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젤라의 재
프랭크 매코트 지음, 김루시아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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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안젤라의 재
-사랑과 연민의 이름으로
     
아는 지인에게 두 권의 책을 권했다. 한 권은 ‘안젤라의 재’이고, 다른 한 권은 ‘네 번째 빙하기’라는 책이다. 이 두 권의 책은 가족의 진정한 의미와 함께, 한 사람이 온전한 인격체로서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는 깊이감 있는 소설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 중에 한권 ‘안젤라의 재’를 이야기해보려 한다. 책은 성장소설의 성격을 갖는 자전적 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책의 주인공은 어린 소년 프랭키(프랭크 매코트, 프랜시스-애칭, 정식 이름 등 작품에서 세 가지 이름으로 표현되고 있다)이고 네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한 소년이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소설의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러나 중간중간 웃음이 묻어난다. 어쩌면 이 작품은 독자들에게 매우 슬픈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따뜻한 성장소설의 성격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아일랜드계 부모, 미국에서 출생한 소년 프랭키. 그의 가족은 미국이 직면했던 대공황과 어린 여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 모두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한 전쟁이후 대공황에 시달리던 미국보다도 더욱 열악한 환경에 처해 있었다. 여기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들어가보자. 종교와 연관하여 영국과 아일랜드는 풀어야 할 문제들이 많았다. 신교과 구교의 타협도 그 중 하나였을 법하다. 결과적으로 아일랜드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원했는데 전체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따라서 북 아일랜드의 6개주는 영국령에 계속 포함하는 것으로 나머지 주만 자체독립을 하게 된다. 
정리를 하자면 아일랜드가 분리되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배경이 왜 필요한 걸까? 그건 분명하게도 우리의 주인공인 프랭키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 즉 북부출신(정치적 상황으로 북부출신의 차별이 심했다)의 아버지를 둔 프랭키는, 아버지의 출신성분 때문에 시작부터 좌절을 알아가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아버지는 돈만 생기면 술집에 가서 모든 돈을 탕진하고 빈손으로 돌아오며, 아일랜드 독립 투쟁에 참전했던 낡은 기억만을 부여잡고 잊혀진 노래만 불러댄다. 자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깨워 일렬로 세워 군가를 부르라 강요를 하고, 아일랜드를 위해 위대하고 용감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강요를 하며 과거에 집착하는 인물이다. 생활비라곤 한 푼도 가져오지 않는, 생활력에 있어서는 빵점을 줄 수밖에 없는 이 아버지와, 무능력한 남편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제발 가장 노롯을 해보라며 분노와 눈물을 쏟아내는 불쌍한 어머니. 그녀의 이름이 바로 제목에 등장하는 ‘안젤라’다. 그녀는 유산을 한 몸으로 빈민 구제소에 가서 먹을거리와 불을 피울 수 있는 석탄을 구걸해야만 했다. 갈아입을 옷도 없이 학교에 갔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잠자리에 들며, 이불도 없어 코트를 이불삼아 덥고 자야 하는 어린 프랭키와 형제들. 밑창이 닳아 구멍이 난 신발과 낡아빠진 양말은, 석탄으로 까맣게 칠해 신발처럼 보이게 하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방법을 터득해간다. 
     
신이 인간을 버린 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을 버린 것이다, 라는 생각을 했던 대목은 성당에서 문전박대를 세 번이나 당했을 때가 아니었을까. 그릇된 온갖 차별과 그들의 삶을 힘들게 하는 가난이라는 거대한 멍에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이 가족의 모습은 안쓰럽고 또 안타깝게 그려지고 있다. 여기에 공동 화장실 바로 옆에 집을 얻어서 더욱 불행하기도 하고, 어이없게도 이로 인한 슬프고도 웃긴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이 암울한 삶의 어두운 뒷골목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들에게는 가난 속에서도 가족이라는 끈끈함이 있었다. 비록 가장의 역할을 포기해버린 아버지이긴 하지만, 주인공 프랭키는 성장해가면서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는 감정이 담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이는 아빠 안에도 세 사람이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한다.
     
-아침에 신문을 읽을 때의 아빠, 저녁에 이야기를 들려주고 기도드릴 때의 아빠. 그리고 나쁜 짓을 한 후 술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아일랜드를 위해 죽기를 바라는 아빠 
나는 아빠가 나쁜 짓을 할 때면 슬프지만, 그렇다고 아빠를 멀리할 수는 없다. 아침의 아빠가 진짜 우리 아빠이기 때문이다. -p139 
     
이를테면 어린 프랭키에게 아일랜드의 전설을 이야기해주는 다정한 모습의 아빠, 돈만 생기면 술만 먹고 빈손으로 돌아와 절망을 안겨주는 아빠, 어린 동생들이 죽어갈 때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아빠의 모습에서 아이는, 아빠에게 슬프지만 따뜻한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아버지는 결국 가족을 위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앙숙인 나라 영국으로 다른 가장들과 함께 떠나지만 가족에게 돈을 보내주지는 않았다. 소설은 아버지의 부재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생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어린 소년 프랭키의 모습을 과하지 않는 시선으로 쫒는다. 아이는 어느덧 열 살이 되고 열네살 사춘기 소년인 동시에 책임감 있는 남자 어른이 되고 싶어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체국의 임시 직원이 되어 돈을 벌어 미국으로 갈 희망을 꿈꾸게 된다.  가족을 위해 살겠다는 신념으로, 프랭키는 아버지의 부재를 책임지려하는 어린 가장의 면모를 보인다.
     
소설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었을까. 프랭키의 어린 동생들이 한명 한명... 죽게 되면서 어머니 안젤라의 입장에서 눈물을 흘렸다. 이토록 신산스런 삶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삶을 견뎌낸다는 건 어려운 일이라 생각했다. 신이 외면한 것 같은 비루한 삶을 들여다보면서 씁쓸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프랭키의 가족과 서로 도와가며 위로하고 이해하는 주변인들의 모습을 통해 또다른 희망의 모습을 보았던 것을 기억한다.
     
아들이 묻는다. 책이 재미있어요?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제법 두툼한 책이긴 한데,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가 물어보고 싶다. 내 아들은 안젤라의 아들 프랭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같이 이야기해보고도 싶어진다.
     
우리가 꿈꾸는 희망은 어디에서부터 나오는 것일까.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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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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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누구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소설 이방인을 읽었다. 내게 있어 카뮈라는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페스트’ 였다고 말하려던 참이다. 이 짧은 소설 이방인을 읽고 난 후 어딘지 모르게 나는 다시 페스트를 읽고 싶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함께 하지 못하는 이를 이방인이라고 하는 걸까? 이방인이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일까? 사전적 의로의 이방인은 ‘타국의 사람, 혹은 유대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신앙으로 하는 사람’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작품 속에서 이방인이라는 의미는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뫼르소다. 그는 양로원에 엄마를 맡기고 혼자 생활하는 청년으로 등장한다. 첫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어머니가 사망한 사건으로부터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되고 있다. 가족의 죽음 앞에 서게 된 주인공 뫼르소.

사람들은 주인공 뫼르소의 행동에 주목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적 의도가 짙게 반영된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평범하지 않은 행동들은 주변인들에게 낯설다, 라는 반응을 강하게 심어주게 된다. 사랑하는 가족 중 엄마, 다른 이도 아닌 엄마가 죽었는데 아들은 슬퍼하지 않는다. 관을 열어 얼굴을 보려하지도 않고, 관 옆에서 밤을 지새우는 동안에도 그는 피로감으로 인해 졸았으며, 담배를 피우거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고 상심의 표정을 보이지도 않았다. 상을 치르자마자 여자를 만나고 바다로 수영을 가기도 했으며, 세상의 온갖 관계와 관계 속에 자연스럽게 푹 빠져 들어가버린다. 세간의 비난을 받을지언정 그는 사람들의 시선들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던 양로원의 지인들은 뫼르소의 그런 모습을 과연 이해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사실 비약이  심한 유도질문의 성격과 같다.

작품을 읽는 동안 숨은 그림이라도 찾듯 나는 계속 찾고 있었다. 왜 제목이 이방인, 이어야 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그리고 도대체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인물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들. 책 뒷부분에 많은 양을 할애하고 있는 작품에 대한 해석을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을 하기도 했다. 내가 읽고 느끼고 이해하는 오롯한 작품으로의 이방인을 기억하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시선에 의해 분석된 작품으로서 이방인 또한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나와 작가. 그리고 내가 느낀 작품일 뿐인 것을 말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확실히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또 이 이방인을 둘러싼 다른 모든 사람들 역시 이방인이었다. 넓은 의미로 보자면 결국 작품을 통해서 모든 인간은 이방인 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공유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것을 이방인의 행동이라 말한다. 또한 그들과 공유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이들 역시 이방인의 꼬리표를 달아야 하는 행위라고 비난한다. 종교와 신에 대해서 강요하는 이는, 강요당하는 이를 이방인이라 비난할 것이다. 물론 반대로 강요를 당하며 끝내 신을 부정하려 하는 이는 왜 내 삶에 억지로 당신들이 원하는 것을 구겨 넣는 것이냐며 반항하고 투쟁하게 되는데, 이들의 시선으로는 강요하는 이 또한 이방인이라 칭할 것이다. 자신의 삶에 함부로 침입하려 드는 낯선 이방인으로 말이다.

서로의 다른 관점으로 이방인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하게 된다.


작가는 주인공 뫼르소를 통해 인간의 독립적인 어떤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소설은 신께 의탁하려 들지 않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확신을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삶 또한 고귀한 삶인 동시에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세간의 차가운 시선들은 뫼르소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만큼은 연민의 시선으로 그를 바라본다. 왜였을까. 그들 역시 한편으로는 뫼르소와 같은 즉, 모든 광대하기 짝이 없는 낯선 이,방,인 의 입장에서 순간순간을 비껴가며 아슬하게 살아가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실 뫼르소 라는 인물은 이방인이자 이방인이 아닌 신분으로서 주변인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했다.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노력하고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행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그는 나이들어 남자친구를 사귀었다는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 자칫 묻히고 말 정도의 사소한 주인공의 삶의 변화와 마지막 순간 엄마를 이해하려는 의식의 변화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순간 엄마는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마음이 내켰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p135

자. 이제 지나칠 정도로 건조한 이 작품을 두고 한마디 정의를 내려보자. 솔직히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나는 악몽을 꾸었다. 좀비 같은 존재들에게 온몸이 뜯겨서 잡아먹히는 자극적인 꿈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은 까닭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의를 내려야 한다.

-뫼르소는 죄가 없다. 죄가 있다면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다는 점이다.

더불어 한줄을 더 붙이자면

-결국 모든 인간은 상황에 따라 수많은 이방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는 것으로....

비가 종일 내리는 중이다. 책의 무게가 이렇게나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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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사서삼경 - 읽으면 힘을 얻고 깨달음을 주는 지혜의 고전 삶을 일깨우는 고전산책 시리즈 6
미리내공방 엮음 / 정민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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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 읽어야 할 삼강오륜

-진정한 예(禮)란

 

‘삼강오륜’이라고 했을 때 공자의 ‘논어’를 생각했었다. 이 또한 고정된 선입견이었을까? 분위기가 비슷할 것 같은 추측은 어딘지 모르게 살짝 빗나갔던 게 사실이다.

열세 살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자마자, 학교에서 ‘명심보감 효행’ 편을 배우고 익히게 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전에 가는 곳을 미리 알리고, 귀가해 집 안으로 돌아오면 제일먼저 들어왔음을 알리면서 부모가 걱정할 일들을 만들지 말라던 문구가 생각이 난다. 그 문구를 배우는 의미는 첫째로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 중 부모에 대한 효와 바른 도리를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며, 둘째로는 이제 막 학교라는 단체 생활에 들어온 어린 아이들에게 올바른 생활습관을 교습하기 위한 방법에 일환이었을 것이다.

 

옛날 아이들이 천자문을 익히고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명심보감을 배우며, 학동기에 들어서는 동몽선습과 격몽요결을 배우면서 여러 번 강조되어왔던 것이 바로 삼강과 오륜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로 동몽선습 내용에는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오륜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고 하더라. 그렇다면 왜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삼강과 오륜을 강조해왔을까. 딴은 이것이 올바른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덕행이라는 것을 교육하기 위한 선조들의 진심어린 충언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형식적인 부분이겠지만 상감오륜에 대한 지식적인 부분을 언급하고 넘어가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부분은 책 속에 소개되어 있는 부분을 인용하고자 한다.

다음은 책 날개와 머리말에 실린 부분이다.

 

“중국 전한 시대 때의 유학자 동중서가 공자와 맹자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을 논한 데서 유래되었다. ” -인용. 1

 

“삼강오륜이란 유교의 도덕사상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인륜을 말한다.” -인용. 2

 

우리는 이미 중고등학교 시절에 삼강오륜이 대해 지겹도록 들어왔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의 사상과 실천에서 깊이 녹아들지 못한 채 살아가는 듯하다. 그건 어쩌면 나 혼자 낙락장송으로 살아간다한들, 사회가 혹은 주변인이 함께 동조 내지는 동화하지 않으면 그 의미와 가치는 상실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전설 같은 원리원칙만 논하기에는 사회가 변했다고 항변도 할 것 같다.

그러나 사회가 변하고 삶의 방식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 본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재까지도 우리 사회는 어른에 대한 인식이 다르고, 예를 강조하며 인성에 대한 찬반을 거론하며 살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사회는 너무 많은 관계와 관계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더욱더 강령과 인륜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삼강) 또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 임금과 신하간의 의리, 부부 사이의 분별, 어른과 아이 사이의 질서, 친구 간의 믿음을 논하는 인륜이다.(오륜) ” -인용. 3

 

삼강과 오륜은 책의 표현대로 인륜이다. 그리고 내가 표현하는 방식으로는 ‘미덕’이다, 라고 적어보고 싶다. 인륜과 미덕. 우리 사회가 한번쯤 뒤돌아보고 반성해야 할 부분에 대해 삼강과 오륜은 명확하게 길을 안내해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긍정의 기대치를 심어보고 싶다.

 

출판사의 소개문에서 책의 의도를 쉽게 알 수 있는 표현들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소개해보자. ‘상감오륜의 각 덕복에 걸맞은 동서양의 이야기를 두로 모아 그 뜻이 자연스럽게 이해되도록 구성했다’ 소개된 바와 같이 책 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실렸다.

어린 아이들이 즐겨보는 전래 동화에 자주 등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이솝우화에서 보았음직한 이야기와 중국의 역사, 한국의 역사까지 비교적 폭넓은 범위에서 가지고 와 소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좀 들어보자. 부위자강 편에 등장하는 ‘지게의 교훈’은 고려장 이야기이며, ‘말 도둑이 된 계란 도둑’은 이솝우화에 등장하는 교훈이 담기 이야기이다. 부자유친에 편에서 ‘앞일을 점치는 거북아들’은 아이들이 보는 전래동화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고, 부부유별 편 ‘전화위복이 된 방귀 편’ 이야기는 배경이 일본으로 되어 있는데, 한국 전래동화 ‘방귀쟁이 며느리’ 편으로 이미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한 인기 있는 이야기이기도 한다. 그런가하면 장유유서 편 ‘믿음의 힘’도 널리 알려진 이야기인 동시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대목이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믿음의 힘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 힘이란 무엇일까, 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입술에 붙은 표주박’ 이야기는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의미로 아이들에게 소개되고 있는 전래동화이다.

사실 이렇게 다양한 텍스트를 소개하며 쉽게 읽히는 장점을 지닌 책이지만 중간중간 삐끄덕거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주제와 각각의 텍스트가 갖는 연계성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보았던 기억을 다시 소환하며 소소한 감성에 젖어들었던 대목을 기록으로 남긴다.

‘상가승무노인읍’ 喪歌僧舞老人泣

상제는 노래를 하고, 중은 춤을 추며, 노인은 울고 있네....p142

 

책을 읽으면서 진정한 예는 진정한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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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모험 - 표상문화론 강의
고바야시 야스오 지음, 이철호 옮김 / 광문각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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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상문화론 강의 -회화의 모험

회화의 늪에 빠지다.

 

제목부터 결코 가볍지 않은 분위기가 강조되는 이 책은, 시작부터 끝까지 진지함으로 가득하다. 책 표지 역시 무겁다. 짙은 어둠 속에서 옆모습만 살짝 드러난 채 앉아 있는 여인과 일렁이는 촛불 그리고 오직 이 하나의 초를 반사하는 거울의 이미지는 사뭇 강렬하다.

 

책을 읽다보면 각자의 책들이 뿜어내는 분위기란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무겁거나 가볍거나 혹은 진지하거나 과하게 질척이거나하는 등의 분위기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까닭은, 책을 읽는 동안 책 속에 온전하게 몰입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쓰게 되는 글은 대부분 책이 갖는 분위기를 따라가게 되는 걸 느끼게 된다.

딱딱한 논설문이나 기사문을 읽고 난후에 쓰게 되는 글은 역시나 딱딱하고 따분하기 그지 없다.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책을 읽고 난 후에 쓰는 글은 마찬가지로 술술 잘 써지고 읽기에도 꺾임이 없다. 그렇다면 고바야시 야스오 교수의 책인 이 ‘회화의 모험’을 읽고 나서 쓰고 있는 내 글은 어떤 글이 되는 걸까?

 

책은 일반인이 접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책이다,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한번쯤은 이런 책도 읽어볼 가치가 있는 것도 맞다는 생각을 한다.

앞서서 나는 철학과 관련된 책을 읽었다. 우연하게도 회화와 미술을 논하고 있는 이번 책 속에서 먼저 읽었던 철학적 요소를 찾아낼 수 있었는데, 바로 ‘오컴의 면도날’에 관한 이론이었다. 책 속에는 지루할 정도로 많은 철학적 내지는 과학적 이론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다. 지루하다는, 표현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어서 오독이 없기를 바라지만 사실 책은 쉽게 다가설 수 없는 투명의 막을 지니고 있는 듯도 하다.

 

어떤 이유로 이번 책이 이토록 낯설고 어렵게 다가왔던 것일까. 투명의 막은 결코 녹녹하지 않은 단단한 막이었음을 기록한다. 왜였을까.

우선 언어 선택, 그리고 번역투의 깔끔하지 못한 문장표현도 읽기에 거슬렸던 부분이 많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딴지를 걸자면 이런 부분들이었다. 언어 선택에 있어서는 전문적인 표현도 많았고 각주를 달지 않은 채 회화에서 쓰이는 외래용어가 많이 등장했다. 어쩌면 저자의 설명이 너무 난해한 까닭에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새롭게 사전을 찾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주어와 서술어의 불일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는, 은, 서, 써, 표현들로 이루어지는 문장들은 가뜩이나 잘 들어오지 않는 내용을 더 멀어지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이 책을 끝까지 잡고 있었다. 시쳇말로 던져버리지 않고 버텼다.

때때로 늘어지던 회유에도 불구하고 책을 붙잡고 있었던 것은 체계적이며 구체적인 해석에 의한 작품분석, 물론 작가의 개인적인 의견이 많이 들어간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끌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간간이 보아왔던 작품들을 향한 작가의 새로운 해석이 궁금해서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회화, 우리는 보통 이 회화를 쉽게 그림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 이제 이 기나긴 여정을 보여주고 있는 책을 요약 정리해 볼 수 있을까. 회화의 역사도 정말 말 그대로 화려했다고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어 보인다. 이번 책은 회화에 대한 역사서이다, 라고 말하고 싶다. 책은 회화의 처음부터 이야기하고 있다. 시작부터 각각의 표상으로 대표되는 회화(그림)가 스스로 새로운 정의를 내리고,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과 같다고 생각했다.

투시도법이나 수리와 관련한 회화, 후반부에 나오는 광학과 연계해서 사진기술을 언급하기까지 책은 철학, 수학(대칭과 비대칭, 비율), 과학 등 다양한 학문을 기저에 깔고 일어선 예술이 바로 회화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든다. 내게는 특히나 어렵게 다가왔던 마니에리즘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던 바로크 회화에서 등장하는 독특함은 낯설지만 분명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부분이다.

 

책을 읽으면서 한 귀퉁이에 이런 글을 남겼다.

-그림에 있어서 형식과 제도는 그냥 눈에 보이는 단순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을 뿐이다.-

이 또한 딴지 같지 않은 딴지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회화의 처음부터 중세 기독교 예술과, 세기별로 나누어지는 예술(회화) 사조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작가와 대표작을 소개하며 비교 분석하고 있다. 덕분에 난해한 현대미술과 초현실주의 회화까지 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셈이다.

이번 책이 대학원생과 학생들을 위한 강의서를 위한 책으로 출발했다는 해설문을 접하지 않고서라도, 전문성이 농후한지라 어느정도 예측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다만 일반 독자들을 위해 조금 더 쉬운 해설과 표현으로 구성된 책으로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소심한 욕심을 남겨본다. 늪에 빠지면 헤어나기 어려운 법이니까.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적는다.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며...

 

-예술의 역사는 결코 단편적인 사고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많은 회귀나 연결 고리에 의해 복잡한 양상을 나타낸다는 것, 또한 예술 작품은 반드시 ‘다가와야 할 시기’를 위해서 열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항상 잊어서는 안 됩니다.-

 

p162. 윤곽보다는 진동 편, 표상문화론 강의 회화의 모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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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저녁 - 서양철학 50 철학이 있는 저녁
리샤오둥 지음, 이서연 옮김 / 미래타임즈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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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있는 저녁

-이성과 신앙, 자연과 지식에 대한 인간의 질문들

 

처음에도 그랬고,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철학이 어렵다고 실토를 한다. 또한 이 철학이란 학문은 때때로 아주 모호하다. 경계가 분명한듯 하면서도 분명하지 않은 그 어떤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철학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했을 때 나는 그저 철학은 자기 자신이 지켜내야 하는 하나의 생각 혹은 관념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철학을 지녀야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은 누구나 철학자의 면모를 지닌 것이 아닌가? 꼭 내가 무슨 스토아학파 내지는, 에피쿠로스학파의 거창한 명함을 내걸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선대를 쫒아 주어진 삶을 철학적으로 살아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인간은 어쩌면 모두 철학자들이다, 라는 명제를 만들어볼 수도 있지 않은가 말이다.

 

책에 대한 첫 번째 느낌은 어쩌면 이 책은 호불호가 분명히 갈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장점과 단점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철학책이라고 한다면 오만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잔의 에스프레소처럼 달콤 쌉싸름한 지혜의 보석 상자’라는 비유는 꽤 감성적이면서도 자극적이라 할만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는 커피를 단 한번도 마셔보지 못한 사람이기에 가히 상상이 잘 되지 않는다. 이를 두고 문화적 이탈행위라고 해도 어쩔 수는 노릇이긴 하지만, 이쯤에서 나만의 철학적 멘트 하나정도는 남겨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문화적 소외나 이탈이 아닌, 그것은 지극히 ‘개인의 취향’일 뿐이라고 말이다.

커피 자체가 갖는 맛의 오묘함을 알지 못하니, 커피가 갖는 달콤 삽싸름한 그 맛과 지혜의 보석으로 표현하는 이 철학책이 지니는 알 수 없는 미묘한 맛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대략 난감하다.

 

본론으로 들어가 다시 책에 대한 두 번째 느낌을 적어보자. 이것이 어쩌면 이 책에 대한 핵심이자 총체적인 정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구성을 살펴보면 책은 시대와 연대별로? 혹은 학파와 계열별로 나누어지며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소개와 그들의 철학개념과 소소한 일상의 몇 장면들이 함께 실려 있다. 또한 한 사람의 철학자에 대한 소개와 그 혹은 그들이 평생 주장하고 일궈낸 철학 관념이 소개된 후에는 짤막하게 ‘철학적 사색거리’하는 코너가 등장한다. 독자로 하여금 개개인의 생각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부분인 동시에, 이 부분이야말로 눈으로 읽으며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철학의 진한 향기에 매혹되기 좋은 순간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싶다.

 

세 번째 이야기가 남았다. 이 부분은 다소 불만 아닌 불만이 담겨져 있음을 미리 밝혀두기로 한다. 철학책뿐만 아니라 모든 책들을 읽을 때 첫장부터 끝까지 제목과 부제목까지 다 읽어보는 습관이 잡혀있는 까닭에, 이 책 역시 그렇게 읽어나가는데 제목과 부제목 그리고 내용의 조화가 다소 잘 맞지 않았던 것 같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주제와 내용에 들어맞게 잘 맞춰진 제목과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다소 모호하고 동문서답식의 두루뭉술한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혹자는 중세를 상징하며 말하기를 문화의 암흑기라고도 하더라. 철학사는 이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을까. 중세는 들어서면서 정치 경제 예술 등 생과 사를 포함한, 인간이 접하는 모든 문화의 일면이 종교와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중세가 아닌 그 보다 더 이른 시기에서부터도 철학사조에서는 이성과 신앙이라는 거대한 두 화두로 고민하고, 번민하는 철학자들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은 책을 통해 다시 확인했던 부분이기도 하다. 어느 학파의 어느 학자는 신앙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또 다른 학파의 학자는 신앙이 아닌 이성이 우위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자연이나 인간의 지식을 그 자리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다양한 생각들과 다양한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각자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자신만의 혹은 선대의 이론으로 무장하여 흔들림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삶 속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관철시킨다. 사실 ‘철학이 있는 저녁’은 이러한 철학자들의 삶과 이론을 소개하는 짧은 개념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볼 수 있을 법하다.

 

깊이 알고자 한다면 다른 철학책을 더 들여다볼 필요성이 있을 법하거니와, 그저 이러저러한 철학자들과 개념들이 있는데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들을 우리 삶에 어떻게 가져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까, (이 책의 출간 의도쯤 될 수도 있겠다)를 생각한다면 부담 없이 읽어볼 만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가락이 부러지니 아프다, 라는 말은 고등학교 때 윤리 선생님이 알려주신 힌트?였다. 손가락은 소크라테스, 아프다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의미한다. 그 시절에는 어째서 그런 순서를 외워야 했는지 서글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열두어살 무렵 어른을 따라 갔던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말씀도 기억난다.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는 자가 진정 믿음이 큰 자입니다.’

그렇다고 내 자신이 신앙이 이성위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나 이성이나 신앙을 포함한 많은 철학적 문제 앞에 서본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절하고 책 속에는 기억하고 싶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중 일부를 인용하며 철학을 향한 짧은 구애의 시간에 마침표를 찍는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가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들을 부자가 되어도 좋지만 가난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알고자 하는 본성을 지켜가며 지식을 쌓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의미가 있고 지식은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07. 지식에 대한 갈망을 어떻게 채울까?, 일부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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