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가 지나간 후
상드린 콜레트 지음, 이세진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평점 :
절판


파도가 지나간 후

-본능과 선택

 

이제 누가 아침을 차려줄까?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 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어떤 크기의 상처로 깊이 각인되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프랑스 작가 상드린 콜레트의 작품 ‘파도가 지나간 후’에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니 선택받지 못한’ 아이들이 등장한다. 이제 누가 아침을 차려줄까? 라는 사소하면서도 절대적인 극한의 절망감.

책을 소개하는 글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단지 부모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성적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와 책임’에 대한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 책이 더 흥미로울 것이라는 기대치가 있었던가보다. 그런데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난후에 들었던 생각은 조금은 달랐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선택을 주관하는 인간이라는 범위라고 해야할지. 선택을 하는 인간의 범주에는 어른들뿐만 아니라 선택받지 못했던 아이들도 함께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던가보다.

 

생각해보자. 아주 평범한 일상처럼 새날을 시작하며 아침을 먹는 순간을. 이 순간은 무엇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 먹는 행동은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말이다. 갑자기 묘한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취할 수 있는 나이라 하더라도, 만약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고 했을 때 이는 보통의 생존의 문제가 아닌 더 복잡하고 집요한 동시에 처절하면서도 공포스러운 생존 법칙을 운운해야 한다. 바로 책 속에 등장하는 가족들처럼 말이다. 이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던 것일까.

 

어느날 바다가 거대한 괴물처럼 하늘로 솟구쳐 올라 사람들의 마을을 우악스럽게 삼켜버린 후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웃마을도 아니 바로 옆집으로 가는 길조차 바닷물이 들어와 모두 사라진 현실은 가장 먼저 소설이 던져주는 육중한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파타(아빠)와 마디(엄마) 그리고 아홉이나 되는 아이들이 사는 집은 섬처럼 완전히 고립되었다. 그리고 하루하루 시간이 지나갈수록 이들이 사는 집을 향해 밀려들어는 바다의 존재감은 먹잇감을 향해 천천히 느리게 움직이는 맹수와도 같았다.

집이 곧 잠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결과 루이, 페린, 노에 세 아이가 버려진다. 다리가 불편해서, 한쪽 눈이 실명한 아이라서, 그리고 또래보다 작은 체구라서 라는 설정이 뒤따른다. 어쩌면 파타의 생각처럼 필요가치에 의한 선택과 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건강하고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자식들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당연히 비난 받아야하거나 혹은 오로지 비난만을 할 수는 없는 이야기를 품은 소설 ‘파도가 지나간 후’ 는 어른의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에 의해 버려져 섬에 남겨진 아이들의 시점과 아이를 두고 떠나야 했던 어른 즉 부모의 시점이 교차되면서 전개된다.

 

책에서 시작과 끝은 결국 생존에 대한 인간의 집념과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런가하면 생존과 동시에 죽음이라는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생존에 반대되는 의미는 죽음이다. 위험한 상황에서 그것이 전쟁이든, 자연재해든 어른에게 버려진다는 것, 혹은 어른들과 떨어진다는 것은 바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동시에 바로 죽음과 대면한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는 어쩌면 바다 앞에서 끈질기게 투항하는 생명력 즉 생존이라는 것과 동시에 결국 사멸하고마는 죽음을 대조적으로 상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이와 페린 그리고 노에. 이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이들은 스스로 살아남고자했으며,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가는 방법을 배워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서 이들의 생존에 위협이 되는 대상은 배타적 대상으로 도움이 되는 대상은 이타적 대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살펴볼만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아데스와, 바다를 지나가다 만났던 수영하던 사내와 그 아들들, 아이들이 만난 노파 두 명 그리고 파타와 마디가 탄 배가 만났던 정체모를 해양 생명체에 대한 에피소드, 뭍에서 파타와 마디를 포함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정리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본능은 때론 격하게 위협적이다. 나의 본능과 나의 목적을 위해서 때론 선택의 결과에 따른 비열하고 이중적인 잣대를 견디어야만 하고(버려졌음으로 희망이 없다. 우리는 사랑받지 못했다), 때론 자의적 혹은 타의적 희생(로테와 마테오의 죽음)도 감내해야만 한다. 그런데 누가 과연 엄연한 잣대로 계산할 수 없는 이러한 희생을 떠안을 수 있는가말이다.

반면 한편으로 생각한다면, 남겨진 것 역시 선택받음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문제이다. 세 아이들은 남겨질 대상으로 선택한 소설 속 부모의 예지와 예상과는 달리 조금은 다른 결과로 스스로의 문제를 떠안고 헤쳐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절망적인 선택에 의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선택받은 대상에 따라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조금은 색다른 결론을 도출해낼 수도 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어쨌든 말이다. 다시 만나서 다행이었다. 마지막까지 서로 다른 길을 향해 길을 헤맨다면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현실적으로 지극히 무모해보이는 모성애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마는, 그나마 작가가 말하고 싶고 강조하고 싶은 모성애의 발현은 또 다른 선택의 결과로 이해되지 않을까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