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에게 말걸기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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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의 타인에게 말 걸기, 꼭 읽고 싶은 책이었는데 마침 중고책방에 있어서 약간 손때가 탔지만 득템. ​9개의 단편. 과장없이 포장없이 처절한 우리네들의 사랑과 상처라 보는 내내 울컥했다. 상처받은 여자 받을 여자 안받은 척 하려는 여자의 이야기이다. 지난 연애(관계보다는 그 당시의 처절한 감정이)와 닮아있는 구석이 종종 나와 몇 번이고 문장을 곱씹기도 하고 눈물도 짜고 코도 풀며 재밌게 읽었다. 읽은지 두달 됐는데 이제 쓴다.

(아마) 좋아서 캡처해둔 부분을 옮겼는데 대체 왜 좋았던 구절이었는 지 전혀 모르겠다. 스토리도 생각나지 않는다. 이런 저런 장편 중 기억나는 건 두가지, 몸을 함부로 굴리는 여기자의 이야기와 세컨드로 살다 산 속 절로 도망친 여자 이야기. 제목이 뭐 였는지 모르겠다. 음.. 이책은 너무 재밌어서라기 보다는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감정을 느끼고 더 많은 상처를 받은 후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내 방 문을 잠구고 바닥에 앉아서 옆엔 소주에 멍게를 두고 주워 먹으며 따라 마시며 읽어도 참 좋겠다.​ ​



개는 주인이 매일같이 귀여워하다가 갑자기 걷어차더라도 오랫동안 슬퍼하거나 노하지 않는다. 그 일의 심각성에 대해 10분 이상 고민할 만큼 진지하지도 않다. 다음날이면 또 와서 꼬리를 친다. 왜 부당하게 걷어차여야 하냐고 항변하거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자기연민에 빠지지도 않으며, 걷어차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태업을 하거나 단식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런 일들로 상처받기에는 그녀의 성격은 좀 건조했다. 그녀는 삶을 받아들이는 편이었다. 무엇이든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며 특히 가지지 못할 것에 대한 무모한 열정 따위는 일찍 폐기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등뒤에서 남자가 휘이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휘파람 소리는 꼬리라도 달려 있는지 그녀의 뒷모습을 결박하듯 휘감았으며 길고 천박했다.

별다른 일은 생각지도 않게 일어나는 것이지만 또 이상하게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여간해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위대한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해왔던 그들은 한순간이라도 상대의 존재가 피곤하게 느껴진다는데에 모욕을 느꼈으며 피곤의 여지가 끼어들 수 있다면 그렇다면 혹 그들의 사랑은 다음 기회에 다시 올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랑 중의 하나가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 의심은 과민함으로, 그렇다, 지나친 과민함의 미로 속으로 그들을 질질 끌고다녔다. 미로를 빠져나왔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도달한 곳이이별의 지점이라는 데에 어리둥절했지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는 수 없이 헤어져 돌아가며 그들은 각자 위대한 사랑의 장렬한 파국을 애도하면서 울었다.

자기의 얼굴이 `젊다`가 아닌 `젊어 보인다`고 표현되고 있음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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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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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영하라고 말을 하곤 했는데 정작 내가 호감을 가진 김영하의 작품은 대부분 단편들이었다.
대학교 1학년 때였나 우연히 읽게 된(의외로 언니가 사서 역시나 책장에서 썩히고 있던) `오빠가 돌아왔다`를 읽고 속도감, 기발함, 괴기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백함에 빠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로 좋아하는 작가 굳히기에 들어갔고 세번째로 읽었던 책이 김영하 작가의 대표대표대표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그때가 형신오빠를 사귀고 있었으니 스물한두 살이었겠다. 읽기 시작했고 당황했다. 굉장히 얇은 소설이고 좋아한다고 떠들어대던 작가의 대표작인데 재미가 없는거야. 아니 재미를 떠나서 뭐라는건가 싶은거야. 이해도 안되고 속도도 안나고 중간중간은 19금 등장으로 거부감까지 들었어. 그래서 어떤 내용이었는지 대충 어떤 분위기였는지 조차 파악하지 못한 채 가볍디 가벼운 일본 소설에 빠져 책 읽기를 중단했지.

스물한 살은 스물아홉 살이 되었고,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했어.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정말 재밌게 순식간에 읽었네. 그리고 심지어 정말 김영하스럽고 김영하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었구나 느끼기까지 했어. 나이가 들면서 올리브와 도라지, 양배추찜이 맛있어지듯 소설을 읽는 내 취향이라든 지 받아들이는 느낌이 달라졌겠구나 싶어. 예전엔 19금이라면 무조건 싫었어. 더럽고 습습하고 굳이 남의 것 구경하고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근데 이제는 즐긴다기보단 그러한 묘사나 설정이 반드시 필요할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된 것 같아. 자극을 위해서가 아니고 단순 에피소드로도 아니고.. 등장인물 간의 교감이라든지 감정 변화라든 지 영향을 주는 게 어쩌면 섹스만한 게 없거든.

읽은 지 두달 정도 되었기 때문에 내용은 아주 간단히 이야기할 수 밖에 없어.

혼란스러운 사람들에게 자살을 권하고 인생 마감의 끝까지 케어해주는 남자가 주인공이야. 엄연한 직업이고 프로이며 고객들은 만족해. 그리고 그 고객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는 변태이거나 똘똘한 어른인데. 그 고객들의 이야기로 세개였나 네개 정도 챕터가 바껴.
기억나는 이야기는 행위예술을 하는 여자. 알몸으로 머리에 물감을 묻혀 흰 종이에 춤을 추며 그림을 그리는 그 여자. 난 행위예술을 예술이라 생각하지 않고 미친사람의 미친몸부림이거나 중2병 걸린 예술가의 자기합리화라고 느끼는 편이었는데 그 여자가 실존하지도 않을 뿐더러 책이기 때문에 그 모습과 작품을 볼 수도 없는데 그냥 읽으면서 아 이래서 행위 예.술이 되는거고 그들은 예.술.가가 되는구나 느꼈어. 혼이 담기고 감정이 담길 수 있겠구나 처음 느꼈네.

쓸 말이 없다 너무 오래 되었나봐. 적어도 내가 느낀 건 김영하는 역시 튀는 작가이고. 이 소설은 정말 튀는 소설이라는 것.
죽고싶을 수 있고 죽어도 괜찮고. 누군가는 그 죽음을 도와줄 수 있고. 개개인의 사정에 하나하나 껴들 수는 없고. 이러나 저러나 그들의 인생이고 그들만의 결정이고, 까놓고 죽든 살든 뭐 그리 이 세계에 큰 사건이냐.

파괴할 권리 있어 그런데 당사자게에나 파괴지 그들 외에게는 증발이지 않을까. 퐁 하고 사라지는. 여기 퐁 저기 퐁 퐁퐁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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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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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야 많이 봤지. 작가 이름이야 많이 들었고. 어느 베스트셀러 코너를 가도 항상 있던 소설이었고. 그렇지만 내용을 예상할 수 없는 짧막한 제목에 촌스러운 표지에 단 한번도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소설인데 뭐가 계기였더라..... 아마도 현이의 블로그였나 그랬을꺼야. 오 읽어봐야겠다 하고선 헌책방에서 찾았는데, 내가 좋아하는 책방 주인 아저씨가 고래는 없어 들어와도 바로 나가버리니 구하기 힘들꺼야 라고 하셨어. 갑자기 겁나게 읽고싶어지는거야. 이건 읽어야 한다! 구해야 한다! 그래서 굉장히 오랜만에 아니면 몇년만에 정가로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샀어. 3년 만인 듯 한데 아마. 1/10도 못읽고 포기한 김영하의 검은 꽃이 마지막이었을거야 아마도. 소설은 아무리 재밌어도 한번만 읽으니깐 사기 아까운데 이건 뭐 읽고 보니 다시 읽고 싶을지도 모르겠어 빌려주든 선물하든 어찌됐든 산 값하겠다.

집중해서 이렇게 재밌게 읽었는데도 막상 줄거리를 말하라면 무슨 이야기였는지 정리가 안돼. 우선 몇대에 걸친 이야기이고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엮인 인물들과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주인공으로 하면 제목인 고래와 가장 연관있는 씩씩한 아줌마일꺼고 아 책이 지금 없어서 이름을 모르겠다. 그 건어물 만들어 팔고 남자 여럿 만나고 죽이고 다방을 만들고 벽돌공장에 영화관까지 만든 씩씩한 아줌마. 그 아줌마의 인생이라고 하는게 가장 큰 그림이려나. 주저리 주저리 리뷰보다 고래는 발췌가 어울리는 듯 하다. 강력하디 강력하고 옮겨적으면서도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말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 하진 않는다. 뚱딴지 만화에 나올 법한 그 액션) 믿을 수 없이 재치있는 부분




예컨대, 그들이 평생 맛보지 못한 우아한 정취와 로맨킥한 감정, `바람을 맞다`라는 새로운 표현, 미스 김, 혹은 미스 박, 또는 유 마담,펄 시스터즈가 부른 <커피 한잔>의 전국적인 히트, 껌, 축구경기, 아메리칸 스타일, 혹은 블랙이란 이름의 만용과 쓰디쓴 후회, 죽돌이 또는 준숙이란 신조어, 쌍화차, 미팅, 담배 소비의 증가, 성냥을 쌓거나 부러뜨리는 나쁜 습관, 퀴즈의 발달, 참새 시리즈, 구석자리에서의 키스, 벽돌 깨기, 킹 크림슨의 <Epitaph>와 신청곡을 적을 수 있는 작은 메모지, 디제이라는 새로운 직업의 등장, 오늘은 왠쥐, 라는 느끼한 발음, 배달과 티켓, 그리고 `여기 리필 좀 더 주세요`라는 잘못된 영어의 남용 등등


그는 한껏 조심스럽고 완곡하게, 언제나 소문과 함께 장식처럼 따라다니는 변명들을 장황하게 섞어, 예컨대, 자신은 절대 입이 싼 사람이 아니며, 본시 떠도는 소문은 믿지도 않을뿐더러, 쓸데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며, 그런 짓은 앉아서 오줌누는 계집이라면 모를까 불알 달린 사내로선 차마 할 짓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못 들은 걸로 하고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당사자를 위하는 것이냐, 아니면 들은대로 정직하게 알려주는 게 올바를 것이냐 하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했다..........이왕지사 말이 나온 김에 한번 확인을 하는 것이 어떨까 싶기도 한데, 한편 생각하면 그저 술 한잔 먹고 잊어버리는게 현명한 처신이 아닐까 싶기도 한 게 아닌 게 아니냐며, 병을 주는 동시에 약을 주는 요사스런 화법으로 그 소문을 전했을 때.........


그녀는 사내가 오줌을 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그가 절정에 다다라 파정을 한 것이라 여겼는지 곱게 눈을 흘기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이 뜨거워. 자기 그동안 어떻게 참았어? 이렇게 많이 싸는 걸 보니 진짜 오래 굶었나보네.
이것은 한 자 어긋남 없는 금복의 말이다. 그러니 독자 여러분, 표현이 다소 상스럽더라도 부디 이해하시길.


그날 만신의 입에서 쏟아져나온 말을 소리나는 대로 대충 옮겨적자면, `깟뗌` `뻑큐` `선 오브 비치` `마더 퍽커!` `콕 서커` `오우 쉬트!`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어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거 아니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색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이후에도 불기둥 논란, 남쪽 논쟁, 검불 논쟁 등 논쟁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며 공수논쟁은 그해가 다 가도록 끝도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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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도끼다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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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았어. 출장 중에 읽어보라고. 재미가 없을 수도 있는데 처음엔 그냥 아 읽다가 읽다보면 빠져든다고. 소설만 읽다가 요즘 내가 무식하다는 생각을 많이 해서 비소설, 어느 분야든 어렵지만 않다면 조금이라도 지식에 도움이 되는 비소설을 읽고싶었거든. 광고쟁이가 쓴 글이라해서 그냥 허황대고 부앙부앙하겠구나 했는데 생각보다 깊은 사람이었어.

우선 책을 쓴 의도가 마음에 들어. 내가 좋아했던,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내 뇌리에 박혔던 책의 내용을 공유하고 싶은 욕심. 무심코 지날 수 있는 부분을 본인이 짚어주고 설명해주고 공감을 끌어냄으로써 누군가가 책을 읽는, 세상을 보는 눈이 더 예민해지고 섬세해질 수 있다는 믿음.

발췌한 글, 문장들이 엄청나지만 글쓴이 박웅현의 문장력도 상당히 좋다. 다정하고 조심스럽지만 깊이있어. 글에서 겸손이 느껴져.
그리고 글을 쓰는 사람이 타인의 글에 감동하고. 그 글을 쓴 작가를 존경하고 때로는 질투까지 느끼는 모습을 가차없이 보여줘서 좋았어. 타인을 부러워함을 드러내는 건 옹졸한 사람은 못하는 행동이니까. 그리고 호들갑은 아니겠지만 매사에 감동을 크게 느끼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그 부분도 좋았어. 대화해보고 듣고싶고 배우고싶은 사람이라는 게 글에서 모두 느껴졌어.

실제 눈으로 보이는 3차원의 넓은 스케일을 2차원의 좁은 지면에 모두 집약해놓은 힘이 대단하지 않나요?
→ 라는 식의 감각을 글로 옮기는 능력이나 화법​

좋았던 발췌 부분 몇개는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받는 것이다.

사과가 떨어졌다
만유인력 때문이란다
때가 되었기 때문이지
[이철수-가을사과]

논에서 잡초를 뽑는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벼와 한 논에 살게 된 것을 이유로
`잡`이라 부르기 미안하다
[이쁘기만 한데...]

미나리는 발랄하고 선명하다. 그러므로 미나리는 된장의 비논리성과 친화하기 어렵고 오히려 고추장의 선명성과 잘 어울린다. 봄 미나리를 고추장에 찍어서 날로 먹으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들과 전혀 다른,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해주는 전혀 새로운 날들이 우리 앞에 예미되어 있음을 안다.
→김훈의 클라스를 단번에 느끼게해준 구절. 미나리를 먹으며 저런 글을 쓰다니. 진정 미친 사람. 진짜 감정하나 섞이지 않고 호들갑없이 어떡하면 저런 글을 쓸 수 있지?

아름다운 하루가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야외에 나와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일만 없었다면 산책하기에 얼마나 즐거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 뫼르소는 패륜아겠지만 그는 햇살과 산책같은 현재가 좋을 뿐입니다. 솔직한 사람이에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과장하고 싶지는 않은 것 입니다.
→이건 시선이 좋다기보단 평소 많이 생각던 것이 글로 쓰여있으니 반가워서. 고모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느꼈던 부분이기도하고. 슬픔을 과장하고 싶지 않아. 그럴 필요를 느껴야하는 시선이 참 싫다.

​책을 소개하고 구절을 함께 읽는 형식이지만, 글쓴이가 감동 받은 구절들은 모두 자연 중심의 동양적 사고에 모든 생명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들이어서. 자연스러움, 자연, 그대로의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고 그 중요성을 다시 배우게 된다. 그리고 이 책의 단 몇장을 읽는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걸 애정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싶다. 당장 길에 나가 나무를 보고싶고 마음 맞는 사람과 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들게끔 만들어준 책이 너무 고마워. 내 시선을 바꿔주고 내 마음가짐에 영향을 주다니. 평생 내가 고마워할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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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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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 읽었다. 속도감이나 흥미, 매끄러운 번역 등등 모든 걸 감안했을 때 이틀이면 다 읽고도 아쉬운 맘에 쩝쩝댔을 소설인데 이걸 한 달간 끌다니. 진짜 난독증이 생긴 걸까. 아니면 정말 바빴나. 발췌하고 싶은 페이지 찍어 놓은 것만 20장이 넘던데 옮겨 쓰기 귀찮아서 임팩트 센 것만 추려냈다. 앞 뒤 없이 사진 속 페이지만 다시 읽어도 자극적이고 섹시하고 그저 놀라운 소설.

14살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걸고 그 사랑을 지키려한 변태 주인공의 시선을 쭉 따라가다보니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는 내가 변태인가 싶기도 하다. 같이 법정에 서서 ˝물론 당신들이 오해할 법 하지만 이건 사랑이다˝ 외쳐주고 싶기도 하고. 변태는 변태인데 뭐 그리 변태인가 싶어.

그 절절한 사랑과 설렘에 은근한 응원을 보내며 읽다가 실제 관계가 맺어지는 데서 충격을 받아버렸어. 롤리타 이 요망한 년.
심지어 2년 간 이어진 관계 속에서 강요도 없고 희생도 없이 그저 줄 꺼 주고 취할 꺼 취한 진정 요망한 캐릭터. 얠 보면서 매력이 뭔지 느끼고 이 아이에게 누군들 헤어나올 수 있을까 싶었어. 매력이 내리 모순돼서 정신 못차릴 것 같아. 발췌 중에 이 아이에 대한 묘사만 몰아서 소개하자면

​몹시 천진스러우면서도 한없이 관능적이다.

나의 롤리타는 꿈 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지녔다. 광고나 잡지에 등장하는 들창코 아이처럼 앙증맞기도 했고, 구대륙의 어린 하녀처럼 어렴풋한 관능미도 있다. 시골 갈봇집에서 어린애로 변장한 젊디젊은 매춘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그 짙은 사향냄새와 진흙탕 속에서, 그 더러움과 죽음 속에서 문득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다정한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니

롤리타는 대단히 경험 많고 활발하고 문란하고 순종적인 소녀로 돌변하여 이성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을 거리낌없이 선보인다.

잔망스럽고 성깔 사나운 우리 귀염둥이.

천진함과 기만, 매력과 천박함. 어둡고 시무룩한 표정과 밝고 명랑한 표정을 모두 갖춘 롤리타

천박하고 사랑스러운 년.​

그녀는 늘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별다를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읽으면서 내리 감탄했는데 이건 아직 자의식이 없는 `소녀`이기에 가능한 모순인 것 같아. 우리 나이 친구들은 알잖아. 이러이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테니 `본심과 다르게` 이러 저러한 모습을 연출하자. 하는 거니... 거짓은 쎄하기 마련이거든. 완벽한 거짓보단 어설픈 진짜가 나아. 함부로 시도하지 말 것.

자극적인 소재이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혹은 취향 이야기이지만 그저 유별난 소재 때문에 두루 오랫동안 읽히지만은 않았을꺼야. 우선 작가의 글맛에 뻔뻔함이 진짜 매력적이야. 장점이든 단점이든 본인을 굉장히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부분도 재밌고 갑자기 소설 속 화자인 주제에 툭툭 튀어나와서 독자랑 직접 이야기를 하려고 해.

초조해진 주인여자는 숙식을 포함한 하숙비 치고는 터무니없이 저렴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의 액수를 불렀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구세계 특유의 예의범절이 몸에 밴 나로서는 이 시련을 묵묵히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소녀와 굳이 성교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착지근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짜릿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사실 그리 사악하지도 않고 소극적이며 소심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가벼운 성적 탈선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과 사회가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지나치게 다정다감하고 감수성도 병적으로 예민한데다 한없이 신중한 성격이라서 다소 짜증이 나겠지만 지금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니 절대로 건너뛰지 마시라! 여러분이 상상해주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혹시 이 책을 영화화하고 싶다면 내가 지명수배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서서히 내 얼굴로 변해가는 장면을 넣어주길 바란다.​

읽다가도 너무 변태적인 문장들에 주변의 시선이 의식돼서 책 덮기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래도 사랑이다.` 싶었던 몇 문장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내 곁에 앉은 L를 아프도록 의식했고

정말 유능한 소아과의사처럼 이 갈색머리 소녀의 육체를 훌렁 뒤집어놓고 롤리타의 어린 자궁에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은 심장에도, 진줏빛 간에도, 모자반 같은 허파에도, 귀여운 쌍둥이 콩팥에도 탐욕스럽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연의 심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만사를 끝장내리라.

소아성애를 떠나서 적어도 주인공은 사랑을 했고 다 바쳤고 절절했다는 건 인정해야돼. 그리고 그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받은 롤리타가 부러운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고. 심리학과 범죄학 토론은 몇십년 전에 끝났겠지. 나는 그냥 섹시하고 발칙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읽은 걸로 할래. 다음 책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 이렇게 살다간 5월 쯤 리뷰 쓸 수 있지 않을 까 싶은데. 어쨌든 분발할게요. 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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