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개


 

김승옥 작가가 직접 작업한 각본이다. 소설 무진기행이 어떻게 시나리오 형식의 옷을 입고 재탄생했을까. 무진기행이라. 기억나는 것은 안개뿐이었다. 책을 사면 구입 년도와 날짜를 적어두는 습관이 있었던 때라, 책에는 1996129일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글씨는 이렇듯 선명한데 내용은 흐릿하다.


 

책 안개를 읽다보니 소설 무진기행을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시나리오에서는 생략된 연결고리를 찾고 싶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간략하게 줄거리를 이야기해보자. 주인공 윤기준은 서울에서 제약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일하다가 갑자기 회사의 어떤 일로 인해 고향 무진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여인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전반적인 스토리는 이 두 남녀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다.

 


시나리오 각본상에서는 윤이 안 좋은 일로 인해 고향으로 잠시 피신 아닌 도피를 한 듯한 인상을 주지만, 소설에서는 일종의 휴가를 내려온 모습이다. 훌쩍 건너뛰어 마지막도 조금 살펴보자. 소설에서의 윤은 다시 자신의 삶 속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마음을 나눈 여자 인숙은 무진과 무진을 둘러싼 안개 속에 남는다. 아니 어쩌면 버려지는 듯한 인상이 더 강하다. 그 와중에 변명 같은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리는 윤이 달리는 버스에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면 각본상의 결말은 소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각본상에서는 불쑥 등장하는 경찰들에 의해 서울로 연행? 되는 차 안에서 인숙을 향한 고백의 상황이 벌어지면서 종결을 짓는다. 작가의 의도에 의해 소설과 각본은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 마담의 존재도 그렇고. 두 주인공의 일종의 일탈행위도 그렇다.

 


실은 말이다. 오늘 새벽까지 침대에 누워 고민했던 것은 바로 안개가 갖는 상징적 의미였었다. 잊어버리기 전에 짧게 남겼던 메모는 이런 것들이었다.

-안개. 보호막인 동시에 넘어서야 하는 거대한 벽? 짙은 안개로 인해 잃어버린 시야. 그에 대한 안도감? 혹은 불안감의 이중적 감정들. 결국 드러나는 민낯. 자살한 여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

 


윤에게 있어 무진은 어쨌든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마지막 보루 같은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었든 그는 그 때마다 무진에 들어와 몸을 낮추고 숨결을 고르었으니까. 반면에 무진의 안개에 싸여 사는 이들에게는 벗어나고만 싶은 곳이 바로 무진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숙이 서울에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사랑을 찾고 싶었던 그녀에게 무진은 넘어서야 하는 벽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는 안정감을 주고 또 누군가에게는 답답함과 불안감을 주는 곳이 바로 무진이었을까. 이곳저곳 다 돌아다니다 마지막에 무진에 정착했다는 다방 마담의 이야기가 마음을 끌었다. 초반에 등장하는 미친 여자의 에피소드도 그리고 술집 여자의 자살도 그렇고.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는, 주인공 윤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치들이 아니었을까. 시나리오에는 보이지 않지만 소설에서 그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글들을 말이다.

-갑자기 나는 이 여자가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아프긴 하지만 아끼지 않으면 안 될 내 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나는 접어든 우산에 묻은 물을 휙휙 뿌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다.-p140


 

소설에서 주인공 윤이라는 인물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었지만, 각본에서는 인숙의 심리와 내면의 것들을 더 집요하게 보여주는 듯하다. 윤과 인숙이 주고받았던 대화는 각본상에서만 볼 수 있는데, 이 대목에서 작가의 의도대로 소설과 각본이 서로 다른 방향성?을 갖는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약간의 차이인데 무엇에 더 중점을 두었는가에 대한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안개는 위험하다? 과연 그럴까. 어쩌면 안개는 안전한 무엇인지도 모른다. 안개의 위험성과 안전함을 논하는 것은 상황과 성향에 따라 달라질 법하다. 이들에게 있어 안개는 어떤 존재였을까. 윤기준과 하인숙, 마담과 다른 인물들에게 있어 안개를 몰고 오는 무진은 어떤 곳이었을까.


 

작가 김승옥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진 못했지만, ‘서울·1964년 겨울을 가장 아끼는가 싶다. 무진기행이든, 1964 겨울이든 내가 찾았던 것들은 이런 부분들이었다. 시대적 상황과 함께 인물의 내적 고뇌와 자괴감이 어떤 형식으로 펼쳐지며 또 어떻게 치유되는가? 라는 부분들이라고 할까. 작가의 시선은 무척이나 섬세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차분함을 잘 유지하는 듯하다.

 


사설이다. 불쑥 윤대녕의 소설 천지간이 생각난다. 천지간이 연상되는 건 조금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그렇다는 말이다. 낯선 것 같으면서도 익숙한 어떤 것들. 익숙했으나 결국 낯선 것이었던 그 무엇들. 이 모든 것들은 늘 함께 공존하는가 보다.


 

---일상적인 생활이 난파할 때, 때때로 우리는 그 장소로 간다. 즐거운 듯한, 쓸쓸한, 그리고 무의식의 내면 속에서 무진의 안개는 피어오르는 것이다----p7

(이어령의 무진기행 평론 중에서 인용)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