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더디 세계문학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황재광 옮김 / 더디(더디퍼런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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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그가 죽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주인공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의 죽음이 위로가 되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이 무슨 고약한 심보인가. 정말 못됐다.

정작 그의 죽음은 너무나 외로웠고, 그래서 더 인간적인 인물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을 무대로 그려진다. 책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책이 지니는 의미는 생각보다 큰 듯하다. 전쟁이 가져다준 폐허와 인간성의 상실 이외에 이 시기에 미국에서 보이고 있는 상징적인 모습과 함께, 책은 아메리칸 드림과 연결고리를 같이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접하고 있으면 복잡하기도 하고 엄숙한 분위기다.

 

인물에 더 집중해보자. 여기서 '나'는 닉 케러웨이며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중요한 인물이다. 또한 한층 더 중요한 인물인 이웃집에 사는 개츠비와  친구 사이로 등장한다. 그리고 몇 명의 주변 인물들이 등장한다. 개츠비의 옛 여인인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 톰, 그리고 데이지의 친구이며 골프선수인 조던 베이커와 정비소를 꾸려나가는 조지윌슨과 그의 아내 머틀 윌슨 정도를 기억하면 좋겠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를 정리해야만 한다.

이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진다. 돈이 많은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 돈의 유무는 비겁한 기준을 정한다. 한 사람을 뜬금없이 위대한 영웅으로 만들기도 하고, 반면에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일시에 추락시켜버리기도 하는 위험한 기준점이다. 결국 책 속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은 갑자기 영웅처럼 떠받쳐지는 인물과 추락하는 인물들로 나뉜다고 볼 수도 있다.

 

처음에 개츠비는 누구에게나 멋있는 군인출신의 살아있는 영웅이었다. 아니 그렇게 영웅대접을 받았다. 그는 매너 그리고 돈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도 훌륭한 이미지를 잃지 않으며 사람들을 대한다. 때문에 일면식도 없는 이들이 그의 집을 밤마다 찾아와 술을 마시고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만난다. 그러나 그들이 쫒는 영웅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개츠비를 영웅으로 만든 사람들은 정작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며 그저 떠도는 소문만이 진실처럼 느껴졌을 뿐이었다. 소설 속 개츠비는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의 욕심에 맞게 새로 편집한 반쪽짜리 삶을 살아가다 과거의 연인 데이지와 조우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그 자신의 삶과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소설은 망가져버린 인간성, 비뚤어진 욕망, 개인주의와 이기주의 혹은 물질만능주의 등등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작가는 위대한 개츠비라는 표현을 썼을까. 반이법일까. 작가는 마지막까지 개츠비라는 인물과 그 배경에 부정적인 요소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불공정한 방법으로 취한 재산은 거짓의 산물일 수밖에 없었다. 나 닉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개츠비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였으며 외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관계는 영원하지 않은 것인가보다. 특히나 남녀의 관계는 말이다. 한순간 그들이 말하는 그 영원성을 믿었던 사람들이, 믿지 않는 이들보다 더 어리숙하게 보이는 까닭은 소설 속 인물 개츠비의 선택에서 보이는 미련함 때문에 더 그렇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첫사랑을 다시 만났을 때 혼란스러워하는 여인 데이지. 자신 역시 정부를 사랑하며 일탈을 즐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과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남편 톰이라는 인물 역시 이기적이면서 불안한 인물이다. 특히나 과거의 남자와 현재 남편 사이에서 저울질하듯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여성 데이지의 이미지는 성숙하지 않은 아이 같은 모습으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각인되는 개츠비의 존재감이다. 닉이 그랬던 것처럼 개츠비를 두고 이야기할 때 위대한 개츠비, 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사람들 특히나 데이지의 달라진 모습으로 바로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고 얽매이는 모습과 인식을 개츠비가 간파해냈다는 사실이다. 결국 그는 다른 여타의 사람들과 비슷한 위선적이며 형식적인 완벽함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주변 인물들과 분명한 차이를 지닌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책은 많은 이유로 인해 인간 스스로가 잃어버린 인간성의 상실과 그에 반해 여전히 흔들리는 인간성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이들의 모습처럼 다양한 그림과 울림을 보여준다. 묘한 심리적 중독성이 느껴지는 것은 왜인지 모른다. 모든 것을 타락과 퇴폐를 감지하는 시선으로만 바라 볼 수 없기 때문인가.

 

-“그녀가 너무 멀기만 느껴져요. 그녀를 이해시키기가 너무 어려워요”. 그가 말했다

 

-“나는 당신을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라고 말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나라면 그녀에게서 너무 많은 걸 바라지 않을 겁니다.” 내가 감히 한마디 거들어보았다. -“과거는 되풀이할 수 없거든요.”

 

-...... 내 짐작에 그는 자기가 데이지를 사랑하도록 하게 한 그 무엇, 혹은 자신에 대한 어떤 관념 같은 것을 되찾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 이후 그의 삶은 혼란스럽고 무질서했지만, 행여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서 모든 것을 천천히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그는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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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커스티 애플바움 지음, 김아림 옮김 / 리듬문고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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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

-경계 그리고  성장

    

 

이상한 마을 하나가 있다. 시대적으로 보면 먼 미래의 어느 시기일 것도 같은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계문명과는 동떨어진 채 소박하게 자급자족의 생활을 해나가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평생 흙을 만지면서 밭을 가꾸고 농장을 꾸려가고, 목수는 목수의 일을, 화가는 화가의 일, 간호사는 간호사의 일을 하며 살아간다. 누구나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해나간다. 뭐랄까. 이 마을 사람들에게는 새롭거나 신선한 의욕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먼 시간 너머의 그 언제부터였는지, 이미 그렇게 결정되어 왔던 일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하다. 다만 이들을 한데 묶어놓은 힘. 이 보이지 않는 힘은 그들의 느슨한 삶에 비해 묘하게도 매우 큰 압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조용한 마을, 편안한마을, 이기심 내지는 많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화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마을. 첫째 아이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학교에서, 마을공동체나 가정에서나 이들은 모두 첫째 아이를 우상처럼 챙기는 모습을 보인다. 조용한 전쟁에 나가기 위한 첫째들을 위해서 말이다. 첫째아이들은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경계선 너머로 전쟁을 치르러 떠나야 한다. 이를테면 선택받은 희생이다. 남겨진 이들을 위한 희생. 또한 그것이 이 마을의 오래된 규칙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규칙이 갖는 모순을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눈으로 보는 것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까. 보이는 것만이 진실일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리고 알고자 하는 것 역시 인간이 지니는 가장 기본적이 욕구가 아닐까.

    

 

자. 이제는 경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책에서 경계는 중요한 의미를 상징한다. 일반적으로 경계는 여러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하나의 기준에 의해 나누는 어느 지점을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무엇인가에 대한 두려움이나 타인으로부터 오는 공포감으로부터 자신의 안정을 살피는 방어심리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능동적 의미에서의 경계든, 수동적 의미의 경계든지 경계라는 어휘가 주는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책에서 등장하는 경계는 바로 바깥세상으로부터 이 마을 즉 ‘페니스 윅’을 보호하는 동시에, 철저하게 부정하고 거부당하는 바깥세상으로의 출구를 의미하기도 한다.

    

 

경계는 안과 밖을 구분하는 기준점이 된다. 어쩌면 선과 악의 구분과도 같다. 이 경계를 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며 경계선 안쪽에 멈추어 있는 이는 선한 사람이라는 명제를 각인시킨다. 사실 경계는 어느 쪽을 기준으로 하는가에 다라 그 결과와 해석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보통 내가 있는 쪽이 선하고 안전하다고 했을 때, 경계 너머의 곳은 그 반대의 이미지를 지닌다. 일반적 해석은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한 가지 맹점이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책은 그 맹점을 인지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간다.

    

 

[나는 그곳에 들어섰다. 경계의 반대편 말이다.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 공기에서 풀과 빨간 사과 냄새가 났다 … … … …

 

“내 말이 맞지? 여기저 저기나 똑같아.” 우나가 말했다.]p133

 

 

그리고 여기 매기, 라고 불리는 소녀가 있다. 그녀는 첫째가 아닌 둘째다. 전쟁에 나가기 위해 준비된 첫째들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선택받아 살아가게 되는 아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설은 이 둘째 아이를 주인공으로 소개한다. 그녀는 방랑자라 불리는 경계 밖에 사는 한 아이(우나)와 친구가 되면서, 마을의 촌장이 주창하는 모든 경계의 위험성을 뛰어넘어 경계 밖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간다. 타인으로 향하는 의구심과 자신에게로 향하는 수많은 질문들을 끌어안고 메기는 그렇게 경계를 뛰어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암묵적으로 강요되고 있는 틀을 깨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선택에 따른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경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 책임과 의무가 뒷받침되는 ‘성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늘 그렇지만 진실은 언제나 살짝 뒤로 물러나있다. 그리고 인물들은 늘 진실을 위해 조금씩 나아간다. 저항을 뛰어넘으며 감추어졌던 비밀을 알아가면서 말이다.

    

 

이 마을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의 마지막에서 사람들은 마을을 처음 구성하고 규칙을 세운 이의 동상을 망치로 깨는 행동을 보인다. 한사람씩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동상의 왼쪽 팔을 다른 쪽 팔을 부스기 시작하며, 그들을 옥죄이고 있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어쩐지 구 소련을 상징하는 레닌 동상의 철거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자유란 무엇일까. 어쨌든 모든 경계는 애매하다. 반드시 넘어야 할 것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것 역시 경계 안에 있으니 말이다. 청소년들이 읽어보면 좋을 것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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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수학책 - 그림으로 이해하는 일상 속 수학 개념들
벤 올린 지음, 김성훈 옮김 / 북라이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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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수학책

-세상의 모든 것은 수학?

 

저자 벤 올린은 수학자인 동시에 수학교사다. 미국이든 한국이든 수학은 공통적으로 아이들에게 배척을 당하는 처량한 학문이었던가. 그가 소개하는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수학교사로서 느끼는 낭패감과 좌절감, 획일적인 교육 시스템에 의한 회의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이러한 요소가 책을 쓰는데 강력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도 같다.

 

그가 말하기를 수학이란, 우리가 살아가는데 많은 부분에서 적용되고 활용되는 분야라고 했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부분에서 수학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아니 아니다. 벤 올린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황당함은 곧 묘한 황홀감으로 변해간다.

달변가의 면모를 갖춘 이 수학자가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수학만을 이야기 할 거라는 선입견은 일단 접어두자. 그가 설명하는 대상은 수학적인 동시에 일상적인 성격의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책은 수학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흥미롭기까지하다. 여기에서 나는 내가 책을 보는 관점을 말하고 있는 중이다. 수학이나 과학과는 거리가 먼 공부를 해왔던 내 관점과 시선이 갖는 의문은 바로 이런 것이다. 수학을 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은 왜 뜬금없이 흥미로운가, 라는 의구심들. 그리고 이제 나는 전혀 수학적이지 않은 관점으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노력하려 한다.

 

저자는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당연한 상황에 의한 결과라고 믿었던 것들을 하나씩 떼어 분석한다. 물론 수학의 공식으로 도배하는 일은 없으니 미리 겁을 먹지는 말자. 그런데 어디를 보더라도 분명 수학적이니 참 묘하다는 말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것은 수학인 동시에 과학(물리학)이고, 생물학이며 역사이고, 사회학이고 경영학이며 동시에 결국에는 인간이 접하며 살아가는 세상과 인간의 이야기인 바로 인문학까지 확대된다. 그 거대 인문학 안에 수학이 숨어있다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었을까.

 

그가 말하는 세상의 이야기 속에는 신기하게도 각각의 도형이 갖는 이론과 원리가 담겨져 있다. 로또를 사서 당첨이 될 확률과 같이 이 확률의 개념만이 지니는 묘한 수의 가능성에 대한 매력조차도 전혀 이상하거나 어렵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끌림과 같다. 삼각형이 지닌 강력한 힘과 아기와 담요에 관한 이야기. 혹은 예술가의 실수와 버지니아 울프, 미국 대선 이야기까지 정말이지 그의 언변은 광범위로 뻗어나간다. 말도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당연하게 이 수학자는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는다.

 

수학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모든 학문을 끌어안는 글쓰기. 이것이 이번 책의 장점이자 강력한 힘이다. ‘이것은 당신을 위한 수학이다!’ 라고 저자 벤은 말한다. 과연 그의 말처럼 책을 읽는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적어도 수학을 좋아하지 않았던 세상의 절반을 차지하는 이들에게는(나머지 절반은 수학은 무척 좋아했던 이들이라고 가정해야만한다), 수학이 던져주었던 중악감에서 일정부분 벗어날 수 있는 ‘생각의 기회’를 주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학이 있고 세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수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기쁨이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다. 저자 벤 올린, 그의 책 ‘이상한 수학책’은 수학적으로 바라보기, 수학적으로 생각하기의 최종적인 종합물인 동시에 방대하고 아기자기한 결과물이다. 이제 벤 올린 그의 세상에 잠시 동참해 책이 선사하는 흥미로운 세상을 경험해보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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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반일 종족주의> 비판
김종성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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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냉철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했다. 우리는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것일까.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을 이야기 할 때, 과연 얼마나 냉철한 시선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감정에 치우치지 않을 것. 역사를 역사 그 자체의 사실로서 받아들일 것. 생각 같아서는 말 그대로 따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이다지도 혼란스럽다. 한편으로는 바로 앞 문장에서 혼란스럽다, 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혼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도 생각했다. 뭐 비슷비슷한 말이긴하지만 말이다.

 

반일 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라는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편하게 다가온 책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책이 반격하고 있는 텍스트 ‘반일 종족주의’ 관련한 책을 아직 읽어보지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서로 비교하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전무하다고 봐야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라면 일방적으로 한쪽의 비판적 논거만을 접했을 때 자연스럽게 처하게 되는 위험성까지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말이 된다. 더 들어볼 가치도 없으며 살펴볼 건더기조차 없어 보인다고해도 반대편 입장의 한줄 변명은 들어봐야 하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이다. 기본적인 이론은 그렇다는 말이다.

 

책은 반일 종족주의를 주창하는 뉴라이트들의 잘못된 사상과 이론 그들의 행보에 대한 생생한 비판과 논리적 반박을 조목조목 싣고 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뉴라이트라는 표현조차 생경스러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 표현이 새롭게 업그레이드? 식으로 달라졌을 뿐이지, 우리 삶 속에 뉴라이트라는 존재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공존하지 않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한가지 확실하게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보다 현재에 들어와서 이러한 존재성과 문제의식에 대해 보다 명확하게 진위를 가려내고자하는 의도들이 활발해져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저자 김종성이 준비한 사료와 다양한 예증을 통해서 우리는 반일 종족주의의 부끄러운 민낯과 만나게 된다. 위안부 문제, 독도 문제, 종군과 징용 문제 등 많은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라온다.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위의 각각의 문제들에 대한 관점과 해석이 불편한 까닭은, 많은 대중들의 호응에 융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들은 비난의 화살을 온 몸으로 받는 사태를 초래하고 있다. 저자 김종성의 주장을 살펴보면 이들의 문제인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오류의 근원은, 여전히 일본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있는 구태의연한 인식 때문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객관적 시선을 유지해야만 한다. 불편한 시선을 잠시 내려놓고 거리감을 두며 생각해봐야 한다. 책을 읽는 동안 뉴라이트들의 주장과 이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또 다른 주장 모두 불편한 시선으로 지켜봐야 했던 것이 사실이다. 책의 분위기는 지나치게 격양되어 있다. 때론 비판을 위한 비판마저도 일방적인 합리화의 단면을 보는 듯해서, 객관적 시선과 판단력으로 중무장한 채 책을 읽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불편하다는 표현을 얼마나 자주 언급하는지 잘 모르겠다. 고장난 의식과 비판들. 마치 또다른 서슬퍼런 이념의 칼날을 보는 듯하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신념이라는 말을 남겼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수정하며 옳은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한 의식 역시 신념에서 나오는 것이며, 행동화하는 것 역시 신념이 없으면 진행하기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딴은 저자가 언급한 신념을 차치하고서, 개개인이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하나의 신념이 존재해야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신념은 개인의 사상과 정서적 밑바탕에 깊이 파고들어가 서로 상호작용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신념은 기준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고, 그 기준은 나아가 행동으로 전환된다. 따라서 어떠한 신념을 갖는가가 관건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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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지나간 후
상드린 콜레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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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지나간 후

-본능과 선택

 

이제 누가 아침을 차려줄까?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 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떤 크기의 상처로 깊이 각인되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프랑스 작가 상드린 콜레트의 작품 ‘파도가 지나간 후’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니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제 누가 아침을 차려줄까? 라는 사소하면서도 절대적인 극한의 절망감.

책을 소개하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단지 부모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와 책임’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흥미로울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었던가보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후에 들었던 생각은 조금은 달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선택을 주관하는 인간이라는 범위라고 해야할지. 선택을 하는 인간의 범주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선택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함께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던가보다.

 

생각해보자. 아주 평범한 일상처럼 새날을 시작하며 아침을 먹는 순간을. 이 순간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먹는 행동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말이다. 갑자기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취할 수 있는 나이라 하더라도, 만약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고 했을 때 이는 보통의 생존의 문제가 아닌 더 복잡하고 집요한 동시에 처절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생존 법칙을 운운해야 한다. 바로 책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처럼 말이다.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어느날 바다가 거대한 괴물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사람들의 마을을 우악스럽게 삼켜버린 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웃마을도 아니 바로 옆집으로 가는 길조차 바닷물이 들어와 모두 사라진 현실은 가장 먼저 소설이 던져주는 육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파타(아빠)와 마디(엄마) 그리고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이 사는 집은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이 사는 집을 향해 밀려들어는 바다의 존재감은 먹잇감을 향해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는 맹수와도 같았다.

집이 곧 잠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 루이, 페린, 노에 세 아이가 버려진다. 다리가 불편해서, 한쪽 눈이 실명한 아이라서, 그리고 또래보다 작은 체구라서 라는 설정이 뒤따른다. 어쩌면 파타의 생각처럼 필요가치에 의한 선택과 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건강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식들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연히 비난 받아야하거나 혹은 오로지 비난만을 할 수는 없는 이야기를 품은 소설 ‘파도가 지나간 후’ 는 어른의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에 의해 버려져 섬에 남겨진 아이들의 시점과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던 어른 즉 부모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책에서 시작과 끝은 결국 생존에 대한 인간의 집념과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가하면 생존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생존에 반대되는 의미는 죽음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그것이 전쟁이든, 자연재해든 어른에게 버려진다는 것, 혹은 어른들과 떨어진다는 것은 바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바로 죽음과 대면한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어쩌면 바다 앞에서 끈질기게 투항하는 생명력 즉 생존이라는 것과 동시에 결국 사멸하고마는 죽음을 대조적으로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이와 페린 그리고 노에. 이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고자했으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대상은 배타적 대상으로 도움이 되는 대상은 이타적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살펴볼만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데스와, 바다를 지나가다 만났던 수영하던 사내와 그 아들들, 아이들이 만난 노파 두 명 그리고 파타와 마디가 탄 배가 만났던 정체모를 해양 생명체에 대한 에피소드, 뭍에서 파타와 마디를 포함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본능은 때론 격하게 위협적이다. 나의 본능과 나의 목적을 위해서 때론 선택의 결과에 따른 비열하고 이중적인 잣대를 견디어야만 하고(버려졌음으로 희망이 없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했다), 때론 자의적 혹은 타의적 희생(로테와 마테오의 죽음)도 감내해야만 한다. 그런데 누가 과연 엄연한 잣대로 계산할 수 없는 이러한 희생을 떠안을 수 있는가말이다.

반면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남겨진 것 역시 선택받음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이다. 세 아이들은 남겨질 대상으로 선택한 소설 속 부모의 예지와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다른 결과로 스스로의 문제를 떠안고 헤쳐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절망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선택받은 대상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조금은 색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도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쨌든 말이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었다. 마지막까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길을 헤맨다면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현실적으로 지극히 무모해보이는 모성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 그나마 작가가 말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모성애의 발현은 또 다른 선택의 결과로 이해되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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