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변한 걸 보니, 죽을 날이 멀지 않았구먼.”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두고 농으로 하는 말이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인데 변했다는 것은 변고가 있을 징조고 변고의 마지막은 죽음이니, 농이긴 하지만 일정 부분 일리가 있는 말이에요. 확실히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죠. 그러나 예외 없는 법칙 없다고 그런 일반적 인식을 깨트리는 사람도 있죠.

  

조선민족의 생존을 유지하자면, 강도 일본을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강도 일본을 쫓아내려면 오직 혁명으로써 할 뿐이니, 혁명이 아니고는 강도 일본을 쫓아낼 방법이 없는 바이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암살 파괴 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일제 강점기하 유명한 독립 선언이 두 개 있어요. 기미독립선언조선혁명선언. 기미독립선언이 비폭력 무저항 정신에 기초를 둔 선언이라면 조선혁명선언은 이와 대척점에 있는 선언이죠. 상기 인용문은 조선혁명선언의 일부예요. 폭력과 저항이 왜 독립을 위해 필요한지를 극명하게 말하고 있어요

  

그런데 조선혁명선언기미독립선언과 다른 점은 독립을 넘어 혁명까지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에요. 독립 이후까지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죠. 독립 이후의 조선은 만민이 평등한,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어요. 비록 일제강점기 하라 해도 왕조 체제를 벗어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이런 발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혁명적인발상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이런 혁명적인 발상을 한 사람은 바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예요. 그가 성균관 박사를 지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죠. 비록 그가 경술국치(1910) 전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당시 중국을 휩쓸던 여러 신사조를 접했으리라는 것을 전제한다 해도 말이죠. 그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일반 인식을 깬 초인(超人)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사진은 단재 신채호가 북경에서 발행한 잡지천고(天鼓)에 실은 시예요(사진은 단재 생가에서 찍었어요). 천고(天鼓)조선혁명선언(1923) 두 해 전에 한문으로 발간된 잡지로, 항일 투쟁에 있어 중국과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조선과 중국 두 나라의 독자를 겨냥하여 한문으로 발간된 잡지예요. 오래 발간되지는 못했어요(7호로 종간). 

  

천고송     하늘 북을 노래하다

  

吾知鼓天鼓者 오지고천고자    나는 아네, 하늘 북 치는 사람

其能기능애이노의    능히 슬프게도 분노케도 하지

哀聲悲怒聲壯 애성비노성장    슬픈 소린 구슬프고 노한 소린 장엄하여

二千萬人起 환이천만인기    이천만 동포를 큰 소리로 일깨우지

然決死心 내의연결사심    의연히 나라위해 죽을 결심케 하고

光祖宗復疆土 광조종복강토    조상을 빛내고 강토를 되찾게 하네

取盡夷島血來 취진이도혈래    섬 오랑캐 피 깡그리 긁어모아

於我天鼓 기흔어아천고    우리 하늘 북에 바르려 하지

  

북경에는 모종신고(暮鐘晨鼓)라 하여 아침에는 북소리로 새벽을 깨우고 저녁에는 종소리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단재는 오랫동안 북경에 머물렀기에 이 소리에 익숙했을 거예요. 하여 새벽을 깨우는 장엄한 북소리에서 이 시를 착상하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단재는 조선 민중의 항일 의식을 일깨우는 고수가 되기를 자임하고 있어요. 잡지 천고(天鼓)는 그 고수가 때려 낸 북소리인 셈이죠. 이 시에서 주목할 것은 마지막 두 구예요. 이 구는 의례적인 적개심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무장 투쟁 의지를 표현한 것이거든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두 해 후에 작성된 조선혁명선언이죠. 다소 견강부회한 생각이지만 이 시의 여섯 째 구에는 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말했던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이 은연중 깔려있다고 보여요. 이 시를 단순히 항일 의식을 고취한 시로 보는 건 단견이고, 그의 의식 발전의 최고점이 발화된 시라고 보는 것이 정견일 듯싶어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살펴볼까요?

  

는 북을 치는 모습을 그린 거예요. 는 북의 장식물, 는 북, 는 북 받침대, 는 손에 북채를 든 모습을 그린 거예요. 북 고.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鼓動(고동), 鼓吹(고취)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입 구)(옷 의)의 합자예요. 슬피 운다는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해요.

  

(마음 심)(종 노)의 합자예요. 화가 났다는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종은 늘 불만이 있기에 화난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요. 성낼 노.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憤怒(분노), 怒發大發(노발대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입 구)(클 환)의 합자예요. 큰 소리로 부르다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부를 환.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喚起(환기), 喚呼(환호)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불땔 찬)의 약자와 (술 유)(나눌 분)의 합자예요. 조왕신에게 희생(犧牲)의 피와 술을 올리며 제를 지낸다는 의미예요. 혹은 흔종(釁鐘, 새로 주조한 종의 균열 부분을 희생의 피를 칠해 메꾸는 일) 의식을 치르며 제를 지낸다는 의미로도 봐요. 피칠할 흔.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釁鐘(흔종), 釁端(흔단, 틈이 생기는 실마리)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기념식사에서 약산 김원봉을 언급했다가 보수층의 뭇매를 맞았죠. 비록 항일 운동의 한 주역이요 국군의 모태가 되는 광복군의 지도자였지만 월북한 인물이었기에 현충원에서 거론하기에는 부적절한 인물이었다는 것이 주 이유였어요.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동족상잔을 겪었기에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계열의 항일 지도자에 대해서는 평가가 극히 박한 것이 우리 현실이죠. 이는 단재 신채호에게서도 마찬가지예요. 그가 복권된 것은 1990년이 넘어서예요. 그간은 그가 이승만을 적대시했던 인물이고 사회주의 성향을 띈 무정부주의자였다는 점 때문에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죠. 어쩌면 지금도 온전히 복권된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어요. 이들에 대한 온전한 평가는 통일 이후를 기다려야 할 거예요. 그 날을 위해 단재는 지하에서 여전히 천고를 치고 있는 것은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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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런다고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TV에 나오지도 않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알아주는 이도 없습니다.

 

하지만 감동이 있습니다.

행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랑받게 됩니다.

세상이 더 아름다워 집니다.

 

태국에서 제작한 한 공익 광고 동영상에 등장하는 문구예요(약간 손질). 문구의 "매일 이런다고"는 이런 내용이에요. 낙숫물에 메마른 화분을 옮겨놓고, 구걸하는 모녀에게 작은 적선을 베풀고, 배고픈 개에게 소량의 음식을 나눠주고, 무거운 수레를 끄는 아주머니를 돕고, 좌석을 양보하고, 홀로 사는 할머니에게 바나나 몇 쪽을 드리는 일. 작은 배려들이죠. 광고는 이 작은 배려가 주는 의미와 가치 - 문구 하단 내용 - 를 감동적인 화면에 담아 전달해요(백문불여일견, 한 번 보셔요).

 

배려는 사실 귀찮은 일이죠. 내 앞가림 하기도 빠듯한데 타인까지 신경써야 하는 것이니. 그런데 맹자는 이런 배려가 없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해요.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차마 하지 못할 일은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지금 느닷없이 어떤 어린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깜짝 놀라 구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는 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고자 해서도 아니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려 해서도 아니고, 아이를 구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서도 아니다. 그저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하는 것 뿐이다. 하니 측은한 마음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고사양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는 사람이라 할 수 없다."

 

맹자는 경험적 사실을 통해 인간의 본성에는 배려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기에 배려를 하지 않는 이들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던 거예요. 과격한 주장이긴 하지만 일리있는 주장이죠(여기 배려로 해석한 맹자의 언급은 사단(四端)의 측은지심(惻隱之心)과 사양지심(辭讓之心)이에요).

 

맹자가 배려의 실천적 근거를 사람의 본성에서 찾았다면, 태국의 광고는 그 실천이 주는 효용성에 주목했다고 볼 수 있어요. 맹자가 만일 태국의 광고 동영상을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아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나의 주장을 부드러움으로 보완했군. 여하튼 나의 성선설은 그대들의 광고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군. 귀찮을 수 있는 일을 하는데 기쁨 나아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은 사람의 본성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진의 한자는 '배려(配慮)'라고 읽어요. '생각을 배당하다. 이리저리 신경을 쓰다'라는 뜻이죠. 물질이 풍요해지고 살기도 편해졌는데 이상하게 배려는 예전보다 훨씬 못한 것 같아요. 사진의 한자를 보며 왜 배려를 해야 하고 그 의미는 뭘까를 생각하다 맹자와 태국의 공익성 광고가 떠올라 둘을 약간 견강부회식으로 엮어 봤네요. 사진은 한 음식점에서 찍었는데, 하많은 문구 중에 왜 저 문구를 사용했을까 궁금하더군요. 어쩌면 저와 같은 생각때문에 사용한 것은 아닐지? 아니면 갑질하는 손님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서? 잠시 사색을 하게 만든 재미있는(?) 물수건이었어요.

 

한자를 자세히 살펴볼까요?

 

(술 주)의 약자와 (벼리 기) 약자의 합자예요. 술 빛깔이란 의미예요. 의 약자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해요. 지금은 '술 빛깔'이란 의미로는 사용하지 않고, '나누다' '' 등의 뜻으로 사용해요. 이 뜻은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술 빛깔에 따라 술의 품질을 나누다, 혹은 그렇듯 인품의 고하를 판단하여 맞이한 배우자란 의미로요. 나눌 배. 짝 배.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分配(분배), 配匹(배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생각 사)(범 호) 약자의 합자예요. 깊이 생각한다는 의미예요. 로 의미를 표현했어요. 의 약자는 음()을 담당하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호랑이의 정연한 무늬처럼 질서정연하게 깊이 사고한다는 의미로요. 생각 려.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思慮(사려), 念慮(염려) 등을 들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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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인형을 만들고 있어요. 최근에는 작업 및 전시실 비슷한 공간까지 마련했어요. 마련 과정에 하나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려 시 한 수를 지었어요. 한시로 지을 수도 있지만, 실력이 부족해, 충분한 마음을 전달하기 어려워 그냥 우리 말로 지었어요. 막상 짓고 보니 이게 시인지 산문인지 구분이 안되네요. 그러거나 저러거나 작은 액자로 만들어 아내에게 줬더니, 생각외로, 좋아하네요. (평소 데면데면하게 대한 것에 대한 역반응인 것 같기도 하고….) 임들의 눈을 한 번 더럽혀 볼려고 하는데 괜찮으시겠는지요?

 

 

아내의 人形 작품에 붙여

 

                                            

어느 날부터 아내가 인형을 만들기 시작했다

너절한 천과 저저분한 실 보풀

나는 희꺼운 눈으로

그녀가 만드는 인형을 쳐다보았다

한달 두달 석달

너절한 천과 저저분한 실 보풀들은

조금씩 사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어릴 적 친했던 코흘리개 친구들

말 한 번 걸지 못했던 단발머리 소녀

늘 이윽한 눈으로 바라보던 아줌마

한 밤중 목이 말라

잠깨어 부엌에 가려는데

거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몸 숨기고 실눈 뜨고 바라보았다

철수는 자전거를 타고

영이는 쑥을 뜯으며 노래를 부르고

아줌마는 볕이 좋다며 풀 먹인 광목천을 널고 계셨다

다음 날 나는 아내의 인형들을 다시 보았다

약간은 웃는 듯 약간은 부끄러운 듯한 모습 이었다

부스스한 얼굴로 밥 지러 나오는 아내를 보며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신 혹시 전생에 바느질하던 선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나는 결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싱거운 눈으로 그녀의 인형들을

바라보기로, 아니 바라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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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이병욱 2019-06-09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 제가 장편을 집필하느라 소원했습니다. (현재도 집필중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님의 시를 보고 제 생각을 감히 적습니다. 줄을 바꾸지 말고 그냥 쓰는 산문시 형태가 적합할
내용입나다. 시를 쓰고자 하는 시심은 충분한데 표현은 아직 산문 느낌입니다. 더 줄이고 이미지가 떠오르는
시적표현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번에 또 책을 내심에 축하 드립니다. 책을 보내주신다면 기꺼이 받겠습니디. 제 주소는 비밀댓글로 남기겠습니다.

2019-06-09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9 1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3 07: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3 0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편지꽂이 제일 위 구간에 아무렇게나 내던지듯이 꽂혀 있었네.”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한 대목이에요. 편지를 훔친 D장관은 너무 평범하여 아무도 관심두지 않을 곳에 훔친 편지를 놓아두죠. 귀중한 것은 은밀한 곳에 감출 거라는 일반인의 인식을 뒤집은 거예요. 그의 예측대로 총감은 D장관 집의 은밀한 곳만 관심 깊게 수색하고 저 편지꽂이의 편지는 간과하고 말죠. 그러나 뒤팡의 눈은 피해갈 수 없었어요. 도난당한 편지는 추리소설의 묘미를 보여주는 작품이죠.

  

요즘의 한자 표기는도난당한 편지와 반대 모습을 보여줘요. ‘도난당한 편지가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춘 경우라면, ‘한자 표기는 비범함 속에 평범함을 감춘 경우라고 할 수 있어요. 한자 문맹을 길러낸 우리 교육의 웃고픈 현실이에요. 경험 하나를 소개해요.

  

點心自體解決

  

일요일 아침 등산을 가기 전 아내에게 메모를 남겨 놓았어요. 그날따라 까닭 모르게 한자로 쓰고 싶었어요. 집에 돌아왔더니, 아내가 물었어요. “점심 차릴까?” “메모 써놨잖아! 먹고 왔어.” “뭐라고 썼는데?” “점심자체해결.” “그 뜻이었어? 아니, 그걸 꼭 그렇게 한자로 써야 돼?” “그건 아니지만. 그런데 (메모를) 뭐라고 읽은 거야?” “, 마음 심자가 있기에 답답한 마음 해소하러 간다는 걸로 생각했지. 어제 저녁에 답답하다고 했잖아!”

  

50줄에 들어선 아내조차 이러니 이하의 세대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거예요. 한자 문맹 상황이 이렇다보니 가끔 주변에서 황당한 작품을 만날 때가 있어요. 사진이 그 한 실례예요

  

玉立蕭蕭竹數竿 옥립소소죽수간   깨끗한 모습으로 조용히 서있는 대나무 몇 그루

風枝露葉帶淸寒 풍지노엽대청한   바람과 이슬 맞은 가지와 잎새 맑고 서늘함을 띄었네

美花山房 牛甫 미화산방 우보       미화산방에서 우보(소 같은 사내) 그리고 쓰다

  

이건 대나무에 관한 시예요. 그런데, 이 화제 옆의 그림을 보세요. 대나무가 아닌 난초가 그려져 있어요. 이 작품은 한 음식점의 벽지에 인쇄된 것인데, 음식을 먹다 저 벽지의 시를 본 이들은 대부분 난초에 관한 시일 거라 생각할 거예요. 벽지를 제작하는 이들은 (본인들도 그렇지만) 한자를 모르는 이들이 다수이니 뭐를 그려 넣은들 상관있겠는가라는 생각으로 저 벽지를 제작했을 거예요(우보라는 이가 저 그림과 글씨를 함께 썼을 것 같지는 않아요. 벽지를 제작하는 곳에서 짜깁기 했을 것으로 보여요). 모두가 눈 뜬 장님이 돼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지요. 한자가 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그걸 배우고 가르치지 않아 장님이 되고 장님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어요(앞에서 비범함이란 말을 쓰긴 했지만 그건 그저 댓구를 맞추기 위해 쓴 것일 뿐이에요. 한자는 결코 비범하지 않아요).

  

낯선 한자를 몇 자 자세히 알아볼까요?

  

(풀 초)(엄숙할 숙)의 합자예요. 쑥이란 뜻이에요. 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담당해요. 쑥 소. 쓸쓸하다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드문드문 나있는 쑥은 그 모습이 쓸쓸하단 의미로요. 쓸쓸할 소.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艾蕭(애소, ), 蕭瑟(소슬, 가을바람이 쓸쓸하게 부는 모양) 등을 들 수 있겠네요

  

(칠 복)(성길 루)의 합자예요. 빈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하여 셈을 한다는 뜻이에요. 은 여기서 때리다란 뜻보다 셈을 할 때 손가락을 굽혔다 폈다하는 모습을 형용한 의미로 사용됐어요. 셀 수. 자주라는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이때는으로 읽어요.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數學(수학), 頻數(빈삭, 자주) 등을 들 수 있겠네요.

  

竿(대 죽)(방패 간)의 합자예요. 장대란 뜻이에요. 으로 뜻을 표현했어요. 은 음을 나타내면서 뜻도 일부분 담당해요. 에는 곧다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거든요. 장대 간. 낚싯대란 뜻으로도 많이 사용하는데, 본뜻에서 연역된 뜻이에요. 낚싯대 간. 위 시에서는 대나무를 세는 단위의 의미로 사용되었어요. 竿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竿頭(간두, 장대 끝), 釣竿(조간, 낚싯대) 등을 들 수 있겠네요.

  

(풀 초)(잎 섭) 약자의 합자예요. 초목의 잎사귀란 뜻이에요. 잎사귀 엽. 이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落葉(낙엽), 葉書(엽서)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는 옷자락을 겹치게 묶고[llll] 묶고[] 양 끝을 가지런히 늘어뜨린[巾巾] 큰 띠를 그린 거예요. 띠 대. 가 들어간 예는 무엇이 있을까요? 革帶(혁대), 帶狀疱疹(대상포진) 등을 들 수 있겠네요.

  

가끔 아내한테, 미안한 일이지만, 암호[한자 표기]를 사용하는 때가 있어요. 주로 말로 하기 민망한 경우에요. 어느 날 아내가 한의원에 가는데, 저도 단골로 가는 한의원이라 제 약도 지어오라고 부탁하며 최근의 몸 상태를 나타낸 문구를 적어주었어요. 囊濕及小便頻數. 다행히 아내는 암호의 내용을 캐묻지 않았어요. (임들께서도 캐묻지 마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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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9-06-06 1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더 찾아보게 될지도 모릅니다^^ 본문중에 힌트가 있네요. 자주 삭.
아, 그래서 일부러 덧붙이신 일화인가요?

찔레꽃 2019-06-06 13:11   좋아요 0 | URL
약간은... ^ ^;;
 

 

무고하신지요? 그간 주물럭 거렸던 무거리들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냈습니다. 지난 번에는 『길에서 주운 한자』란 제호를 달았는데, 이번에는 『길에서 만난 한자』라는 제호를 달았습니다. 전작(前作)이 한자 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 생각 중심이라 제호에 약간 변화를 주었습니다.

 

전작에서 서평을 부탁드렸던 벗님들의 격려와 충고가 이번 책을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한자 중심보다 생각 중심으로 책을 내게 된 것도 그 도움의 일단입니다(순오기 님의 충고). 이제는 더 이상 제 블로그를 찾지 않으시는(흑흑, 제게는 몹시 슬픈 일입니다) 한 벗님의 충고, 저자 자신보다 독자를 우선시하라는 충고도 이번 책에 많이 반영되었습니다. 격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과찬에 가까운 서평을 해주신 벗님의 서평이 이번 책을 내는데 큰 힘이 됐다는 것도 고백합니다(양철나무꾼 님의 격려).

 

충고든 격려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다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이 번 책에 대한 벗님들의 충고와 격려를 듣고 싶습니다. 주소와 성함을 남겨 주시면 책을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공으로 책을 받으면 부담스러워 서평쓰기 어렵다며 마다하시는 분도 많으신 것, 잘 압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은 없다고 봅니다. 나쁜 면과 좋은 면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이고, 이는 책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부담갖지 마시고 서평용 책을 요청해 주셨으면 합니다. 바쁜 시간 쪼개어 서평을 해주시는 것, 그것 자체가 제게는 보내드린 책을 상회하는 큰 보답입니다.

 

어디로 보내드릴까요?

 

내내 건승하시길 기원드리며

 

2019. 6. 2(일)

 

찔레꽃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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