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원고지 -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2000~2010 창작일기
김탁환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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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두 번째 서평

김탁환의 원고지-김탁환




작가는 인간애를 통해 성장한다




11월 18일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먹색으로 가라앉아있고 건물들은 우중충하니 무거워 보인다. 건물이 무거워 보인다는 표현은 비문이겠지. 이를테면 습기를 잡아먹는, 물을 좋아한다는 거대 하마의 하소연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음습한 회색의 빛깔과 눅눅한 공기가 정말 싫다는 투정이 들리는 듯하다. 건물과 하마라.

어쩌면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작가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온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반 즈음 작가들의 일기를 묶어낸 책을 본적이 있었을 때도 그랬던가 싶다. 누군가 말했다. 아니 물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의아해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비밀스런 일기를 책으로 낸다 말인가, 라는 의구심과 질문들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그 사람의 눈빛이 기억난다. 왜일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지금은 저 세상으로 돌아간 작가들과, 사람들의 시선에 머물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잊혀져갔던 낯선 그네들의 미풍처럼 잔잔한 이야기가 담긴 그 책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그 대신 소설가 김탁환의 일기를 모은 책이 곁에 있다.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글쟁이도 역시 노동자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예술에 있어서도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한데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시각적 요소에 많은 부분을 치중해서 창작되어지고 이어지는 예술장르에 비해 글이라 이름 붙여진 장르는 다소 그 느낌이 다른 듯하다. 마치 헐거운 벨트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꼭 조여지지 못한 채 약간은 헐거운 여유분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을 여백이라 할 수 있을까. 숨이 막힐 듯 조여드는 것 같은 세상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나름의 여유분을 확보하는 것. 비단 글을 쓰는 이들에게만 적용될 것은 아니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작가들이 갖는 그 여유와 공백에 대해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김탁환 그의 글은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거나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깔끔하다. 작가 스스로 형식에 얽매이는 글 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글을 쓰고 싶다했던 그 고백처럼 그의 글은 담백한 맛이 우러난다.

2000년에서 시작된 십년의 기록이다. 교수의 자리에서 학생들과 교류하며, 창작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여행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엮어나간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까. 작가도 사람이다, 라는 말에 집중하는 것이다. 작가가 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절절하게 알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지 싶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인내와, 번민과 고통이 정신적 노동의 흔적으로 혼잡하지만 작가 김탁환 그는 시종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책을 통해 만난 그는 단 한번도 복잡하고 버거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놓고 흔들리는 법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늘 자아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용기를 주고, 때로는 다그치고, 때로는 위로를 한다. 언제나 자아를 다스릴 줄 아는 힘을 지녔다.




소설가가 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된다고 했던가. 시인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심상에 의해 창작을 하는데 반해, 소설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집을 지었다 허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학생시절 나는 책상 앞에 스스로에게 부탁하는 요구사항을 붙여놓곤 했다. 이를테면 가능하면 아주 천천히 갈 것, 조급증을 버릴 것 등등. 늘 쓰다보면 호흡이 가쁘고 뭔가에 쫒기듯 써나가는 습관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동기의 집에 갔을 때도 동기가 벽에 써놓았던 문구를 본적이 있었다. 그 역시 스스로에게 압력?을 주는 몇가지 주문을 적어놓고 있었다.




반가웠던 것 같다. 책 속에서 끊임없이 보았던 ‘자기주문(자기 최면)의 문장’들이 정말 반가웠다. 비단 소설이 아닌 사소한 작은 글을 쓸 때에도 자기주문은 역시나 필요한 듯하다. 주문에 의해 글에 끌려가지 않고, 글을 끌고 갈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오래전에 했었지만 지금은 어중강한 중간자의 입장에 머물러 버렸다. 끌려가든지 이끌든지 간에 무언가 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거품을 문다.




책 안에는 작가가 스스로 배우고자 하고, 알고자 했던 또는 얻고자 했던 것들을 위한 책과, 영화,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이 기록되어있다.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어쩌면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간과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부지런하다. 부지런해야 글을 쓴다는 말이 정답인 듯하다.

간간이 엿보았던 그의 사상과, 전반적으로 풍겨지는 작가 김탁환의 ‘작가적 인간애’에 부담 없이 젖어 들어갈 수 있는 책이다.




 퇴고라는 빙하에 부딪혀 늘 허우적거리면서도 결코 좌초하지 않는 작가의 고뇌가 가득한 책 ‘김탁환의 원고지’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인식되어진다는 그 생각을 다시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새는 창공을 날수 있는 존재이며 아프락사스가 갖는 이상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집중하고 또 집중해도 성취가 어려운 것이 예술이다. 잡념을 버리고 문장 하나하나에 뛰어들 것. 이 안에서 행복을 찾을 것.”

                                           p267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주문에 걸려든다. 걸려들고 싶다. 욕심이다.

하늘이 엷게 묽어져간다. 눈은 아니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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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에 매혹되다 - 한시에 담긴 옛 지식인들의 사유와 풍류
김풍기 지음 / 푸르메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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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한번째 서평

옛시에 매혹되다-김풍기 지음




한시 속에 담긴 정서




한시를 소개한 책이다. 시기는 고려와 조선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부수적으로는 중국의 작품들까지 각각의 주제에 맞는 한시를 소개하는 형식이 이어진다. 어느 한 주제를 소개함에 있어 앞부분과 뒷부분에는 에세이 형식의 그것처럼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간다.

한권의 책으로 그를 다 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분명 그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이번 책 ‘옛시에 매혹되다’ 초반부에서 그렇게 많이 설명하고, 주지시키려 노력했던 ‘풍류’와도 연관성이 있어보인다. 결과적으로 한시는 풍류와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까.

풍류에 너무 연연해 한다는 인식을 받았던 것 같다. 김풍기가 풍류에 대해 그것도 한시를 거론하는 책의 맨 앞장에 떡하니 자리를 준비한 까닭에 대해 생각한다. 한시와 풍류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풍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고 이해하려 한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고 해석했던 부분에서 배운 정보를 종합해보면 그렇다. 그 말끝에 춤과 노래, 절대적 풍경과 감상 또는 인간과 술에 대한 감상 따위를 붙여볼 수 있을 듯하지만, 기실 이 모든 것을 다 끌어안는 것이 언어적 표현의 풍류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단순히 예술의 어떤 분과를 지적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러한 것들이 어우러져서 만들어내는”...... p21




한시를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류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우선순위일 듯싶다. 분격적인 운동에 앞서 하는 준비운동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적절하지 못한 비유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쨌든 풍류를 받아들일 자세를 위해 준비를 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책 속에는 모두 열 입곱개의 주제에 의해 다양한 한시들이 소개된다. 내용은 옛 문장에서 자주 만나보았을 법한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 까닭에, 읽는 이로 하여금 그다지 큰 어려움은 느껴지지 않는 듯하다. 옛 조상들이 일상에서 느끼고 실천했던 대소사와 관련한 일들하며, 그 가운데 함께 했던 책, 자연, 계절, 세월의 무상함과 같은 이야기가 비교적 섬세하고 자세한 풀이를 빌려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이 책의 큰 장점은 지나치게 학문과 전문성에 치우쳐 다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한시의 분야를 부담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차분하게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줬다는 데 있다는 생각을 갖는다. 지은이 김풍기식의 글쓰기의 매력인가보다.

다만 고전을 비롯해 한시를 읽는 이유를 굳이 설명하려드는 그에게는 마치 어떤 완벽성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글을 읽고 난 후의 변화를 촉구하는 그만의 고집이 그것이다. 책 한권을 읽는 동안 자주 그런 분위기를 접할 수 있었는데, 그가 갖는 여유로운 사고에서 발현하는 글쓰기와는 다소 상반된 시각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역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자신의 생각에 변화가 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일까. 뒷부분에서 다소 유한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정서적 교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옛 선조들의 삶을 공간적 배경에서 조금이라도 가깝게 느껴보기 위해서일까. 장마라든지, 외지의 고독한 변방이라든지, 대나무 숲, 산과 정원, 은거와 같이 열거하고 있는 장소나 소재에서 풍겨져 나오는 분위기는 자못 비슷하다.

또한 지은이 김풍기가 소개하는 작품들은 시어나 표현에서도 감각적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암울한 것을 끝간데없이 한스럽게만 서글퍼 하지 않았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일종의 비유와 상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를테면 장마의 정치적 우의라든지(벼슬살이 길은 칠월이라 진흙탕으로 어려운 걸....최립, 문수사스님의 시권에 차운하다p218),병의 상징적 의미와도 일맥상통했던 부분이다.(병이라 해서 모든 병이 몸의 쇠락과 함께 하는 것은 아니다...p187)




 사회적 정치적 일사를 직설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어떤 심상이나 느낌에 있어 그것과 자연현상과 더불어 개인의 상황으로 절묘하게 동일시하면서 작품성을 완성시켜가는 한시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책을 읽는 내내 큰 즐거움으로 함께 했던 시간이다.




생각해보면, 위장약보다야 한시 한수 읽어내는 일이 더 좋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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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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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여든 번째 서평

한권의 책-최성일 지음




사라짐 혹은 남겨짐




 저자 최성일은 지난 7월에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고인이 되었다고 했다. 만일 그가 지금도 여느 때처럼 우리와 같은 시공간의 평범한 삶 속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있다면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까. 세상에는 작가들도 많고, 예술가들도 많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그도 역시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고, 글 쓰는 많은 이들 중에 한명이었다.

 처음 그의 부인이 기록한 ‘머리말을 대신하여’는 슬펐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에 대한 첫인상은 슬픔이었다. 그에 반해 그가 남긴 글들은 슬픔 따위는 훌쩍 집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바닥을 탈탈 털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서오는 듯한 이미지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으며, 논리적이다. 그리고 다분히 비판적이며 분석적이다. 그가 남긴 “한권의 책”안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책들이 소개되고 있다. 문학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인권에 이르기까지 저자 최성일의 관심사는 한계도, 그 어떤 경계나 국경도 없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두루두루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지난 7월에 뇌종양으로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나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 나이는 8살 차이가 난다. 전공도 다르고 살아왔던 모습도 다르다. 그가 매일같이 책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어쩌면 긴 시간동안 의도적으로 책을 멀리했고, 질긴 목숨줄 끊어질까 부들부들 떨면서 의료사고를 겪으며 아이들을 낳고, 기저귀를 갈면서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별로 눈에 드러나지도 않는 살림이라는 일거리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책 속에서 그가 살아나와 아주 오래도록 같이 이야기하고, 토론을 하며 생각을 교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득 생각하기를 근래 들어 비평책을 읽고 싶어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논리적이며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그 어떤 것에 목말라했던 것 같다. 특별난 것 없이 그냥 겉옷만 소설의 장르를 빌려온 글을 접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구심에 약간의 개인적인 분노가 일었다.

어쩌면 최성일 그였다면 직설적으로 재미없었다, 라고 했을 법하다. 가식 없이 솔직한 그의 글쓰기는 냉정하면서도 정감어리다. 모순일까. 하지만 책속에는 분명 그 두 가지가 공존한다. 어느 때는 따뜻하고 애정이 담긴 중년의 평범한 이웃아저씨의 모습이, 또 어느 때는 전쟁터에 홀로 고독했던 잔다르크 같은 어느 지식인의 치열하고도 지적인 고뇌가 담긴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내가 써왔던 글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 늘 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접하고 나서 글을 쓸 때는 항상 고민한다. 잘 돌아가지 않는 뇌세포에 기름칠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삑삑 소리가 나며 더딘 움직임으로 속터지게 천천히 움직이는 톱니들처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느 지인이 말하기를 그냥 써라! 했다. 생각이 많으면 쓰기도 어렵다고 했다. 나는 무슨 좌우명처럼 그 말을 늘 중얼거린다. 하지만 쓰다보면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고, 다 쓰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생각들과 전투를 벌인다. 삭제하고 다시 쓰고, 다시 삭제하고, 문장 배열을 바꾸고.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흰머리가 느는가보다.

하지만 역시나 그냥 써라!는 말은 명언이었다. 한권의 책 속에 담긴 저자 최성일의 기록들을 통해서도 나는 그 말을 다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정말이지 무섭게 냉정하지만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늘 꼬리표처럼 물고 늘어져 왔던 내 의식구조에 광명을 아리는 범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소소하게는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의 활용이라든지, 인용구절을 표기하는 기호의 쓰임과 더불어 문장 안에 인용부분을 삽입할 때의 그 정확성 따위도 눈여겨 본 듯하다.

그가 오래도록 글을 쓰면서 몸으로 익혀왔던 많은 요소들을 책을 통해 살짝 엿본 듯한 기분이다. 이를테면 인용에 있어서나, 따옴표에 활용에 있어 다소 중구난방식으로 사용했던 내 기록물과 비교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헤르만헤세의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편에 대한 기록에서 ‘진정한 책 읽기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또한 ‘재판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다’라는 부제목 아래 마이클 리프, 미첼 콜드웰의 [세상을 바꾼 법정]과 쿠르트 리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기록물은 오래도록 생각을 이어가게 했던 부분이다.




굳이 서평이라는 표현은 하지 말자. 그냥 글이다. 책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또는 주장하고 싶은 어떤 것들의 실체다.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하고 쉽게 글을 쓸 때 미리보기처럼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착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남긴 기록물처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써야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쁜 맘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참조할 수 있겠다싶어 하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먼 하늘 위로 공기와 공기 사이를 가볍게 유영하며 없어진 육신을 대신에 강렬한 정신으로 아직도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어떤 존재도 영원성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분명 남겨지는 것 역시 존재하는가보다. 책 속에서 번역을 하시던 사촌오라버니의 함자를 찾았다. 가뭄에 콩나듯 소식을 주고받는 관계이긴 하지만, 편지 쓸 구실을 하나 찾은 듯 반가워진다.

오늘 기록은 자유롭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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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네 시의 루브르
박제 지음 / 이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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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아홉 번째 서평

오후 네 시의 루브르-박제




루브르 속에 숨겨진 인간군상




그림을 많이 알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구경하는 것은 좋아하나보다. 말 그대로 그냥 구경   말이다. 그림과 관련된 책을 보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는 듯하다.

시기별로 유행을 하던 총체적인 예술(미술)사조는 비단 미술에서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묘한 끌림이 작용한다. 모든 예술이 인간의 삶을 반영한다는 것은 이미 느껴왔지만 특히나 이번에 접하게 된 책 ‘오후 네시의 루브르’를 통해서 다시 확인했던 부분이다. 미술사에서 드러나는 작품들이 당대를 살았던 인간군상과 각각의 존재론적 삶의 방식에 대해, 구체적 형식(그림 속에 담긴 풍자와 비판)을 빌려 현실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담아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던 것 같다. 어쩌면 미술사조를 알고, 화가의 이름을 아는 것보다도 더 가치 있는 일이 아닌가.




참 많은 화가와 작품들이 등장한다. 대충대충 읽으면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그 사람의 작품이 이 사람의 작품처럼 혼돈이 와 갈피를 잡지 못할 듯하다. 책은 이를테면 독특한 양식에 의해 구별되었던가? 아니면 시대적 흐름에 의해 구별되었던가? 물론 이 양자의 구분에 의한 구별방법도 같이 동참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자 박제의 이야기 흐름이 ‘명확한 주제의식’에 의해 구분되고 있다는데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독자가 책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그림과 화가, 다양한 사조를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걱정할 것은 없다. 단지 저자가 마련해놓은 각각의 특색 있는 방으로만 발을 들여다 놓으면 될 일이다.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역시나 부담 느낄 필요가 없다. 까닭인 즉,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귀를 기울이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단 한가지 꼭 한가지 덧붙일 것은 눈을 뜨고 귀를 여는데서 그치지 말고 가슴을 열어두라는 점이다.

그림은 비단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는 장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뚱딴지같은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한권의 책이 내포하고 있는 것이 바로 눈과 가슴으로 읽어내는 미술세계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루브르에서 만난 그림들을 다섯가지 테마로 구분한다. 그 첫 번째가 초(肖)다. 즉 초상화다. 그리고 차례대로 속(俗), 풍(風), 성(性), 성(聖)이 뒤따른다. 풀이를 하자면 세속적인 부분, 세파와 관련된 풍속화 부분, 남녀 간의 성을 다룬 부분과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차원에서 다룬 부분으로 나눈다. 이 다섯가지의 주제는 저자 박제에 의해 임의로 구분된 주제이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을 전체적으로 관조할 때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포함되는 요소라고 볼 수 있지 않은가. 우리들 인간의 삶은 화폭에 담겨지는 무한 색조의 그것처럼 그 자체만으로도 총천연색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작품이다.




화가는 단순히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아니었던가. 나는 불쑥 그런 생각을 해본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 그림이라 생각했던 좁은 소견일랑 버려야 할까보다. 적어도 책을 통해 저자 박제가 소개하는 화가들을 접하면서 나는 화가라는 표현이 지니는 사전적 의미에 다른 이미지를 가져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화가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인간의 삶 속에서 사건과 사건, 반목과 화해, 불규칙적이며 예상하거나 혹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인간존재의 수많은 감정들을 담아내는 숙련된 기술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거친 세상을 그리다’라는 부제목 아래 풀어나간 저자의 험한 세상과 인간의 적응도를 이야기하는 곳에서 집중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실존이다. 숨기고 있으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안에 잠재하는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대목이다. “사기도박꾼”에 대한 스토리는 이미 언론에서 여러 번 다룬 작품이다. 하지만 매번 들여다봐도 흥미 있는 부분이다. 같은 맥락 안에로 묶여진 [점쟁이]라는 작품과 [술 마시는 여자] 역시 시선을 오래 붙잡는다. 일상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억측이기는 하겠지만 삶에서 드러나는 속고 속이는 리얼한 인간의 속내를 접하는 일은, 그림이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뒷받침해준다는 생각을 재차 확인하게 되는 부분이다.

[피터르 더 호흐]의 “술 마시는 여자”는 술집 잡부를 그린 작품이다. 손님이 건네는 술을 받아마시는 여인의 모습은 자포자기라는 느낌을 풍긴다. 그림에서 한없는 연민의 감정이 흐른다. 참 사는 게 피곤하다는 말, 결코 쉽지 않다는 말이 그림 한 장에 여가없이 녹아드는 듯하다.




저자 박제는 달변가다. 무엇보다도 감각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성(性)“저항할 수 없는 유혹을 그리다” 편에서 드러나는 그의 표현력은 뭐라고 할까. 묘한 매력이 도사리는 듯하다.

책은 구체적이며 사실성 있는 묘사와 설명이 이어지는 동시에, 작품과 생존했던 화가의 생몰연대, 그들의 작품과 시대적 흐름과 미술사적 연대기까지 서로 비교하며 분석하는 저자의 성실한 해설이 미술에 문외한인 나 같은 이들에게는 무한 정보의 보고처럼 보인다.




다만, 모든 예술은 정답이 정해져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본다. 예술은 언제나 재창조될 수 있으며, 다양성과 개방성이 함께 뒤따라야 가치가 살아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한편의 예술작품에 대한 견해는 다양해야 한다는 투정을 부리고만 싶어진다.




그가 책 어딘 가에도 밝힌바 있듯이 하나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어떤 관점에서 판단하는가에 따라 전혀 색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데 요점이 있다.

친절한 그의 설명에는 백프로 전염성이 존재한다. 매혹적인 전염성이다. 하지만 이 전염성이 갖는 위험수위를 넘어, 내 시선에서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내가 느끼고 이해하는 작품이 분명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각설하고 생에 있어 루브르를 갈수 있을지는 미지수겠지만, 직접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책인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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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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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일흔여덟번 째 서평

난설헌-최문희




난설헌. 눈이 내리는 그 집에 난초로 피어나다.




자동차로 한 삼십분쯤 가는 거리일까.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있지 않다는 후문을 듣고나서는 더 자신이 없어졌다. 진입로를 찾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도 아니고 먼 타지방도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인접한 곳에 허초희 그녀가 두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있다. 원래는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는 설도 있고, 고속도로 확장으로 묘를 이장했다는 설도 들었다.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두 다리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가고 싶은 욕심이 사그라지지 않을 뿐이다. 언젠가는 운전대를 잡은 그를 잘 설득해 허초희에게 갈수 있지 않을까.




노년의 소설가에 의해 그녀가 다시 세간의 시선 한가운데 서게 됐다. 잘된 일인가 싶으면서도, 딴은 불쑥 이렇게 뭍사람들이 쳐놓은 그물 안에 다시 걸린 듯한 그녀가 측은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잘된 일이다 싶다. 여성학 수업을 들을 때도,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며 배울 때도 한편으로는 허난설헌, 허초희에게로 모아지는 생각들은 늘 겹쳐지곤 했었다.

소설을 통해 본 그녀의 일생사가 내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런데 참 마음이 아리다.

작품 속에서 살아나는 주인공 허초희의 이야기는 결혼식을 바로 직전에 앞둔 15세의 소녀 초희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결혼과 시집살이. 특히나 유별난 시어머니, 자상하지 못한 남편과의 관계와 관계 속에서 치이고, 베이고, 나뒹굴면서도 처연함을 잃지 않는 심지가 곧은 여성으로 그려진 허초희를 만나는 일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같은 여자라는 자리에서 많은 부분 생각을 늘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는 이런 것이다. 역사상 실존하는 인물이긴 했으나 조선이라는 시대상과 여성이라는 신분적 제한에 등 떠밀려 활짝 개화하지 못한 채 시들어가야 했던 한 여성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새롭게 딴은 진지하게 접하게 되는 기회로서 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약하고 청초한 이미지(소설 속에 나오는 허초희의 이미지)의 여성이 남긴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거의 긍정적이긴 하지만 딴은 규방가사 형식으로 한정, 아녀자의 한풀이 식으로 그 한계와 가치를 일찌감치 규정해버리고 비하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던 이는 분명 남성이지 않았을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초희의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상’이란 것에 대해 매달리게 된다. 글이란 감각이 살아있어야 그 생명력이 움튼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감각이 무디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각, 느낌들, 그리고 마음에 왔다가는 심상에 의해 처음이라는 무언가의 시동이 걸리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감정의 동요를 격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교적 담담하면서도 심상 한 가운데에 그늘을 이고 있다. 글이 글을 쓴 이의 성격을 말해준다 했던가. 허초희의 성격이 아마도 외유내강의 그것과 닮았던가 보다. 그렇긴 해도 두 아이를 먼저 보내고 나서 쓴 시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작가 최문희의 소설 난설헌은 잊혀져 있던 조선의 한 여성을 무한 시간의 공간을 에돌아 바로 우리 곁에 데려왔다. 소설로만 봤을 때, 무엇보다 유려한 문장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문장이 곱다. 고유어인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때문에라도 작가의 의도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버성기다, 자릿하다, 나무 간살이 날렵하다, 어깨를 응숭거리다,

끼무룩 정신을 놓을 뻔했다, 비명을 사려물었다.

휘움한 어둠살이 고운 먼지때처럼 묻어있다, 돌올한 분위기,

홀로 무언가를 참따랗게 지키고 서 있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 세밀한 신경을 써서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눈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책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흠이라면 흠일까. 아무리 좋은 표현도 너무 자주 등장하면 식상할 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문장에서 “밤의 한허리가 훠이훠이 넘어가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허리를 넘어가다는 표현이 소설 한권에 몇 번인가 재차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가. 키가 크고 맵시가 있다는 표현에서 ‘낭창’이라는 단어도 자주 보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접하면서 초반에 우울했던 까닭은 어쩌면 지나친 복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난설헌, 허초희의 삶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알려져 있다. 뭐라고 할까. 순탄치만은 않았던 삶의 단면들을 소설은 시종 무거운 마음으로 열어가고 있었다. 지나친 복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폐백으로 비단 옷감을 도둑맞고, 지붕위에서 벌어졌던 일들(구체적으로 소설 속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에피소드가 아닌지)하며 함이 들어오는 날과 결혼식이 있던 날의 궂은 날씨들 하며 소설의 초반은 온통 복선과 암시로 이루어져 있다. 시어머니가 거울을 깨는 행위도 그것이 앞으로의 주인공의 삶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불러들이는데 아무 확실한 몫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많은 복선으로 인해 소설의 기대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딸을 연이어 앞세우고 홀로 남은 어미의 심정에 동화되었는가 싶다. 무겁고 쓰리고 아리다. 속이 쓰리다.




사설 중에 사설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예전에 무얼 했는지 상관없이 다 똑같아진다는 말’은 내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문득 그 말이 생각이 나더란 말이다. 아직까지도 도도한 며느리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계시니, 혹여 어머니도 책을 좋아하는 며느리보다 애교 많고 붙임성 좋은 며느리가 더 좋으신 것은 아니었을까. 초희는 먼 하늘에서 살던 이고, 어머니와 나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부족한 애교는 마땅히 늘려야 하지 않은가. 어느 시대나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한 법인가보다.  

2011년 11월 6일 늦은 밤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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