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탈로니아 찬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6
조지 오웰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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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탈로니아 찬가

 

 

조지 오웰의 작품이라고는 ‘동물농장’밖에 몰랐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권력자를 상징하는 돼지들을 종종 생각하곤 했다. 오래전에 읽었던 칼 마르크스 관련 평전을 읽었을 때 기억에 남는 부분을 상기하면서,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동물들이 처한 상반되는 상황을 견주어보기도 했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작가 조지오웰은 비판적이며 논리적이면서도 냉철한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책은 작가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경험과 그가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담긴 책이다. 실제 전쟁에 참여한 사람으로서 정치 사회적인 입장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압력으로,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잡고 싶은 작가 스스로의 의지와 메시지가 담긴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번 책은 어떤 관점으로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다른 이해와 해석이 나오지 않을까도 싶다.

 

사실 ‘카탈로니아 찬가’에 대한 처음 생각은 책을 읽으면서 빗나갔다. 어떤 내용일거라는 예상은 했었지만 그 예상마저도 빗나갔다고 말해야 한다. 어쩌면 나는 전쟁과 인간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을 읽고 싶었던가보다. 그러나 실상 이 작품은 전쟁과 인간이라는 측면이라기보다는 ‘정치와 인간’이 아닌 ‘정치와 전쟁’이라는 측면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게 더 적당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 편의 작품을 어떤 시각으로 어떤 측면에서 들여다봐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는 사실 뭐라 명확한 답을 내놓기는 어려워보인다. 바라보는 이의 관점이 다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어떤 방향성으로 기준을 세워 보는가에 따라, 이어질 이야기 역시 사뭇 다른 방향성을 갖기 때문이다.

작가 오웰의 입장에서는 이번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작품이 다분히 정치적으로 읽히기 바랐던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가의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책은 알아야 할 것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아군과 적국의 구별이 필요했다. 우선은 그랬다. 책속에 나(작가)는 누구를 위해 싸우는 걸까. 어느 편에 속해있는가. 이 질문은 단순히 그가 어느 기관에 속해 있는가, 를 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작가 오웰 그가 속한 정당은 흔히 알고 있는 이념적 대립을 형성해 온 사회주의 혹은 자유주의 중 어느 편인가,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자료를 찾아 읽어보고 작품 안에 등장하는 사회주의, 공화파, 공화좌파, 사회당, 공산당. 그리고 프랑코가 지휘하는 군세력까지 일렬로 배치하여 이들이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에 대한 정리를 해야만 했다. 전장에서 집적 싸우고 있는 대상이었던 파시즘(파시스트)과 또 자주 등장하는 트로츠키에 대한 자료도 같이 읽어봐야 했다. 알고 싶은 부분이 많아질수록 이 문제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번 작품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사전적 지식이 분명히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그는 왜 스페인 내전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어찌보면 그가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그저 낯설었던 한 나라의 복잡했던 내전에 잠시 자발적?으로 휘말리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정치 사회적 뒤섞임의 혼란과 함께, 스페인의 내전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전후의 상황을 이해하며 다시 책 ‘카탈로니아 찬가’를 들여다본다면, 작가 조지 오웰이 언급한 부분 즉 책을 출간해야만 했던 계기와 목적에 대한 변론을 접하지 않는다고해도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판단된다. 누군가가 말해야 했던 진실이 있었기에, 또 다른 누군가는 반드시 펜을 들어야하지 않았을까.

 

스페인 안에서 그는 자신이 속한 통일 노동당을 위해 총을 들었다. 그가 꿈꾸었던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계급이 없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었던가. 작품 안에서 그려지는 사회의 일부분은 어쩌면 작가가 바라는 이상적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동자와 권력자들이 서로 인간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형성해가는 그런 사회 말이다. 가진 것 없이 제대로 된 군복과 신발도 없는 각양각색의 복장, 미흡하기 짝이 없는 전쟁무기로 서로 죽고 죽이면서 그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시가전을 겪어내면서도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니오.’ 라고 했던 이들의 대화를 보면서 전쟁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 정말 최후에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잠시 생각했던 것 같다.

내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입장 이전에 이들은 모두 나와 다르지 않은 내 이웃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만 했다. 그 어떤 정치적 입장과, 각기 다른 소속된 정당을 위해 투쟁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차치하고서 들여다 볼 문제는 그들이 모두 같은 이웃이었고 바로 내 옆에 있어왔던 이웃이라는 점이다. 물론 작가는 이 부분을 따로 강조하지는 않는다. 다만 흘러가듯 말한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딴은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생겨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이에 대한 생각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적어도 나는 그러고 싶어지는거다. 전쟁이 아닌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전쟁 그리고 수많은 내전 역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점에서 작품이 전쟁관련 르포에 지나지 않는다는 누군가의 비난에서 충분히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도 사실이다. 서로 다른 입장에서 생겨나는 반목과 비난의 화살은 후방에 있는 위정자들의 것일 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은 평화를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카탈로니아 찬가’를 전쟁과 관련한 세계사적 측면에서 바라볼 것인지, 개인의 전쟁경험에 대한 글로 바라볼 것인지, 전쟁과 인간이라는 어떤 철학적 측면으로 볼 것인지는 말 그대로 읽는 이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어떤 선택과 관점으로 읽어내든 간에 한 가지만 함께 이야기해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특수한 상황에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선한 예의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각설하고 쉽지만은 않은 책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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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합격생 엄마표 공부법
김혜영.장광원 지음 / 이화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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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합격생 엄마표 공부법

-공부는 왜 하는 걸까.-.-

  

 

 

  

공부는 왜 하는 걸까. 아니 아이를 키우고 교육시키는데 정답이 있을까.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해서 고학년에 다니게 되면서부터 저학년 신입생 엄마들이 종종 물어보곤 했었다. 나는 그렇게 극성맞은 엄마가 아니었던지라 늘 그렇듯 ‘책을 많이 보여주세요’, 라는 말을 해주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대 합격생 엄마표 공부법’이라는 책을 읽었다. 뭐랄까. 스스로에게 자극제가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책은 적절한 에너지를 포함해 비타민 같은 자극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어쩐지 보이지 않는 마음의 무게가 더 무거워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책을 읽고 다른 엄마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를 생각했었다. 그건 아마도 ‘끊임없는 관심’이 아닐까.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말이다. 자식을 잘 이끌고 싶은 부모라면 이 대답을 듣고 바로 실망할 것도 같다. 그렇긴 한데 사실 책에 실린 학생과 그 어머니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제일 중요한 것이 바로 ‘관심과 사랑’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누구나 알지만 참 해내기 어려운 바로 그것. ‘참고 또 참는 일!’ ‘인내’가 아닐까싶다.

 

책에 실린 케이스를 살펴보면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독서의 경험이 풍부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어머니들이 강조한 바, 다양한 독서의 경험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뒷받침해주는 부분이 많고 또 많은 부분에서 큰 영향을 준다고 인정하고 있다. 아이의 성향에 맞춰 공부의 방향을 잡는 일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성향에 따라 학원 선택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고, 강사, 교사의 스타일과 아이의 스타일 서로간의 관계도 중요하게 보고 있었다. 절반 정도의 케이스에서 외국에서의 생활했던 경험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부분 외국 생활이 아이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엄마가 아이의 성향과 환경에 맞게 공부 과정을 단계적으로 기획하고 잘 이끌어주는 부분도 살펴볼 수 있다. 이를테면 책에 등장하는 유형은 예전에 한참 유행하던 표현으로 알파 유형의 엄마들인 셈이다.

 

외고 출신의 학생과 일반고 출신의 학생들 이야기로 나눠 볼 수 있을 것도 같다. 부모의 교육적인 철학 관점에 의해 굳이 특목고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일반고에서 좋은 내신을 얻는 것이, 더 능률적이며 종합적으로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의견도 실렸다. 때로는 부모가 리드해 아이를 끌고 가는 케이스가 있는가하면, 아이가 주체가 되어 부모는 아이 의견을 수렴하는 케이스도 보이는 듯했다.

민사고(민족사관학교)에 다니는 아이를 학원에 태워다주기 위해 분당에서 강원도까지 차를 몰고 가서 전화를 했는데, 아이가 거부를 하는 바람에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는 어느 어머니의 이야기가 가슴을 후빈다.

 

내가 낳았고 내가 키웠지만 자식만큼은 내 맘대로는 되지 않더라, 는 말이 생각난다. 고약한 것 같으니!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다 똑같다. 나는 어느새 학교 앞에서 기다리는 엄마에게 전화로 엄마 속을 뒤집어버리는 질풍노도의 그 철없는 아들이 미워지더라. 그리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내내 울었다는 그 어머니의 입장을 이해하며 한숨이 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책은 어디까지나 대입 입학을 최종지점으로 생각한다. 사실은 그 너머의 것들도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일단 입학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셈이다. 책은 아이의 성적이 1등급에서 2등급으로 밀려날까 조바심을 내고, 아이가 성적으로 괴로워하면 함께 괴로워하며, 학교 비교과 활동을 위해서 아이를 대신해 자료를 찾고 구성을 하며 모임을 만들어가고, 입학 설명회마다 꼬박꼬박 출석을 하면서 그렇게 엄마 스스로도 공부했었다는 여덟 명의 어머니의 절절하면서도 생생한 이야기가 실렸다.

 

제목에서 이미 밝혔지만 한편으로는 책에 등장하는 케이스가 모두 서울대를 예로 들고 있다는 점이 아쉬운 점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다. 학생들 거의 대다수가 대치동 학원가에서 공부를 했던 경험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 또한 아쉬움인 동시에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혼자서 꿋꿋하게 자기주도형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학생의 케이스도 보인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이제 잊어야 한다. 미안하다.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난다. 개천에서 꼭 용이 나오라는 법은 없다고 했던 말. 지렁이도 송사리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어야 한다, 했던 그 말이 생각난다. 이 표현을 써서 유감이다. 그런데 내 아이를 위해 좋은 학원에 보내주고 싶어도, 좋은 책을 사주고, 유명 강사를 과외 선생님으로 붙여주고 싶어도, 그럴만한 능력이 없는 우리시대의 부모는 좌절한다는 이 끊을 수 없는 악순환의 고리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더란 말이다.

 

세상에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 외에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보이고 재능이 뛰어난 아이도 많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스카이 대학을 가기 위해서 너무 한편으로 정해진 코스와 정해진 방법론만을 운운했다면, 그것이 이 책이 지니는 마지막 한계라고 한다면, 다음에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더 다양한 학문과 분야에 도전하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아름다운 도전기’를 읽어보고 싶은 욕심이 나를 자극하는 중이다.

 

어쨌든 공부란 평생 이어져야 할 일이다. 지식을 쌓기 위해서도 필요하겠지만, 스스로 성찰하며 흔들리지 않음으로 더욱 단단해지기 위해서 지속해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거실에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 큰 아이가 종종 말한다. 엄마가 쓴 서평을 읽어보고 싶어요...

문득 생각하기를 나는 좋은 엄마인가, 의문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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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초판 출간 80주년 기념판)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이상원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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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베카

-어느 조작된 공포감에 대해

 

 

여인의 변신은 무죄라 했다. 이 말이 왜 생겨난 것일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사실은 그 변화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쩌다보니 그 변화를 향해 달리는 급행열차에 올라타게 된 사람도 있지 않을까. 의도된 채 혹은 의도치 않게 말이다.

소설 ‘레베카’는 대프니 듀 모리에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본 책이라고 했다. 책을 장식하는 붉은 띠지에는 ‘레베카 출간 80주년’이라는 문구가 실렸다. 이쯤 되면 고전이다. 긴 시간동안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다는 말이다.

책을 사놓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어느 누군가의 북 클럽 동영상을 보다가 알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 이 책을 이야기하던 한 이웃이 말하기를,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처음 읽자마자 끝까지 다 읽어냈었다는 그 말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물론 개개인의 취향과 소소한 선택이 보태어진 것의 결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소설 레베카가 책이 지닌 강한 흡입력으로 많은 독자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주인공 나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의지할 데 없이 외로운 처지다. 나는 중년 여성(벤호퍼 부인)의 말동무를 겸한 비서직을 하면서 약간의 급여를 받으며 생활하고 있었다. 벤호퍼 부인은 말도 많고 집요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스스로 요란한 성격을 주체할 수 없어 보이는 케릭터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때 이 중년 여성의 비유를 맞추는 게 달갑지만은 않아 힘들어하던 나는, 여행지 몬테카를로에서 전 부인과 이별한 한 중년의 남성(맥심)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둘은 곧 결혼한다. 이십년 가까운 나이차이로 인해 이들 남녀의 관계는 아버지와 딸처럼 보인다. 때문에 이 사람들의 관계는 누가 보더라도 어색하게 보인다. 여기에서 여주인공이 지니고 있는 자격지심이 자신의 낮은 신분과 경제적 곤란함과 신분상승이라는 요소와 맞물려 어떻게 인물의 심리적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는가, 라는 부분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얼떨결에 예상하지 못한 채 결정된 결혼이라는 작품의 설정 자체가 묘한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얼핏보면 신분상승에 관한 스토리처럼 보인다. 의도치 않게 신분상승을 위한 급행열차에 오르게 된 주인공 나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그저 그런 여자의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이야기일 뿐일까.

 

600페이지 가량의 장편에 속하는 소설은 처음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무언가에 쫒기 듯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있다. 그리고 꿈속을 헤매는 장면이 묘사된다. 거대하고 웅장한 분위기다. 그러나 깊이 들어갈수록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물과 드넓은 맨덜리의 정원에 가득 들어찬 칡덩굴, 기괴하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많은 나무줄기를 비롯해 뾰족하게 뻗은 가시덩굴을 표현함으로써 작가는 주인공 나의 불안한 심리묘사에 집중한다.

소설은 비교적 빠른 전개로 주인공 내(작가는 끝까지 나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 이 또한 의도된 부분일 수도 있을까)가 멘덜리의 대 저택으로 들어가면서 이어진다. 전체 작품에서 맨덜리라는 저택은 소설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된다. 그리고 주인공 나는 이곳에서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적과 같은 실체와 대면하게 된다. 아니다. 보이지는 않으나 ‘남아있는 실체’라고 해야 더 적당할 것도 같다. 각설하고 이로 인해 생겨난 관계와 갈등의 요소 사이에서 부딪히는 주인공 나는, 처음의 어리고 순진한 모습에서 극도의 난관을 극복해가는 성숙함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대해 생각했었다. 소설 레베카를 읽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은 바로 이 두려움에 대한 인간 개개인의 반응정도와, 그로 인해 생겨나는 다양한 상황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정숙함과 비 정숙함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상반된 이미지에 대한 것이었다.

주인공 내가 맥심을 따라 대저택 맨덜리에 들어가면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여성은 드윈터 부인이다. 그녀는 맥심의 전처 레베카의 시중을 들며 맨덜리의 모든 것을 관할하는 집사와 같은 역할로 등장하는 동시에,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 나와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보이지 않는 실체, 아니 남겨진 실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조작하고 나를 몰아세우는 인물이 바로 드윈터 부인이다. 주인공 나는 드윈터 부인 앞에서 늘 위축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며 레베카의 크고 무거운 그림자에 눌려 불안한 공포감을 느낀다.

죽은 자의 물건이 남겨진 공간에는 죽은 자의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맨덜리 그 어느 곳에서도 주인공인 내가 머물만한 공간을 찾지 못한다. 여기서 나라는 인물을 더 불안하게 했던 요소는 남편 맥심이 취했던 행동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죽은 전처를 그리워하며 마치 죽은 영혼이 쳐놓은 그물에 갇혀 지내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때문에 나는 남편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확신하지 못하고, 드윈터 부인의 압박에 의해 존재감에 대한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극의 후반부에 가서 내가(주인공) 드윈터 부인 앞에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계기 역시, 바로 남편과의 관계에서 신뢰를 비롯해서 사랑을 확인하면서부터였기 때문이라는 점 또한 같이 짚어볼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소설속 맥심과 나.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떤 거대한 비밀을 함께 공유하면서 돈독해지게 된다.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특별한 상황으로 인해 이들의 관계는 돈독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변모해가기도 한다.

 

정숙함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가. 맥심은 몬테카를로에서 순진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나를 향해 결혼을 청한다. 작품 안에서 그는 정숙함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는데, 마치 어린 주인공인 내게서 보았던 여성스러움과 정숙함에 매료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듯하다. 그는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조건으로, 무조건적으로 정형화된 여성성과 정숙함만을 보려했던 것일까. 어찌 보면 너무 고리타분한 선별기준이 아닐 수 없지만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 맥심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는 말이다.

 

책 말미에 ‘결국 승리한 사람은 누구일까’ 라는 내용으로 옮긴이의 글이 실렸다. 옮긴이의 시선은 현재 시대상에 맞춰 페미니즘 소견에 의해 피력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남성 위주의 시선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동시에 독립적인 여성성에 포커스를 맞춘 시선이라고 볼 수 있다.

주인공 나와 레베카 두 여성 중에서 과연 누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을까. 딴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두고 승자와 패자를 운운하는 것 자체가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작품에서 종종 ‘레베카가 이겼다’ 라는 표현이 언급되는 바, 또 이 부분을 거론하고 있는 옮긴이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같이 생각해볼 만한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 레베카는 인물의 심리 변화에 따른 디테일하고 섬세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느슨해질 수 있는 부분에서 짧은 문장이 가미된 구성으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독자의 시선을 끝까지 붙잡고 있는데 성공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한편으로는 연애소설로 시작해서 추리소설로 끝났다고 해도 무방한 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후반부에 갈수록 속도감이 빨라져 몰입정도가 컸던 것 같다.

 

레베카와 주인공 나를 향한 작가의 의도된 시선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해볼 수 있을까. 이제 어느 상황에서나 등장하는 조작된 공포감에 대해 혹은 이 공포감과 두려움에 잠식되는 불안한 인간 심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일까. 질문들이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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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을 밝히는 사람 지양어린이의 세계 명작 그림책 66
아리네 삭스 지음, 안 드 보더 그림, 최진영 옮김 / 지양어린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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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을 밝히는 사람

 

그는 어두운 밤길을 밝히는 일을 한다. 매일밤마다 그는 가로등을 밝히기 위해 눈이 내려 얼어붙은 길에도 살을 에는 혹한에도 망설임 없이 길을 나선다. 기다란 죽마를 신고 또각또각 한발 한발 나아간다.

작가 ‘아리네 삭스’의 글과 ‘안 드 보더’의 그림이 표현해내고 있는 그림책 ‘가로등을 밝히는 사람’은 그림책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림책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이 그림책을 보고 있으면 작가 오 헨리의 단편 소설 ‘마지막 잎새’가 연상된다. 아무런 대가 없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 가로등을 밝히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사내는 우리가 바라는, 현실 속에서 잊고 살았던 선한 사마리아의 여인을 연상하게 하는 그 이미지와 닮아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잠든 깊은 밤. 텅 빈 거리를 홀로 걸으며 그는 어둠을 몰아내고 따사로움과 온화함을 가득 품은 빛나는 빛을 데려온다. 어둠과 빛은 상반되는 이미지다. 작품에서 작가는 이 사내의 시선을 빌려와 슬픔 속에 있는 여인, 외로워하는 이방인, 아버지를 기다리며 홀로 지쳐 잠이든 어린 아이, 쓸쓸함 가운데 서로를 의지하며 지내는 어느 노부부와 병중에 있는 아내를 지키는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각자의 슬픔으로 힘들어하는 모습들이다. 등불을 밝히는 사내는 이들의 사연을 알고 고민한다. 그리고 그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이야기가 전달해주는 상징에 대해 조금만 더 천천히 생각해보자. 인물들은 처음 서로를 모르고 고립된 채 우울해하던 인물들이지만 등불을 밝히는 사내의 도움(개입)으로 인해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는 존재로 변모하게 된다. 이야기 속에는 화려하거나 뜨겁거나 혹은 호사스러운 것 하나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소박하고 더더욱 인간미가 녹아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겉치레에서 벗어난 어느 외로운 젊은이들은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소녀는 노부부를 찾아가 보통 사람들이 꿈꾸며 그리워하는 소박한 가족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새겨간다. 그런가하면 병든 아내와 그 남편에게 다가가 위로와 격려를 건넨다. 작품 안에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등불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 관계를 위해 혼자 고민하고 맘 졸이며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던, 가로등을 밝히는 사내는 말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작가는 가로등을 밝히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외되고 외로운 이들에게 그리고 어둠 속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불을 밝히는 존재로 다가서게 한다. 그 영향 때문이었을까. 마치 긍정의 도미노 현상처럼 따뜻한 마음의 선한 행동은 사람들을 서로 감동시키고, 또 다른 이들에게로 그 영향이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은 어떤가. 그림책이기 때문에 그림체와 색 구성에 대한 것도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기는 하다. 이번 작품에서 대체로 어두운 회색과 채도가 낮은 블루 컬러를 많이 썼던 것을 보면 아마도 인물들의 심리와 이들이 처한 상황을 그림으로 표현해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림은 인물들이 관계를 형성하면서 서로에게 의미 있는 사람으로 각인되는 과정에서부터 밝은 색의 파스텔 톤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가는 등불을 밝히는 사내에게 집중되면서부터 어두워진다.

중간중간 아무런 글자 없이 그림만으로 채워진 부분에서는 그림책만이 지닐 수 있는 공간의 여백을 느낄 수 있다. 이 여백에서 독자는 이야기의 의미를 생각하고 함축과 상징을 느끼며 조금 더 몰입할 수 있을 듯하다. 짙고 푸른 어둔 밤. 흰 물결처럼 흘러가는 구름과 한 가운에 떠있는 하얀 달의 그림은 어떤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희끗희끗 내리는 눈발을 바라보던 순한 강아지의 눈동자에 하얗게 내리는 눈이 그대로 박혀있다. 이 그림은 또 무슨 의미인가 말이다.

 

타인을 위해 가로등을 밝혔던 빛은 어디로 가버린 건지, 그의 방에는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은 채 어둡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아 보인다. 사람들에게 소소한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던 사내는 마침내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던가보다.

 

따뜻함이란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이 사내가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인지. 왜 이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이 들려올지. 딴은 이렇게 그림책으로나마 이것이 인간 본연의 선함이 아닐까, 설명해줄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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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사춘기가 되면 엄마는 혼자서 눈물을 흘린다
에토 마키 지음, 김슬기 옮김 / 유노라이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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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혼자서 눈물을 흘린다



사춘기 딸을 키우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사실은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을 수도 , 혹은 그 무엇으로도 충분하지 않을만큼 알고 싶은 것도, 얻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너무나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를 키우는 데 방법이 따로 있기나 한건지에 대한 반복되는 의문에는 알 수 없다는 대답을 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처럼 무언가에 이끌려 책을 읽는 까닭은 사춘기 딸과 매일같이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 자신이 지쳐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도 엄마인 내가 힘들어하기 때문이라는 솔직한 심정을 끄적거린다.



부끄러운가. 아이가 사춘기가 접어들 시기에 엄마는 갱년기에 접어든다고 했다. 시기적으로 보면 얼핏 맞아 떨어진다. 어느해였던가 학교에서 한 강사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춘기 아이와 갱년기 엄마가 붙으면 누가 이길까요?. 사춘기와 갱년기 둘 중에 더 무서운 게 무엇일까요?"
정답은 갱년기라고 했다. 그 말을 이미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던 남편은 요즘 종종 말하곤 한다.

"당신은 아직 갱년기가 아니야...딸한테 매번 지고 있으니 말이지."



아들과 딸을 키운다. 적어도 현재만 들여다볼 때 사춘기란 거대한 장벽이 아들보다는 딸한테 먼저 도착한 듯하다. 그런데 요새 자꾸 아들이 드세지고 있다.
큰일이다. 두 아이가 모두 거대 장벽 앞에서 대치 중이니 집은 매일같이 교전과 보이기 위한 허울의 정전의 시공간을 넘나든다. 여기저기서 포화소리가 넘치고 화염이 사라지지 않는  것만 같다.
나는 가끔 내 입으로  매일같이 먼저 '살려줘! 휴전휴전!!' 을 외치고 포악을 떨고 있는건 아닌가, 걱정을  한다. 사실은 그 순간을 벗어나고자.. 집을 나오기도 한다.



책은 어떤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책을 읽고 나서 한 마디로 요약을 하자면 '말을 잘 하자!'로 정리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고, 상대의 기분과 감정을 배려해서 앞서지도 말 것이며, 너무 과하지도 말고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잘 대처하듯이 말을 하라는 듯 보인다.

그리고 무엇보다 적절한 시기를 기다릴 것을 이야기한다. 기다림의 묘약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뜻 안에는 부모 특히 엄마들의 '바람직한 행동의 방향과 흐름'이 언급되고 있어보인다.



저자는 성격이 서로 다른 두 딸을 키우며 경험했던 이야기와 함께 다양한 사춘기 시절의 딸들의 심리와 교육, 엄마와의 관계를 비롯해 아빠의 관계등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었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자. 책은 심리학적 접근으로 보는 관계형성에 대한 이야기. 적절한 규제와 약속.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서로 인정하며  목적과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한 학업과 관련한 성적 관리법. 신체적 변화에 따른 바른 성교육까지 언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각설하고 무엇보다도 이번 책에서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적절한 말과 함께 이어지는 '관계형성'일 것이다.

각각의 장마다 어렵지 않게 간단하게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어 필요한 부부을 먼저 읽어봐도 무난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와 닿았던 부분 몇 가지를 언급해보면 다음과 같다.



'딸이 온전히 믿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딸과의 전쟁은 괴롭지만, 딸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때는 지금뿐이라는 생각으로  체력을 비축해서 딸과 마주해야 합니다.p48-19' -

가슴이 울컥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온전히 믿는 사람은 엄마 뿐이라니.  세상의 모든 딸들은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엄마를 닮아가는 삶을 산다고 했던가. 지난밤 맘이 상해 톨아져 훌쩍거리면서 잠이 들었던 딸이, 아침에 다시 내 품을 파고드는걸 생각하며 수없이 반복했던 생각은 '사랑하는 미운 내딸'이었다.


'공감'이 안 되면 '이해'라도 하라.
-공감할 수 없다면 이해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할 수도 있구나'하고 말이죠.p52
사실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말인데 현실적으로는 참 어려운 대처법이다. 늘 어른으로서의 엄마에게는 인내하기라는 험난한 과정이 기다리는 듯하다. 너무나도 교과서적인 표현이기에.. 답답해져오면서도 어쩌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이 문장 하나로 인해 다시 무릎을 꺾이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우리 딸답다'는 말은 최고의 창찬
--너답다, 라는 말을 추천합니다. 이 말은 최고의 칭찬입니다.
혼내는 목적이 '전달'에 있다면, 칭찬의 목적은 '수용'과 '인정'에 있습니다. '너다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p137

관계개선을 위한 일종의 화해무드 조성을 위한 조언의 일부라고 봐도 좋겠다. 언제까지나 적대감으로 대치할 수는 없는 것이 가족이고, 딸이고, 그리고 또 아들이지 않은가 말이다.



생각해보면 굳이 사춘기 속에서 힘들어하는 딸을 타이틀로 하지 않아도 될법한 책이다. 세상에는 딸만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딸과 아들 모두 함께 생각하며 읽어봐도 좋을듯 한 책이다.

딴은 지금 나와 내 아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각각의 상황에 맞게 정확한 도움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아마도 그런 책은 세상에 단 한권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가볍게 참고하며 읽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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