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원고지 -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 2000~2010 창작일기
김탁환 지음 / 황소자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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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든 두 번째 서평

김탁환의 원고지-김탁환




작가는 인간애를 통해 성장한다




11월 18일 겨울비가 내리고 있다. 하늘은 먹색으로 가라앉아있고 건물들은 우중충하니 무거워 보인다. 건물이 무거워 보인다는 표현은 비문이겠지. 이를테면 습기를 잡아먹는, 물을 좋아한다는 거대 하마의 하소연이 들려오는 듯도 하다. 음습한 회색의 빛깔과 눅눅한 공기가 정말 싫다는 투정이 들리는 듯하다. 건물과 하마라.

어쩌면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작가의 일기를 들여다보는 일은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온다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고등학교 졸업반 즈음 작가들의 일기를 묶어낸 책을 본적이 있었을 때도 그랬던가 싶다. 누군가 말했다. 아니 물었다.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라고 의아해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어느 작가가 자신의 비밀스런 일기를 책으로 낸다 말인가, 라는 의구심과 질문들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그 사람의 눈빛이 기억난다. 왜일까. 그러면 안 되는 걸까.

지금은 저 세상으로 돌아간 작가들과, 사람들의 시선에 머물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잊혀져갔던 낯선 그네들의 미풍처럼 잔잔한 이야기가 담긴 그 책을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그 대신 소설가 김탁환의 일기를 모은 책이 곁에 있다.




‘어느 예술노동자의 황홀한 분투기’라는 부제가 붙었다. 글쟁이도 역시 노동자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특히나 예술에 있어서도 귀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긴 한데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시각적 요소에 많은 부분을 치중해서 창작되어지고 이어지는 예술장르에 비해 글이라 이름 붙여진 장르는 다소 그 느낌이 다른 듯하다. 마치 헐거운 벨트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꼭 조여지지 못한 채 약간은 헐거운 여유분을 갖고 있는 듯한 느낌. 그것을 여백이라 할 수 있을까. 숨이 막힐 듯 조여드는 것 같은 세상의 모든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나갈 수 있는 나름의 여유분을 확보하는 것. 비단 글을 쓰는 이들에게만 적용될 것은 아니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어쩌면 작가들이 갖는 그 여유와 공백에 대해 생각했었는지도 모른다.




김탁환 그의 글은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거나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깔끔하다. 작가 스스로 형식에 얽매이는 글 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글을 쓰고 싶다했던 그 고백처럼 그의 글은 담백한 맛이 우러난다.

2000년에서 시작된 십년의 기록이다. 교수의 자리에서 학생들과 교류하며, 창작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여행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엮어나간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런 것일까. 작가도 사람이다, 라는 말에 집중하는 것이다. 작가가 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까지의 과정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절절하게 알지 못한다는 게 사실이지 싶다. 책 속에는 수많은 인내와, 번민과 고통이 정신적 노동의 흔적으로 혼잡하지만 작가 김탁환 그는 시종 의연한 모습을 보인다. 책을 통해 만난 그는 단 한번도 복잡하고 버거운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정신을 놓고 흔들리는 법이 없어 보인다. 작가는 늘 자아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용기를 주고, 때로는 다그치고, 때로는 위로를 한다. 언제나 자아를 다스릴 줄 아는 힘을 지녔다.




소설가가 되려면 엉덩이가 무거워야 된다고 했던가. 시인이 순간적으로 느끼는 심상에 의해 창작을 하는데 반해, 소설가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집을 지었다 허무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한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학생시절 나는 책상 앞에 스스로에게 부탁하는 요구사항을 붙여놓곤 했다. 이를테면 가능하면 아주 천천히 갈 것, 조급증을 버릴 것 등등. 늘 쓰다보면 호흡이 가쁘고 뭔가에 쫒기듯 써나가는 습관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 동기의 집에 갔을 때도 동기가 벽에 써놓았던 문구를 본적이 있었다. 그 역시 스스로에게 압력?을 주는 몇가지 주문을 적어놓고 있었다.




반가웠던 것 같다. 책 속에서 끊임없이 보았던 ‘자기주문(자기 최면)의 문장’들이 정말 반가웠다. 비단 소설이 아닌 사소한 작은 글을 쓸 때에도 자기주문은 역시나 필요한 듯하다. 주문에 의해 글에 끌려가지 않고, 글을 끌고 갈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은 오래전에 했었지만 지금은 어중강한 중간자의 입장에 머물러 버렸다. 끌려가든지 이끌든지 간에 무언가 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거품을 문다.




책 안에는 작가가 스스로 배우고자 하고, 알고자 했던 또는 얻고자 했던 것들을 위한 책과, 영화, 음악, 무용 등 다양한 문화적 경험들이 기록되어있다. 한 편의 작품이 완성되기까지 어쩌면 한 사람의 작가가 탄생하기까지 우리는 많은 것을 간과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는 부지런하다. 부지런해야 글을 쓴다는 말이 정답인 듯하다.

간간이 엿보았던 그의 사상과, 전반적으로 풍겨지는 작가 김탁환의 ‘작가적 인간애’에 부담 없이 젖어 들어갈 수 있는 책이다.




 퇴고라는 빙하에 부딪혀 늘 허우적거리면서도 결코 좌초하지 않는 작가의 고뇌가 가득한 책 ‘김탁환의 원고지’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하나의 존재로 인식되어진다는 그 생각을 다시 생각하게 했던 것 같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새는 창공을 날수 있는 존재이며 아프락사스가 갖는 이상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집중하고 또 집중해도 성취가 어려운 것이 예술이다. 잡념을 버리고 문장 하나하나에 뛰어들 것. 이 안에서 행복을 찾을 것.”

                                           p267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는 그의 주문에 걸려든다. 걸려들고 싶다. 욕심이다.

하늘이 엷게 묽어져간다. 눈은 아니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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