시즘에 유리한 정국을 조성하는 장면도 그렇고.

 

안이 맞이한 1936년의 봄은 곧 다가올 대전쟁의 전주곡처럼 보인다. 첫 번째 세계대전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깊숙한 상처를 남겼다. 안이 겪어야 하는 숙명의 원인은 아버지의 처형과 어머니의 죽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르트만은 자신이 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아르트만은 과연 시대를 대표하는 양심이었을까? 1차 세계대전에서 한 세대를 상실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은 프랑스 사람들은 3년 뒤 시작될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된 사람들처럼 보인다.

 

결국 불길한 예상은 현실이 되고 안은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렇게 내가 처음 만난 시배스천 폭스의 소설 <리옹 도르의 여인>은 매력적이었다. 폭스의 프랑스 3부작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아쉽게도 <새의 노래>는 나와 있지만(역시 절판이다) <샬럿 그레이>는 아예 출간조차 되지 않았다. 다음에 읽을 폭스 작가의 책은 제목도 멋진 <초록 돌고래의 거리>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기 시작했다. <리옹 도르의 여인>을 다 마무리짓기도 전에 말이다. 두툼한 사이즈의 <새의 노래>도 읽어야 하는데, 일단 구하기부터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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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2-01 14: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이름이네요...
이렇게 뒤늦게 알게 됐는데... 절판 됐다고 하면 정말 아쉬운 것 같아요.
레삭매냐님, 연휴 잘 보내세용^^

레삭매냐 2019-02-01 18:48   좋아요 0 | URL
저도 지난 달에 처음 알게 된 작가랍니다 :>
그나저나 좀 읽을 법한 작가들의 책은 죄다
절판의 운명인지,,, 그게 아쉽습니다.

2019-02-01 15: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01 1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알벨루치 2019-02-01 2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까 왔는데 다시 왔시요 레삭매냐님 설연휴 잘 보내시고 늘 새롭게 읽고 쓰시는 열정을 배웁니다 ^^

레삭매냐 2019-02-04 20:41   좋아요 1 | URL
격려 감사합니다.

책쟁이의 숙명,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소개하라. 열심히 읽는 건 거들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