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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 제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최문희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일흔여덟번 째 서평
난설헌-최문희
난설헌. 눈이 내리는 그 집에 난초로 피어나다.
자동차로 한 삼십분쯤 가는 거리일까. 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있지 않다는 후문을 듣고나서는 더 자신이 없어졌다. 진입로를 찾기가 좀 어려운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서울도 아니고 먼 타지방도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인접한 곳에 허초희 그녀가 두 아이들과 함께 잠들어있다. 원래는 다른 지역에 있던 것을 옮겨왔다는 설도 있고, 고속도로 확장으로 묘를 이장했다는 설도 들었다. 남편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 두 다리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가고 싶은 욕심이 사그라지지 않을 뿐이다. 언젠가는 운전대를 잡은 그를 잘 설득해 허초희에게 갈수 있지 않을까.
노년의 소설가에 의해 그녀가 다시 세간의 시선 한가운데 서게 됐다. 잘된 일인가 싶으면서도, 딴은 불쑥 이렇게 뭍사람들이 쳐놓은 그물 안에 다시 걸린 듯한 그녀가 측은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잘된 일이다 싶다. 여성학 수업을 들을 때도,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며 배울 때도 한편으로는 허난설헌, 허초희에게로 모아지는 생각들은 늘 겹쳐지곤 했었다.
소설을 통해 본 그녀의 일생사가 내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한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그런데 참 마음이 아리다.
작품 속에서 살아나는 주인공 허초희의 이야기는 결혼식을 바로 직전에 앞둔 15세의 소녀 초희가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어지는 결혼과 시집살이. 특히나 유별난 시어머니, 자상하지 못한 남편과의 관계와 관계 속에서 치이고, 베이고, 나뒹굴면서도 처연함을 잃지 않는 심지가 곧은 여성으로 그려진 허초희를 만나는 일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는 같은 여자라는 자리에서 많은 부분 생각을 늘어지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번 작품이 내재하고 있는 가치는 이런 것이다. 역사상 실존하는 인물이긴 했으나 조선이라는 시대상과 여성이라는 신분적 제한에 등 떠밀려 활짝 개화하지 못한 채 시들어가야 했던 한 여성의 삶과 그의 작품들을 새롭게 딴은 진지하게 접하게 되는 기회로서 그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이 연약하고 청초한 이미지(소설 속에 나오는 허초희의 이미지)의 여성이 남긴 문학작품에 대한 평가는 거의 긍정적이긴 하지만 딴은 규방가사 형식으로 한정, 아녀자의 한풀이 식으로 그 한계와 가치를 일찌감치 규정해버리고 비하하는 의견도 없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여담이기는 하지만 이런 말을 했던 이는 분명 남성이지 않았을까.
소설 속에 등장하는 허초희의 작품들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상’이란 것에 대해 매달리게 된다. 글이란 감각이 살아있어야 그 생명력이 움튼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감각이 무디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순간순간 느껴지는 감각, 느낌들, 그리고 마음에 왔다가는 심상에 의해 처음이라는 무언가의 시동이 걸리는 셈이다. 그녀의 작품들은 감정의 동요를 격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비교적 담담하면서도 심상 한 가운데에 그늘을 이고 있다. 글이 글을 쓴 이의 성격을 말해준다 했던가. 허초희의 성격이 아마도 외유내강의 그것과 닮았던가 보다. 그렇긴 해도 두 아이를 먼저 보내고 나서 쓴 시는 가슴을 시리게 한다.
작가 최문희의 소설 난설헌은 잊혀져 있던 조선의 한 여성을 무한 시간의 공간을 에돌아 바로 우리 곁에 데려왔다. 소설로만 봤을 때, 무엇보다 유려한 문장이 눈에 띄었던 것 같다. 문장이 곱다. 고유어인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에 때문에라도 작가의 의도된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버성기다, 자릿하다, 나무 간살이 날렵하다, 어깨를 응숭거리다,
끼무룩 정신을 놓을 뻔했다, 비명을 사려물었다.
휘움한 어둠살이 고운 먼지때처럼 묻어있다, 돌올한 분위기,
홀로 무언가를 참따랗게 지키고 서 있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 세밀한 신경을 써서 작품을 완성했다는 것을 눈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책속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흠이라면 흠일까. 아무리 좋은 표현도 너무 자주 등장하면 식상할 수 있는 법이다. 이를테면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는 문장에서 “밤의 한허리가 훠이훠이 넘어가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허리를 넘어가다는 표현이 소설 한권에 몇 번인가 재차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가. 키가 크고 맵시가 있다는 표현에서 ‘낭창’이라는 단어도 자주 보았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소설을 접하면서 초반에 우울했던 까닭은 어쩌면 지나친 복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난설헌, 허초희의 삶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알려져 있다. 뭐라고 할까. 순탄치만은 않았던 삶의 단면들을 소설은 시종 무거운 마음으로 열어가고 있었다. 지나친 복선이라는 생각을 했다. 폐백으로 비단 옷감을 도둑맞고, 지붕위에서 벌어졌던 일들(구체적으로 소설 속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에피소드가 아닌지)하며 함이 들어오는 날과 결혼식이 있던 날의 궂은 날씨들 하며 소설의 초반은 온통 복선과 암시로 이루어져 있다. 시어머니가 거울을 깨는 행위도 그것이 앞으로의 주인공의 삶이 평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불러들이는데 아무 확실한 몫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많은 복선으로 인해 소설의 기대감이 떨어진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과 딸을 연이어 앞세우고 홀로 남은 어미의 심정에 동화되었는가 싶다. 무겁고 쓰리고 아리다. 속이 쓰리다.
사설 중에 사설이다. ‘여자는 결혼하면 예전에 무얼 했는지 상관없이 다 똑같아진다는 말’은 내 시어머니가 하신 말씀이었다. 문득 그 말이 생각이 나더란 말이다. 아직까지도 도도한 며느리라는 딱지를 붙여주고 계시니, 혹여 어머니도 책을 좋아하는 며느리보다 애교 많고 붙임성 좋은 며느리가 더 좋으신 것은 아니었을까. 초희는 먼 하늘에서 살던 이고, 어머니와 나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라... 부족한 애교는 마땅히 늘려야 하지 않은가. 어느 시대나 살아가는 방식은 다양한 법인가보다.
2011년 11월 6일 늦은 밤이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