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무술년이 가고 이제 기해년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무술년에도 역시나 책과 함께 보낸 그런 시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하다가, 청소년기에는 그놈의 왬으로부터 비롯된 팝송에 미쳐 허송세월을 하면서 자연스레 책과 거리가 멀어졌다. 후발주자 동생은 청소년기에 책을 엄청나게 읽었는데 나는 어느 시절부터인가 책과 아주 멀어져 버렸다. 그런 시절에도 책을 놓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예 사람 취급하지 않는 시오노 나나미의 게스타이 로마니를 읽고 나서 로마도 찾았더랬다. 그렇게 찾은 로마는 개똥 천지였다. 차라리 파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진정한 의미에서 독서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물론 소설만 파는 닝겡인지라, 다방면에 걸친 독서가 아닌 편식쟁이 독서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싶다. , 그리고 보니 역사도 아주 좋아라하는 주제라 자주 파는 편이다. 연년에 구한 오함 선생의 <주원장전>이 바로 옆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군 그래. 언제 나를 읽어줄 것인가 군은? 기해년에는 꼭 읽도록 하겠습니다.

 

기해년은 벽돌서적 격파의 해로 삼아야 하나 싶다. 대표적인 벽돌 도서로 레비-스트라우스의 <슬픈 열대>가 서가 어디에 쳐박혀 있을 테지. 에릭 홉스봄의 시대 3부작도... 홍대에서 달궁 독서모임을 가진 뒤, 마욤님과 들른 합정에서 산 <모비딕>도 당당하게 벽돌책 대열에 들 수 있으리라. 도서정가제 시행에 즈음해서 사들인 토마스 핀천의 <중력의 무지개>는 또 어떤가. 사서 고히 쟁여준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도끼 선생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도 서운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려나. 에드먼드 윌슨의 <핀란드 역으로>도 산 지가 언제인데... 대미는 아무래도 볼라뇨의 <2666>이 아닐까 싶다. 다섯 권으로 분권된 메가픽션 중에 2권까지는 읽었는데 나머지 3권을 미처 다 읽지 못했다.

 

서가에 읽지 않고 마냥 사두기만 한 책들이 너무 많다. 새해 나의 목표는 서가에서 안읽은 책들 파먹기로소이다. 아마 새해에는 책을 단 한 권도 사지 않아도 일년 동안 읽을 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무술년 나의 베스트 3를 선정한다 하고선 또 새해의 결단 기타 등등 헛소리가 길어져 버렸다. 간략하게 정리하고 나서 디비 자야겠다.

 

1. 아름다움의 선 / 앨런 홀링허스트

 

그야말로 명불허전이었다. 최초의 게이 작가 부커상에 빛나는 <아름다움의 선>이 드이어 국내에 소개되었다. 그동안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이 최고의 게이 작품이라고 떠들어 댔는데 아니었다. 불초소생은 앨런 홀링허스트를 미처 모르고 그저 우물 안 개구리마냥 지가 아는 게 전부인 양 아는 척을 한 것이었다.

 

무지막지한 두께 때문에 쉽게 도전하지 못할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정신을 추구하는 닉 게스트가 구사하는 그만의 세계에 침잠하게 된다면, 소설의 분량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가속이 붙어, 후반으로 갈수록 아쉬움이 짙어진다. 1983년 시작된 소설은 대처의 재집권으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도도한 물결 가운데, 영국 상류사회의 속살을 그대로 까발리는 고발에 가까운 면면으로 독자를 매혹시킨다. 같은 해에 의학계에 발표되어 전세계를 강타한 에이즈의 심각성을 있는 그대로 다룬 점도 충격적이었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면서 <아름다움의 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올해의 최고의 책이었다. 창비는 속히 앨런 홀링허스트의 다른 책들도 출간해 주시길 바란다.

 

2. 석류나무 그늘 아래 / 타리크 알리

 

좋은 책들은 언제나 절판의 운명에 처한다. 독서인들이 그 책들의 가치를 알아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책은 조용히 절판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타리크 알리의 무슬림 5부작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인 <석류나무 그늘 아래>는 그런 운명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언제 구입했는지도 모른 채 나의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지질이 바래져 가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다시 펴는 순간(레콩키스타 이후 책의 벽이 불타는 장면은 그전에 이미 읽었었다), 타리크 알리가 펼치는 마술 같은 이야기 속에 빠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팩션의 모범 같은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알안달루스를 자신들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이베리아 반도 무슬림의 최후에 대한 아름다운 서사는 상상과 기대를 초월해 버렸다. 타리크 알리의 나머지 무슬림 3부작도 이제라도 출간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3.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보잘 것 없이 / 귄터 발라프

 

폭력적인 신자유주의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는 어느덧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이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어 버렸다. 무자비한 자본은 인간성을 말살하고, 모든 가치를 이윤의 재생산이라는 구호로 압도해 버렸다. 잔혹한 산업현장에서 하청업체에서 고용한 노동자들이 산업안전법을 준수하지 않은 원청업체의 관리감독 때문에 죽어 나가도, 기업이 결딴난다고 악을 쓰며 자칭 민의의 대변자라는 국회의원들 때문에 산안법 개정은 원안과 다른 괴물이 되어 버렸다.

 

우리의 자본주의 선배이자 재벌그룹의 롤모델들인 독일의 기업들 역시 산업현장에 뛰어 들어 진실을 알린 르포전문 작가 귄터 발라프 같은 진짜 저널리스트가 없었다면 한국의 재벌 같은 괴물이 되어 버렸을 지도 모르겠다. 귄터 발라프와 그의 동료들이 취재한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오늘을 읽을 수가 있었다. 내가 누리는 저렴한 택배와 온갖 배달음식을 운반하는 라이더들의 노동을 나도 부지불식간에 착취 알레고리의 일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기적인 생각이지만, 쉽사리 포기하기 쉽지 않은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기가 아닌가 싶다. 나만을 위해 사는 세상이 아닌, 더불어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모두가 행복한.

 

이상이 내가 올해 만난 최고의 3권이었다. 앞으로도 200권을 읽는 시절이 또 올지 모르겠다.

 

기해년에는 또 어떤 미지의 책들과 조우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모두들 새해에도 열심히 읽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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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31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새해인사 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글과 책소개 감사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 2019년이 시작됩니다.
새해에는 항상 행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연말, 행복한 새해 맞으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레삭매냐 2019-01-01 15:54   좋아요 1 | URL
새해인사 감사드립니다.

서니데이님도 부디 기분 좋은
무술년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8-12-31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1-01 15:55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들에 답글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새해에도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기원합니다.

카스피 2018-12-31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레삭매냐 2019-01-01 15:55   좋아요 0 | URL
네 감사합니다 -

카스피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cyrus 2019-01-01 1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욤님. 정말 반가운 이름이네요. 역시 여전하시네요. 그 분을 만나서 콜린 윌슨의 책을 모으게 됐어요. ^^

레삭매냐 2019-01-01 15:58   좋아요 0 | URL
징하게 가는 달궁 독서모임입니다.
이제 9년 차로 달려 가나 봅니다.

얼마 전에도 마욤님이 콜린 윌슨의 책을
강추하셔서 하마터면 읽지도 못할 책들
을 땡길 뻔 했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19-01-01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이 뽑으신 올해의 책이라니 꼭 읽고 싶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내년에도 레삭매냐님의 좋은 책 소개, 좋은 글들 많이 기대됩니다^^

레삭매냐 2019-01-01 20:52   좋아요 0 | URL
독특한 개인의 취향인지라 다른 분들도
좋아하실 지는 ... 보장 못할 것 같습니다만 :>

기해년에도 열심으로 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얄리 2019-01-01 1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서평덕분에 타리크 알리와 귄터 발라프를 만났습니다. 아주 값진 만남이었습니다. 이제 아름다움의 선을 만나야겠네요. 레삭매냐님의 서평들 덕분에 2018년 저의 책읽기가 풍요로웠답니다. 2019년에는 서평도 써보려는데 100자 넘기 쉽지 않네요. 2019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레삭매냐 2019-01-01 20:53   좋아요 1 | URL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 지금이라도
다시 내주면 안될까 싶습니다.

이렇게 좋은 책들이 절판의 운명이라니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기해년에도 열심
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AgalmA 2019-01-01 23: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혀 예상밖의 3권이라 더욱 빛나는 베스트네요. 레삭매냐님 격찬이면 더욱 신뢰가서 저도 기회되면 꼭 보고 싶군요!

레삭매냐 2019-01-02 09:15   좋아요 1 | URL
한 권만 신간이고 나머지 두 책은 다
절판책이네요...

요즘 너무 적게 책을 찍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으면
바로 아웃 -

그러니 책을 안 살 수가 없지요...
또 책사는 핑계를 대는 걸까요?

개인의 취향이 담뿍 담긴 베스트인지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게 약점입니다.

AgalmA 2019-01-02 16:03   좋아요 1 | URL
요즘은 뭐 좀 보려고 하면 품절, 절판이 뭐이리 많은지ㅎㅎ;;; 있는 책은 리커버로 풍년 잔치고...거 참 쩝;
레삭매냐님 취향이 있어도 중상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