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느리를 따라 들어선 병실은 햇빛이 밝은 조용하고 작은 독방이었다.

흰 시트로 덮힌 침대 위에 깡마르고 머리가 좀 벗겨져 유난히도 이마가 넓어보이는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다.

엄 노파는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앞으로 다가간다.

잔인한 세월, 스물 다섯의 젊은 나이로 어미 곁을 떠날 땐 비록 가난 속에서 , 일과 공부에

여위고 힘들었지만 훤한 이마와 맑은 눈 빛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 어머니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지요? 이런 모습으로 어머니를 뵙게되니

민망합니다." 명호는 무릎을 꿇고 깊이 머리를 숙인다.

" 명호야, 명호야 네가 내 아들 맞느냐? " 도대체 무슨 병으로 병원에 있는게냐 ? "

" 네 좀 심각합니다. " 하곤 말을 바꾸어 , " 어머니는 어떠십니까?" 하고 물으며 엄 노파를

찬찬히 살핀다. 머리칼이 희고 검버섯 돋은 얼굴에 주름살도 많았으나 허리는 꼿꼿하고

눈 빛도 형형하다.작은 체구에 두 손을 허리에 집고 버티고 서 아들을 보는 눈은 나무라는 듯

원망하는 듯 엄격하였으나 그 녀의 말은 부드러웠다.

" 진작에 어미에게 소식을 보내지, 그래 이게 무슨 꼴이냐?"

" 어머니, 면목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이렇게 어머니를 뵈오니 정말 좋습니다.

정말 잘 오셨어요. 어머니." 맑은 눈으로 어머니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말하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어룽진다. 잠시 후, 문 밖에서 지체하던 며느리가 들어서며,

" 어머니, 저희 집으로 가셔서 좀 쉬시고 내일 다시 오시지요." 하자, 아들도 한 마디 거든 다.

" 그러세요 어머니 식사도 하시고 푹 쉬세요."

며느리와 복도로 나오다 코너에 의지와 탁자가 있는 곳에 오니,

" 어머니, 여기 잠간 앉아서 시원한 음료수 한 잔 마시세요."

뽀얗게 김이 서리도록 차가운 콜라 캔을 손 안에 뱅글뱅글 돌리며 며느리는 무겁게 입을 연다.

" 어머니 지금 저이는 매우 위독해요. 닥터가 말한 사망의 시한이 넘어가 있어

몇칠을 더 갈지, 몇 달이 될지, 아무도 몰라요. 기적이라도 생기면 모를까--"

" 내 짐작 좀 하였지만 생각보다 정신도 또렷아고 안색도 괜찮은데?"

" 저이는 어머니를 안심시켜 드릴려고, 피를 몽땅 걸러내어 새 피로 바꾸고 몸에 연결된 여러 가지

기계들도 모두 떼어낸 거예요. 저렇게는 대여섯 시간도 버티지 못해요."

" 도대체 어멈아, 어디가 아픈게냐? 무슨 병이라냐?"

" 간암이예요. "

"그래, 고칠 수가 없대드냐? 고칠 방법이 전혀 없대드냐?"

"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다 노력해 보았어요.

사실은 십 개월 쯤 전에 간 이식 수술도 했었어요. 얼마 동안은 건강이 매우 호전되었어요.

몸 무게도 늘고 기운도 나고, 정말 완쾌된 것같이 모든게 희망적이었어요.

그런데 그게 다시 재발된 것입니다."

며느리의 눈물어린 눈을 바라보며 엄 노파는 흐느끼는 숨을 애써 누르며 지긋이 눈을 감는다.

 

아들의 집은 나무들이 울창하게 늘어선 고요한 주택가에 들어서 약간 경사진 언덕을 오르면

거기에 붉은 지붕을 얹은 꽤 큰 규모의 흰 건물이다.

거실의 큰 유리창 밖으로는 오리와 기러기가 한가로이 헤엄치는 호수가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이다.

명호는 중학교 때 음악시간에 배웠다는 < 언덕 위에 집> 이라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나에게는 집이 하나 있다네.

   언덕 위에 내 집은 통나무 집이라네.

   노래하는 새들도 함께 산다네.

   달도 별도 내려와 친구가 된다네.

 

명호는 과연 그가 그리던 언덕 위에 집을 가졌구나.

 

' 얘들아 할머님이시다. 인사해라."

검은 머리를 길게 느려뜨린 처녀 애 둘에 터울이가 좀 떨어져 보이는 사내애가 하나 있었다.

" 너 이름은 무엇이고 나이는 몇이지?" 할머니의 물음에 두 딸들은 제 엄마를 쳐다보며

어깨를 들썩한다. 며느리가 얼른 받아

 

" 큰 애는 열여덟이고 둘 째는 열여섯이얘요. 죄송하지만 그 애들은 한국 말을 몰라요."

할머니는 크게 놀랐다 그리고 서운했다.서로 멀뚱이 바라만 보는 분위기가 어색해,

엄 노파는 제 엄마 뒤로 숨어 얼굴만 빼꼼이 내민 막내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며

" 에미야, 내가 쉴 곳은 어디냐? 잠간 눕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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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동안의 고독 -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문학사상 세계문학 6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안정효 옮김, 김욱동 해설 / 문학사상사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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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책이 나오자 눈에 띄는대로 곧 샀다. 사는 마음이 별로 시들했지만 1977 년도 김승옥의 

< 서울의 달빛 0 장 > 1회 작품집 부터 해마다 빠지지 않고 샀으므로 올해로 37 권 째를 또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참으로 가슴 뛰도록 훌륭한 작가와 작품이 많았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유수의 작가가 모두 여기를 통과하지 않았나 싶다.


근데 언제부터 새로움에 대한 설레임과 경외가 사라지고 그저 해마다 구색이나 맞춘다고 이 책을 

피상적으로 사게 되었을가.

먼저 상식적인 소설의 정의 부터 정리하고 싶다. 소설은 서사문학이다. 서사문학이라 함은 

리듬을 중시하는 시가문학에 대비하여 줄거리, 즉 스토리를 기둥으로 하는 장르이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지 스토리 부재의 작품들이 메인을 차지하고 그러기에 신진들도 그러한 추세에 따라 

뚜렷한 줄거리는 흐지부지로 내면의 모호한 의식 흐름에 집중한다. 

지금 전 세계의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들의 작품들을 보면 내면보다 오히려 외향적이고

현실 가능한 픽션 속에서 방대한 지식과 예견, 그리고 비젼을 제시해 준다.

근래 내가 심취해 읽었던 작품으로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 , 밀레니엄 시리즈를 펼쳐 낸 

스웨덴의 스티그 라르손의 연작집이 있다. 너무도 치밀한 구성과  깊고 다양한 인성으로 빚어지는

사회상을 그야말로 흥미진진하게 그려내 깊이 천착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이것이 그냥 대중의

인기 영합적 성공작이었다고 비웃지 마시라. 그는 이 연작을 쓰느라 너무나 골몰했던 나머지 그가 의도한 모든 이야기를 끝내지 못하고 50 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 만큼이나 한사람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라 믿고 있으며 그 보다 더 숭고한 예술혼이 있겠는가.

지금은 깊은 사유와 푹 넓은 지식, 발로 뛰는 팩트의 소설이 대중을 휘어잡는게  대세인 시대다.


나는 이런 작품들을 선별하는 심사위원들의 가치기준을 疑視한다.

세계 1, 2 차 전쟁이 끝나던 전후시절 어둡고 세기말적인 사조가 인류를 휩쓸던 때, 우리나라에도 

긴 일제시대, 그리고 육이오 전란으로 피폐하고 빈곤했던 그 시절 허무와 좌절 독백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여 전후문학에서 그려 낸 음울함과 내면으로만 웅크린 소아적인 부정과 혐오, , 그것도 한 시대상의 흐름이었지만 지금은 이제 많이 달라졌다. 우리의 전통적인 뽕짝조의 유행가에서

아이돌의 유쾌발랄하고 율동적인 댄스곡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 처럼 소설도 바뀌어야 한다. 작가들 보다 먼저 심사위원들의 구태의연한 가치기준 부터 크게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1910 년 박민규의 < 아침의 문 >까지는 희망이 보였다. 박작가는 기상천외한 소재와 상식을 뛰어넘는 재치 넘치는 상상으로 버무려 놀랍지만 유쾌한 정신적 체험을 이끌어 준다.

그러나 2011 년 공지영 작가의 < 맨 발로 글목을 돌다 >에서는 저으기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노련한 필력과 폭 넓은 활동상의 영역은 익히 들어 알았지만 그 소설에서는 자신의 주변적인 

 이야기가 소설이기 보다 수필? 또는 자전적 소설, 그런데 이런 자전적 신변 소설이 어떻게 대한민국 

2011 년을 대표하는 우수 소설이 될 수 있는가 란 의문이 강한 불만으로 남는다.

올 대상으로 선정된 김애란의 < 침묵의 미래 >는 아직 읽기도 겁이 난다.

너무 난해하여 내가 수준 낮은 독자가 아닐까, 하며 나를 나무라고 브끄러워 할까봐.. 아니면 이게 

무슨 스토리로 엮인 소설이람. 하고 차갑게 매도할까봐. 사실 둘 다 내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 다음 지면으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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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좋은 때라 마음만 정하니 미국 가는 수속은  신속히 이루어져 처음으로 상면하는

사돈 아가씨를 따라서 미국 땅에 도착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려 지루한 절차를 끝내고 로비로 나오니 사돈 내외와 며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느리가 다가와 공손히 절하며,

" 어머님 연노하신 몸으로 먼 여행에 고생하셨지요?" 하고 말을 하나, 엄 노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듯 며느리 어깨 너머만 살핀다.

" 어머님, 아범은 거동이 어려워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으니 어서 가시지요."

엄 노파는 안면이 생소한 사돈 내외와 어설픈 인사를 나누고 제 부모 따라가는 사돈 처녀에게

고맙다는 치사도 미처 못한 채, 며느리를 따라 차에 오른다.

엄 노파는 궁금한게 너무 많아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검은 안경으로 얼굴을 반나마 가리고

앞만 똑바로 응시한 채 운전대를 잡은 며느리의 골돌한 모습에 별로 대답할 분위기가 아니다.

' 조금만 있으면 만사 다 알아지것제.'  왠지 안다는게 무서운지도 모를거란 생각에 우선 머리를

비우고 차창 밖으로 시선을 보낸다. 미국 땅은 아득하도록 넓다 . 산도 언덕도 없이 밋밋한 들판이

한참 펼쳐진가 하면 하늘을 가린 키 큰 나무들이 병풍처럼 길 양 쪽을 에워싸고 있다.

길 가 작은 나무에서 문득 작은 새가 포르르르 난다.내 고향에도 흔한 참새다. 그런데 여기 참새는

머리 꼭데기에 빨간 깃털이 달려 앙증맞고 귀여워 노파는 잠시 걱정을 잊고 미소 짖는다. 

다시 초원이 이어지는데 여기저기 흰 천을 펼친 듯 무더기로 야생화가 가득하다.

무슨 꽃이 저리도 무성히 자라는고?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 아 ! 망초 꽃. 고향의 산야에서도

지천으로 널린 꽃이 여기서도 저리 흔하구나. 생각하며 다시 시름에 젖는다.

저승 문턱에 지천으로 피어 있어, 저 쪽 피안으로 넘어가는 영혼들에게 이승의 기억을 깡그리

잊게 해준다는 꽃.하기사 이승의 고락과 인연을 모두 잊어서야 망자는 미련을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피안으로 향하는 나룻배를 타겠지. 이곳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 삶과 죽음이 있고, 삶의 고뇌와

행복이--- 하는 생각에 이르자 노파는 또다시 등골을 달리는 써늘한 한기에 오싹 몸을 웅크린다.

허지만 다시 노파는 ' 아니 절대 놀래지 않으리라. 닥치는 일에 결코 물러나지 않으리라....'다짐하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고 뻑뻑한 눈을 감는다.

차는 여염집이 아닌 큰 병원으로 들어가 멈추었다.

건물 안 로비와 복도에는 갖가지 색갈 피부의 사람들이 오가나, 발소리도 안나게 조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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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르릉 때르릉 " 전화 벨이 울린다.

' 누구여? 안적 식전인데' 딸들은 지금 이 시각 즈이 남편 , 애들 학교 보내고 출근시키랴

바쁠긴데,  대체 누굴꼬?' 하며 엄 노파는 수화기를 집어 든다.

" 여보시요?" 댓구하자, 저 쪽에서 잠깐 낮은 숨소리가 나며 잠잠하다.

" 아니, 누구시유? 전화했음 말을 해야지" 하고 재촉하자, 망서리며 묻는다.

" 엄 선녀씨 댁 맞습니까? " 이상하게도 매우 낮고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이다. 

노파는 갑자기 심하게 툭탁이는 가슴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아득해지는 정신을 가다듬고

침착하게 묻는다.

" 너 명호,  명호야?" 반응이 없자, 속삭이듯 다시 묻는다. " 명호 맞지야?"

저 쪽에서 흐느끼듯. 말소리가 목구멍으로 기어들듯

" 네, 명호입니다. 어머니. 저를 금방 알아 보시는군요."

" 그럼 이 어미가 널 어찌 잊겠느냐? 지금도 널 생각하고 있었어야. 이 무정한 눔아."

끝으로는 사설조의 울음이 묻어난다.

네 놈이 이십육 년 전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나를 죽은 자식으로 잊으라고 울부짖으며

떠난 너지만 이 어미가 어찌 너를 잊을 수가 있겠느냐?목울대를 비집고 가득이 북받치는

한숨같은 넋두리를 지그시 삼키며 신중하게 묻는다.

" 게가 어디냐? 왜 어미에게 당장 오지 않고 전화인게냐?"

" 어머니 죄송합니다. 여기는 미국이얘요." 잠시 말을 끊었다가 " 건강은 어떠세요?연세도 많으실텐데요."

이것아 어미가 그렇게 궁금하면서 이제사 전화냐? 하는 원망이 쏟아져 나오려는 걸 꾹 참고,

" 오냐, 어미는 잘 지낸다.편하게 잘 지내니 건강도 괘않다. 근데 너는 무고하냐? 처자식도 잘

거느리고?" 명호는 " 네" 하고 애매하게 대답을 끌다가 " 어머니," 하고 부른다.

" 여기로 한 번 오셨으면 하는데요. 오실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음성은 어둡고 침울하며 쥐어짜듯 나즉하고 또렷했다.

엄노파는 등골을 달리는 서늘한 한기를 떨치지 못한 채 " 왜 무슨 일이 있는게냐? 어서 말을 하여라."

" 아닙니다 어머니, 어머니가 그저 뵙고 싶어서지요. 구경삼아 오세요."

태연한 척 딴청을 부린다.

엄노파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 오냐, 내가 너를 기다려 이 때까지 살아 왔거늘

너를 보러 지옥엔들 못 갈까?네가 나를 보고잡아 부르는데 가야지. 암 가고 말고,

뱅기 타도 끄떡없다 가마, 곧 가마."

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지금 처제가 한국 나가 있으니 필요한 수속이랑 해서 잘 모시고 올겁니다.

곧 뵈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요' 의 여운이 좀 길어지며, 전화 속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꿈을 꾼 양 . 믿기지 않는 듯 사방을 새삼 두리번거리며, 얼빠진 듯 서 있는 노파의

어깨 너머로 아침 해가 화사하고 싱그럽게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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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 노파가 잠을 깼을 때는 아직 이른 새벽.

늘 같은 시각이다. 노파는 하앟게 세어 성긴 머리칼을 손갈퀴로 대충 쓸어 넘기며

뒤란 우물가로 나왔다. 하얀 김이 뽀얗게 솟아 오르는 우물 속에 두레박을 넣어 맑은

물을 찰랑찰랑 길어 올린다. 우선 달고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머금어 입 안을 가신 후,

주름 진 얼굴을 뽀득뽀득 소리나도록 말갛게 씼는다.

두 번 째 떠올린 물은 조루에 담아 장독대 옆으로 가꾸어 놓은 꽃 밭에 뿌린다. 거기에는

키 순서대로 젤 앞에는 채송화, 봉숭아, 백일홍, 따알리아, 접시 꽃들이 새벽 이슬에

함초롬이 젖은 채 잠에서 덜 깬 듯 고요하다. 노파는 조루를 높이 쳐들어 듬뿍듬뿍 물을

준다. 빨갛고 노란 꽃 잎, 푸른 잎사귀 위로 또르륵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수정 물방울들이

언제나처럼 가슴저린 그리움으로 젖어든다.

분홍 꽃 송이 조롱조롱 매달고 낮으막한 봉숭아는, 밑으로 아직 어린 두 딸 애들같고, 물 맞을

때마다 우쭐대는 따알리아 접시 꽃은 쑴벅쑴벅 잘도 크던 아들들 같다. 영감이 있고

오남매가 이 집을 가득 채우고 시끌벅적 살 때는 하루하루를 꾸려가기가 참으로 바쁘고

살기에 골몰했었지.

먼저 저 세상 떠나버린 영감과 두 아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찌르는듯 생생한 아픔이나--

노파는 새삼 고개를 저으며 털어버리고 만다.

두 딸은 제각기 좋은 서방 만나 잘 살고 있으니 감사하고, 그리고 세 째 명호가 아직 있다.

오랜동안 못보고 있으나 언젠가는 기어코 이 어미를 찾을 것이다.

' 암 오구 말구' 엄노파는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 째 물을 길어올려 걸레를

힘차게 빨아 헹구어, 마루사이로 둔 건너 방으로 간다.

 미닫이를 열고 들어가 무릎을 꿇고 구석구석 깨끗이 닦는다. 빈 방인듯 냉냉한데 매일 닦아

반짝이는 장판 방이며 오래된 서랍장과 책상이 누군가를 기다리는듯 긴장되어 있다.

 낡아서 모서리가 둥굴고 칠도 벗겨져 수없는 흠집과 나무결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책상을 닦으며

' 이게 우리 집 우등생을 길러낸 책상이여. 이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상타고 대학까정 다닌게여.'

하며 장한 명호의 학생 때 모습을 떠올린다.그러나 지금 노파 꼍에 없는 명호를 생각하며 자기

최면을 걸듯 ' 암1 올거여 오구말구, 그러니 언제라도 오면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치워놔야

되지 않것어? ' 또 다짐하며 옷소매를 걷어올려 가늘게 드러난 팔뚝에 울근불근 힘줄이 솟도록 

힘차게 닦고 또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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