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서 본 새는 몇 종류 안 되서,
몸짓이 귀엽고 재바른 참새정도 아는 것 같다.

책 뒷편에 실린 새의 사진에는,
언젠가 책의 표지에서 본 마코 앵무새 만큼이나
아름다운 깃털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도 알아야 할 단어가 많으나,
그나마도 단어로만 아는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

주제와 무관하게 새의 아름다움,
깃털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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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움직임은 어떤 결과를 낳습니다. 이보다 매력적이고 두려운 문장이 없습니다. 저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킨다면, 거기에서는 희망이 생깁니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문장은 이렇게 고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한 자신이 소망하는 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여기에는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실현을 저는 목격할 수 없다면 어떨까요? 저는 그저 가장 깊은 밤의 한가운데에서 죽어가야 할 운명이라면? 희망이 유예된 그 삶을 저는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지체되는 시간이 자기 인생이 된다고 할 때, 인간은 그 시간을 어떻게 견뎌야 할까요? 그런 의문이 저를 소설로 이끌었습니다.

-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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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 그러나 딜레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2014년 5월 19일> 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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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이 당황할 정도로 확실하고 분명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숨 고를 여유 또한 줘야 한다. 그에게는 우리가 던진 말을 받아들이고 첫 충격을 극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야 우리의 분노에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상대방의 즉각적인 대답이나 이해를 기대하는 태도는 부적절하다. 우리의 분노 및 그 배경이 어느 정도고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그도 처음에는 무척이나 기가 꺾이고 당황할 것이다. 혹은 그 역시 분노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모든 간장감 역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난관이다.

-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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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분노는 자동차 휘발유와도 같다. 분노는 우리가 더 나은 장소로 전진해나갈 수 있도록 우리를 독려한다. 분노가 없다면 사람들은 난관에 맞설 수 있는 동기를 결코 지닐 수 없을 것이다. 분노는 정의와 불의가 무엇인지 구분하도록 추동하는 에너지다.”

아룬 간디가 자신의 저서 <분노 수업>에서 인용한 조부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다.

- 본문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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