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개는 우리를 들뜨게 하지
바나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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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는 우리를 들뜨게 하지

 


당신의 취미는?’이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 답할 수 있을까? 책이야 늘 끼고 있으니 취미라고 하기에는 조금 미안한 마음이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일상의 시계는 그 시점을 기준으로 달라졌으니까. 생각해보니 잠깐이었지만 그 무렵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줌마 서너 명이 모여 붓을 들고, 물감을 짜고, 수다를 떨곤 했었지. 실력이 다들 고만고만했던 것이 다행이었다면 더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은밀하게 보이지 않는 동질감이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주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서로의 실력을 부러워했고, 또 서로 격려해주었으며, 아줌마들의 특권인 뒷담화?’도 느긋하게 듣고 웃어넘기는 경지에 이르곤 했었다.

 


여기 뜨개를 취미로 삼은 이의 이야기가 있다. 먼 이국땅에 살고 있는 그녀는 아일랜드 남자와 결혼을 하고, 그곳에서 낮에는 코딩 프로그램 개발자로 밤에는 뜨개를 하며 살아간다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녀가 뜨개를 취미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 역시 코로나가 한몫을 했는데, 아일랜드 정부의 락다운 결정에 따라 재택근무가 시작되면서 그녀의 뜨개 사랑이 시작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남편의 성 카바나(Kavanagh)에서 착안한 이름 바나. 그녀 바나의 에세이는 뭐랄까 순수하다. 꾸밈없이 이어지는 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온다. 책 속에는 그녀가 뜨개를 시작하게 되면서 알게 된 정보들과 함께 경험한 이야기들이 소박하게 실렸다. 온라인에서 이어지고 있는 함뜨(함께 뜨기의 줄임말) 뜨친(뜨개질 친구)과 같은 정감 있는 이야기들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도안이라든지 뜨는 방법과 다양한 종류의 바늘과 실에 대한 정보도 실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일랜드라니. 내가 기억하는 아일랜드의 이미지는 대기근과 감자뿐이었는데. 지은이 바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비도 많이 오고(특이하게 사선으로 비가 내린다고 한다) 바람도 거세다고 한다.

그녀는 아일랜드의 집에서 혼자 뜨개를 시작했지만, 멀리 한국과 미국 혹은 캐나다에 있는 뜨친들과 함께 공유하며 따뜻한 인간관계를 만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 또한 우리가 말하는 그 소확행의 범주 안에 안착할 만한 일이 아닌가. 결국은 뭐랄까. 혼자만의 시작이었으나 함께 이어갈 수 있었던 소통의 힘. 그 안에서 주고받았던 격려와 서로에 대한 배려들. 완성의 기쁨과 성취감 등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 있어 무엇보다도 책은 값지고 묵직한 기록이라는 생각이 든다.

 


뜨개를 잘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저 에세이로 만족해야 할까 싶기도 하지만, ‘한번 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라는 그녀의 유혹 앞에서 잠시 흔들리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 까닭에 여전히 추운 겨울이 되면 자꾸만 일없이 눈앞에 굴러다니는 줄바늘과, 장롱 위에 숨겨놓은 털실들이 , 됐고. 그래서 이제 어쩔건데?’라며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뜨개로 향하는 잔바람을 진득하게 책으로 달래야 할까보다.

 


개인적으로 아가일 무늬라든지, 인따르시아 같은 디자인의 옷들이 너무 갖고 싶은 건 지극한 사심인 걸로 해두자.

모처럼 신선한 소재의 에세이를 접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에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만의 진솔한 이야기는 그만큼의 거대한 힘을 갖는가도 싶다. 이런걸 에세이의 힘이라고 하는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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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3-01-28 0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월천예진님..여전히 열심히 읽고 쓰고 계셨네요 ^^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월천예진 2023-01-29 09: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잘 지내시나요?^^ 소식 궁금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달밤 숲속의 올빼미
고이케 마리코 지음, 정영희 옮김 / 시공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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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밤 숲속의 올빼미

 


삼일동안 내내 율리아 레즈네바의 Tu del ciel ministro eletto의 음악만 듣는다. 중독이다. 경건함으로 정신을 무장한다.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어둠이 더디게 물러가는 것처럼 아침도 느릿한 걸음걸이로 찾아오는 하루였을까. 일곱 시가 지나도 어두웠다. 침대 머리맡에 독서 등을 켜고 고이케 마리코의 책을 본다. 옥색의 책 겉표지를 벗겨보니 좋아하는 쪽빛, 아니 더 진한 남색의 면지에 금색으로 박힌 글자가 또렷하다. 그런데 책의 한 귀퉁이가 구겨졌다. 욕심같아서는 양장표지로 된 책을 가지고 싶다.

 


짝을 잃은 그녀의 이야기가 차분하다. 남편과의 사별이라는 흔들림 앞에서도 감정이 북받쳐 올라오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수면 같다. 이러한 시간이 오기까지 그녀는 홀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냈을까.

이야기는 추억처럼 흘러간다. 함께 했던 매 순간의 모습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해지는 듯하다. 동거를 하고 함께 글을 썼던 시절들. 작가로서의 동질감, 배우자로서의 현실적인 교감들이 그녀의 추억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부부는 함께하는 동안 친구였으며, 세상에 오직 하나만으로 존재하는 서로의 신실한 내 편이었으며, 든든한 아군이었던가 보다. 일흔이 넘은 그녀가 우리에게 풀어내는 잔잔한 고백이 마음을 울린다.

 


그녀에게 있어 남편이 떠나간 빈 자리는 하냥 쓸쓸하다. 어느 이른 아침 봄이 찾아오고 계절의 순환이 멈추지 않아 다시 겨울이 다가오도록, 겨울털로 털갈이를 하는 여우나 너구리 부부, 원숭이 가족 혹은 라임 빛깔로 물들어가는 은행잎을 보는 순간마저도, 그녀는 남편과 함께 했던 순간들을 그리워한다. 그의 빈자리에 조용히 찾아들어 온 고양이를 끌어안고 있어도 그녀의 마음 한편은 늘 조용히 쓰라리다. 그러나 작가 마리코는 그 모든 상처를 침묵하며 끌어안는다.

그런 까닭에 한글자 한글자 마음으로 꼭꼭 눌러 써내려갔을 그녀의 이야기가 마치 차가운 눈처럼 무겁게 다가온다. 침묵의 무게라는 게 이런 것일까.

친정 부모님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동안에도 그랬다. 그녀의 생각 모든 중심에는 남편의 모습이, 안쓰러움과 그리움이 늘 자리한다. 이제 그가 떠난지 일년이 지났다고 하던 그녀의 이야기조차 너무나 덤덤하기만 하다. 문득 생각해보면 여느 사람들처럼 상실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의 요란함으로 마주하기에는, 그녀가 견뎌내고 가슴으로 품어낸 시절의 침묵이 너무 크게 다가오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준비를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상실에 대한 준비? 이별에 대한 마음 준비 같은 거라고 할까. 연로하신 부모님, 남편 혹은 나?(우리는 서로 골골하니 마지막 순간에 대한 생각은 늘 익숙하다) 언젠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런 상황과 마주하게 될 때 대책도 없이 무너져버리는 나를 받아들이기 싫어질 것만 같았다. 내가 어떻게 버티고 있는 걸까. 하루하루 살아가다보면 세월은 가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고도 하는데. 그 순간 무너져버릴 것만 같아 두려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내게 남편은 걱정 마, 당신은 가늘고 길게 살거야, 그리고 내가 먼저 가면 그 다음날 바로 따라와라는 말로 농을 던진다.

 


책을 읽으면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모를 끄적였었다. 애써 지우려고 하지도 말고, 또 지워질까 고민하지도 말고, 그저 남아있는 그리움 그대도 마음에 담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방법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사실 자신이 없다는 말로 부끄러운 고백을 한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다 떠나보내고, 고요한 수면처럼 받아낼 수 있는 성숙함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주변에 흙이 있고, 나무가 있으며, 새가 있는 곳에 가서 살면 좋겠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다. 상실감을 다 채울 수는 없다 하더라도, 의지하며 살아갈 수는 있을 테니 말이다. 마리코에게 정원과 집과 고양이, 그리고 친절한 지인들이 있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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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엘리프 샤팍 지음, 오은경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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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의 세 딸

 


아침에 일어나서 책을 들여다보다가 깨달은 건 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고 썼다가 지운다. 그냥 눈이 좀 따갑고 침침해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며칠 혹사를 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꽤 집중해서 본 책인가 싶다. 엘리프 샤파의 이브의 세 딸이라는 이번 작품. 영광스럽게도 이 책이 내 시력에 문제를 가져다 준 것일까. 그러면, 그렇다면 이 또한 영광이다.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책이니까.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전체적으로 들여다보는 접근법을 써야 할지, 아니면 세부적으로 조목조목 따져 접근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여전히 고민 중이다. 그러나 어떤 접근법으로 들여다보든지 간에 이 책은, 생각할 거리가 충분히 많은 책임에는 분명하다. , 이제 정말 어떤 식으로 이 작품을 이야기해야 하는 게 맞는 것일까. 그냥 생각이 이끄는 대로?

 


소설은 페리라는 한 여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작가는 2016년 이스탄불에 존재하는 페리의 현재와 1980년대 이스탄불이라 불리는 페리의 유년의 과거, 2000년대 그녀의 영국 옥스포드 대학시절의 과거로 교차시키며 이야기를 끌고간다. 어쩌면 일종의 회상이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모든 회상은 짐짓 자리를 잡고 앉아 돌이켜보는 그런 여유로움의 의미가 아니다. 뭐랄까, 훅 달려드는 시간의 충격 같은 이미지들이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미 지워진 것들과의 예기치 않았던 충돌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핸드백을 분실하고 추격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사진 속에 등장하는 한 남자와 세 여자. 이들은 누구이며, 어떤 관계였을까. 왜 주인공 페리는 낡은 사진과 함께 아픈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것일까.

 


기독교와 이교도의 갈등, 문화적 차이, 성적 차별이 가져오는 문제들, 그 안에서 상처받고 숨죽이며 살아가는 존재들은 모두가 같은 인간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을 통해 어쩌면 우리모두가 함께 생각해봐야만 하는 문제들을 수면 위로 떠올리려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지성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는 여전히 인종, 종교, 페미니즘, 정치와 전쟁, 모든 지식과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해 올바른 성토와 토론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다. 과연 지금도 인식의 공감에 의해 이루어지는지 모르겠다.

 


신에 대한 철학이라. 과연 인간은 신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까. 어디까지 그 허락이 인정될 수 있을까. 주인공 페리의 시각과 아주르 교수의 시각은 대립각을 이루는 듯 보인다. 그의 겉모습만 보면 여느 학생들의 시선처럼 피해야 할 인물의 한 사람이라는 선입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건 또다른 백미다. 관점에 따라 그가 비겁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는 신께 용서를 구하고자 했던 인물이다. 신에 대한 철학을 논하는 일은 그가 선택한 하나의 길이었으니까.

 


교수님은 죄책감 없는 사랑을 원했던 거군요.”

아마도.” 아주르 교수가 말했다. “잘 생각해 봐. 너는 하나님의 사과를 기다렸고, 나는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에게 사과할 방법을 찾고 있었어”-p550

 


책을 읽는 동안 문득 아주 오래전에 들었던 어떤 표현이 생각났던 것 같다. 원죄의식. 인간은 모두 그 원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말을 남겼던 교수는 아마 불교신자였지.

우리는 당연히 다양한 종교 안에서 나름의 신념을 갖고 살아간다. 누구는 기독교인으로, 누구는 무슬림으로, 또 누구는 불교도로, 그도 아니면 무신론자로 말이다. 흥미로운 일인 동시에 안타까운 일은 이들 모두가 오묘하게도 각자의 원죄의식을 힘겹게 끌어안고, 자신만의 신념과 현실에서의 부조리 안에서 혼란을 경험한다는 점이다(지나친 확대해석일 수도 있겠다만) 생각해보니 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 결과 때로는 개개인의 삶의 상처와, 크고 작은 사회적 모순을 너무나 쉽게 간과하려는 잿빛 시선만이 만연해지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지켜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가.

 


-이기심과 자신에 대한 불신 때문에 이 재앙을 초래한 오빠에게, 이렇게 되지 않도록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그녀의 부모에게, 다리 사이에서 사람의 가치를 찾는 이 수백 년 된 모호하고 어두운 전통에 대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분노는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p 265-264

 


작품에 대한 개인의 시선이 이렇게나 혼란스럽다. 생각나는 대로 쓰고보니 정리가 잘 되지 않는가보다. 그래도 뭐랄까. 함께 토론해보고 싶은 책이다. 페리와 쉬린 그리고 모나. 우유부단한자, 무신론자, 독실한 신자(p502) 여기 이브의 세 딸들이 있다. 이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초상(肖像)이 아니었을까.

 

 


 

 

신에게서 그토록 많은 것을 배우다 보니

나는 더는 기독교인도, 힌두교도도, 이슬람교도도,

불교도도, 유대교인도 아니다… …

내가 그토록 많은 진리를 깨닫다 보니

나는 이제 남자도, 여자도, 천사도 아니며,

더욱이 순수한 영혼이라고 생각지도 않는다…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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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저문 자리 모란이 시작되면 - 한국의 대표적 서정시인 김소월과 김영랑의 아름다운 시 100편
김소월.김영랑 지음, 최세라 엮음 / 창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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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꽃 저문 자리 모란이 시작되면

 


김소월과 김영랑의 시 모음이다. 시인 최세라가 각각의 작품에 대한 해설과 함께 그녀만의 생각을 보태는 형식이다. 그녀의 작업으로 소월과 영랑의 시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 반가운가보다. 공평하기도 하지. 소월의 시 50편 그리고 영랑의 시 50편을 똑같이 실었다. 그리하여 제목부터 소월의 진달래꽃과 영랑의 모란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그들의 이야기에 심취했었을까. 두 사람의 이야기를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우리는 흔히 익숙한 것들에 더 친근함을 갖는다. 문학()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삶도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을까. 중고등 시절에 교과서에서 봤던 시들이 종종 보인다. 이리 다시 보니 반갑다. 그런데 어쩐지 그 옛날 정해진 그 이미지가 그대로 굳어져 지금도 똑같은 시선으로 소월과 영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빠진 나를 발견한다. 불쑥 자책감이 들기 시작한다.

일종의 선입관일까. 이미 굳어버린 이미지란 것이 이런 것일까. 금모래 강변을 노래하고, 떠나가는 님에게 진달래꽃을 뿌려드리겠다는 소월의 시가, 여성스러움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영랑의 시들은 어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영랑의 작품들은 아는 작품이 거의 없다. 그저 뭐랄까, 방울방울 똑또르르르르. 무언가 매끈하게 굴러가는 듯한 이미지들. 영랑의 작품으로 기억되는 이미지는 밝고 맑은 햇살 한 줌. 혹은 이슬방울 같은 이미지들이었을까.


 

책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품들과 함께 잘 알려지지 않는 작품들까지 소개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기존에 배워왔던, 고착된 두 시인의 이미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될지도 모른다. 차분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연에 대한 예찬, 신실한 사랑, 내면으로의 침잠, 존재의 고독감, 그리고 삶과 죽음, 이별, 식민지 치하에서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소월의 연인이었던 오순. 소월이 시에서 승화하기를 원했던 사랑의 이미지들은 거의 오순과 그 길이 이어졌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참 좋아하던 초혼이란 시가, 그 여인의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최세라의 설명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젊은 나이에 먼저 세상을 등진 부인을 찾아 무덤가에 앉아 상념에 젖는 영랑의 모습도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만 같다.

 


-매 단풍 들겄네가늘게 흔들리는 소리가. 바로 영랑의 누이의 수줍은 듯 맑고 청아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한 것은 내가 너무 심취한 까닭인가. 세상만사 드세고 호되게 혼잡하여도 한순간 마음만은 다 내려놓고 높디 높게 올라설 수도 있구나 싶다.

그러니 두 시인의 이야기처럼 절망 대신 희망을, 고락을 넘어서는 그렇게 누구나 사람다운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말을 지금 이렇게 멎쩍게 하고 싶은가보다. 괜시리. 내가 뭐라고.


 

시를 읽을 때마다 소월과 영랑 이들의 유년이, 젊은 날이, 사랑이, 화사하게 빛나야 했을 아쉬웠던 청춘의 장면들이 연이어 지나가는 듯하다. 만개하지 못한 채 지고 말았을 그런 순간들이다.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두 시인의 시를 품은 이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쓰라리다.

 


이제는 사설이다. 평북 정주가 고향인 소월. 그의 스승 김억 역시 정주가 고향이었다고 하는데, 내게 유독 친근한 시인 백석 또한 이들의 후배였더라. 참 묘한 인연이다. 정주 땅에는 무슨 알 수 없는 신의 정기가 흘러내렸을지도.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고르는데 더 신중했었을까. 어둡고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밝은 울림과 깊이감을 담아내는 작품을 골라본다. 영랑의 작품 마당 앞 맑은 새암을의 전문을 옮긴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김영랑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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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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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김승옥 작가가 직접 작업한 각본이다. 소설 무진기행이 어떻게 시나리오 형식의 옷을 입고 재탄생했을까. 무진기행이라. 기억나는 것은 안개뿐이었다. 책을 사면 구입 년도와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던 때라, 책에는 1996129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글씨는 이렇듯 선명한데 내용은 흐릿하다.


 

책 안개를 읽다보니 소설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시나리오에서는 생략된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해보자. 주인공 윤기준은 서울에서 제약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회사의 어떤 일로 인해 고향 무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여인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이 두 남녀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시나리오 각본상에서는 윤이 안 좋은 일로 인해 고향으로 잠시 피신 아닌 도피를 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소설에서는 일종의 휴가를 내려온 모습이다. 훌쩍 건너뛰어 마지막도 조금 살펴보자. 소설에서의 윤은 다시 자신의 삶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음을 나눈 여자 인숙은 무진과 무진을 둘러싼 안개 속에 남는다. 아니 어쩌면 버려지는 듯한 인상이 더 강하다. 그 와중에 변명 같은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리는 윤이 달리는 버스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면 각본상의 결말은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본상에서는 불쑥 등장하는 경찰들에 의해 서울로 연행? 되는 차 안에서 인숙을 향한 고백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종결을 짓는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 소설과 각본은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 마담의 존재도 그렇고. 두 주인공의 일종의 일탈행위도 그렇다.

 


실은 말이다. 오늘 새벽까지 침대에 누워 고민했던 것은 바로 안개가 갖는 상징적 의미였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짧게 남겼던 메모는 이런 것들이었다.

-안개. 보호막인 동시에 넘어서야 하는 거대한 벽? 짙은 안개로 인해 잃어버린 시야. 그에 대한 안도감? 혹은 불안감의 이중적 감정들. 결국 드러나는 민낯. 자살한 여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

 


윤에게 있어 무진은 어쨌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었든 그는 그 때마다 무진에 들어와 몸을 낮추고 숨결을 고르었으니까. 반면에 무진의 안개에 싸여 사는 이들에게는 벗어나고만 싶은 곳이 바로 무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숙이 서울에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었던 그녀에게 무진은 넘어서야 하는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답답함과 불안감을 주는 곳이 바로 무진이었을까. 이곳저곳 다 돌아다니다 마지막에 무진에 정착했다는 다방 마담의 이야기가 마음을 끌었다. 초반에 등장하는 미친 여자의 에피소드도 그리고 술집 여자의 자살도 그렇고.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주인공 윤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 아니었을까. 시나리오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설에서 그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글들을 말이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접어든 우산에 묻은 물을 휙휙 뿌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p140


 

소설에서 주인공 윤이라는 인물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지만, 각본에서는 인숙의 심리와 내면의 것들을 더 집요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윤과 인숙이 주고받았던 대화는 각본상에서만 볼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과 각본이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약간의 차이인데 무엇에 더 중점을 두었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개는 위험하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안개는 안전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안개의 위험성과 안전함을 논하는 것은 상황과 성향에 따라 달라질 법하다. 이들에게 있어 안개는 어떤 존재였을까. 윤기준과 하인숙, 마담과 다른 인물들에게 있어 안개를 몰고 오는 무진은 어떤 곳이었을까.


 

작가 김승옥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서울·1964년 겨울을 가장 아끼는가 싶다. 무진기행이든, 1964 겨울이든 내가 찾았던 것들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시대적 상황과 함께 인물의 내적 고뇌와 자괴감이 어떤 형식으로 펼쳐지며 또 어떻게 치유되는가? 라는 부분들이라고 할까. 작가의 시선은 무척이나 섬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분함을 잘 유지하는 듯하다.

 


사설이다. 불쑥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이 생각난다. 천지간이 연상되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익숙한 어떤 것들. 익숙했으나 결국 낯선 것이었던 그 무엇들. 이 모든 것들은 늘 함께 공존하는가 보다.


 

---일상적인 생활이 난파할 때, 때때로 우리는 그 장소로 간다. 즐거운 듯한, 쓸쓸한, 그리고 무의식의 내면 속에서 무진의 안개는 피어오르는 것이다----p7

(이어령의 무진기행 평론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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