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
최성일 지음 / 연암서가 / 2011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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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여든 번째 서평

한권의 책-최성일 지음




사라짐 혹은 남겨짐




 저자 최성일은 지난 7월에 세상을 등졌다고 했다. 고인이 되었다고 했다. 만일 그가 지금도 여느 때처럼 우리와 같은 시공간의 평범한 삶 속에서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있다면 그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을까. 세상에는 작가들도 많고, 예술가들도 많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 그도 역시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명이었고, 글 쓰는 많은 이들 중에 한명이었다.

 처음 그의 부인이 기록한 ‘머리말을 대신하여’는 슬펐다. 내가 알지 못하는 그에 대한 첫인상은 슬픔이었다. 그에 반해 그가 남긴 글들은 슬픔 따위는 훌쩍 집어 쓰레기통에 버리고 손바닥을 탈탈 털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서오는 듯한 이미지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으며, 논리적이다. 그리고 다분히 비판적이며 분석적이다. 그가 남긴 “한권의 책”안에는 정말이지 다양한 책들이 소개되고 있다. 문학과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인권에 이르기까지 저자 최성일의 관심사는 한계도, 그 어떤 경계나 국경도 없어 보였다. 그는 모든 것을 두루두루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지난 7월에 뇌종양으로 삶을 마감하기 전까지 나는 그와 동시대를 살았다. 나이는 8살 차이가 난다. 전공도 다르고 살아왔던 모습도 다르다. 그가 매일같이 책과 씨름하는 동안 나는 어쩌면 긴 시간동안 의도적으로 책을 멀리했고, 질긴 목숨줄 끊어질까 부들부들 떨면서 의료사고를 겪으며 아이들을 낳고, 기저귀를 갈면서 아이들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고, 별로 눈에 드러나지도 않는 살림이라는 일거리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책 속에서 그가 살아나와 아주 오래도록 같이 이야기하고, 토론을 하며 생각을 교환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득 생각하기를 근래 들어 비평책을 읽고 싶어했다는 것을 상기한다. 논리적이며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그 어떤 것에 목말라했던 것 같다. 특별난 것 없이 그냥 겉옷만 소설의 장르를 빌려온 글을 접하면서, 도대체 우리가 이 소설을 통해 이야기할 것이 무엇인가, 라는 의구심에 약간의 개인적인 분노가 일었다.

어쩌면 최성일 그였다면 직설적으로 재미없었다, 라고 했을 법하다. 가식 없이 솔직한 그의 글쓰기는 냉정하면서도 정감어리다. 모순일까. 하지만 책속에는 분명 그 두 가지가 공존한다. 어느 때는 따뜻하고 애정이 담긴 중년의 평범한 이웃아저씨의 모습이, 또 어느 때는 전쟁터에 홀로 고독했던 잔다르크 같은 어느 지식인의 치열하고도 지적인 고뇌가 담긴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그가 남긴 기록들을 통해 내가 써왔던 글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 것 같다. 늘 쓰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책을 접하고 나서 글을 쓸 때는 항상 고민한다. 잘 돌아가지 않는 뇌세포에 기름칠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삑삑 소리가 나며 더딘 움직임으로 속터지게 천천히 움직이는 톱니들처럼 시간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 어느 지인이 말하기를 그냥 써라! 했다. 생각이 많으면 쓰기도 어렵다고 했다. 나는 무슨 좌우명처럼 그 말을 늘 중얼거린다. 하지만 쓰다보면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고, 다 쓰고 나서는 본격적으로 생각들과 전투를 벌인다. 삭제하고 다시 쓰고, 다시 삭제하고, 문장 배열을 바꾸고.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버린다. 그래서 흰머리가 느는가보다.

하지만 역시나 그냥 써라!는 말은 명언이었다. 한권의 책 속에 담긴 저자 최성일의 기록들을 통해서도 나는 그 말을 다시 배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정말이지 무섭게 냉정하지만 탁월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형식에 얽매일 필요가 있는가. 라는 생각이 늘 꼬리표처럼 물고 늘어져 왔던 내 의식구조에 광명을 아리는 범종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소소하게는 큰따옴표와 작은따옴표의 활용이라든지, 인용구절을 표기하는 기호의 쓰임과 더불어 문장 안에 인용부분을 삽입할 때의 그 정확성 따위도 눈여겨 본 듯하다.

그가 오래도록 글을 쓰면서 몸으로 익혀왔던 많은 요소들을 책을 통해 살짝 엿본 듯한 기분이다. 이를테면 인용에 있어서나, 따옴표에 활용에 있어 다소 중구난방식으로 사용했던 내 기록물과 비교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헤르만헤세의 [헤르만 헤세의 독서의 기술]편에 대한 기록에서 ‘진정한 책 읽기에’ 많은 공감을 하게 된다. 또한 ‘재판을 통해 역사를 바라보다’라는 부제목 아래 마이클 리프, 미첼 콜드웰의 [세상을 바꾼 법정]과 쿠르트 리스의 [악법도 법이다]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기록물은 오래도록 생각을 이어가게 했던 부분이다.




굳이 서평이라는 표현은 하지 말자. 그냥 글이다. 책을 통해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또는 주장하고 싶은 어떤 것들의 실체다. 글을 쓰기 위한 하나의 거대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단순하고 쉽게 글을 쓸 때 미리보기처럼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착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그가 남긴 기록물처럼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써야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쁜 맘으로 감사한 마음을 담아 참조할 수 있겠다싶어 하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그가 먼 하늘 위로 공기와 공기 사이를 가볍게 유영하며 없어진 육신을 대신에 강렬한 정신으로 아직도 머물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 어떤 존재도 영원성을 갖지는 못한다. 그러나 분명 남겨지는 것 역시 존재하는가보다. 책 속에서 번역을 하시던 사촌오라버니의 함자를 찾았다. 가뭄에 콩나듯 소식을 주고받는 관계이긴 하지만, 편지 쓸 구실을 하나 찾은 듯 반가워진다.

오늘 기록은 자유롭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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