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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5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드디어 다 읽었다. 속도감이나 흥미, 매끄러운 번역 등등 모든 걸 감안했을 때 이틀이면 다 읽고도 아쉬운 맘에 쩝쩝댔을 소설인데 이걸 한 달간 끌다니. 진짜 난독증이 생긴 걸까. 아니면 정말 바빴나. 발췌하고 싶은 페이지 찍어 놓은 것만 20장이 넘던데 옮겨 쓰기 귀찮아서 임팩트 센 것만 추려냈다. 앞 뒤 없이 사진 속 페이지만 다시 읽어도 자극적이고 섹시하고 그저 놀라운 소설.
14살 소녀에게 사랑을 느끼고 인생을 걸고 그 사랑을 지키려한 변태 주인공의 시선을 쭉 따라가다보니 주인공의 감정에 공감하는 내가 변태인가 싶기도 하다. 같이 법정에 서서 ˝물론 당신들이 오해할 법 하지만 이건 사랑이다˝ 외쳐주고 싶기도 하고. 변태는 변태인데 뭐 그리 변태인가 싶어.
그 절절한 사랑과 설렘에 은근한 응원을 보내며 읽다가 실제 관계가 맺어지는 데서 충격을 받아버렸어. 롤리타 이 요망한 년.
심지어 2년 간 이어진 관계 속에서 강요도 없고 희생도 없이 그저 줄 꺼 주고 취할 꺼 취한 진정 요망한 캐릭터. 얠 보면서 매력이 뭔지 느끼고 이 아이에게 누군들 헤어나올 수 있을까 싶었어. 매력이 내리 모순돼서 정신 못차릴 것 같아. 발췌 중에 이 아이에 대한 묘사만 몰아서 소개하자면
몹시 천진스러우면서도 한없이 관능적이다.
나의 롤리타는 꿈 많은 천진함과 섬뜩한 천박함을 동시에 지녔다. 광고나 잡지에 등장하는 들창코 아이처럼 앙증맞기도 했고, 구대륙의 어린 하녀처럼 어렴풋한 관능미도 있다. 시골 갈봇집에서 어린애로 변장한 젊디젊은 매춘부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그 짙은 사향냄새와 진흙탕 속에서, 그 더러움과 죽음 속에서 문득 티 없이 맑고 깨끗하며 다정한 일면이 드러나기도 하니
롤리타는 대단히 경험 많고 활발하고 문란하고 순종적인 소녀로 돌변하여 이성적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을 거리낌없이 선보인다.
잔망스럽고 성깔 사나운 우리 귀염둥이.
천진함과 기만, 매력과 천박함. 어둡고 시무룩한 표정과 밝고 명랑한 표정을 모두 갖춘 롤리타
천박하고 사랑스러운 년.
그녀는 늘 나의 욕망에 불을 붙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별다를 욕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읽으면서 내리 감탄했는데 이건 아직 자의식이 없는 `소녀`이기에 가능한 모순인 것 같아. 우리 나이 친구들은 알잖아. 이러이러하면 매력적으로 보일테니 `본심과 다르게` 이러 저러한 모습을 연출하자. 하는 거니... 거짓은 쎄하기 마련이거든. 완벽한 거짓보단 어설픈 진짜가 나아. 함부로 시도하지 말 것.
자극적인 소재이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많을 수 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혹은 취향 이야기이지만 그저 유별난 소재 때문에 두루 오랫동안 읽히지만은 않았을꺼야. 우선 작가의 글맛에 뻔뻔함이 진짜 매력적이야. 장점이든 단점이든 본인을 굉장히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부분도 재밌고 갑자기 소설 속 화자인 주제에 툭툭 튀어나와서 독자랑 직접 이야기를 하려고 해.
초조해진 주인여자는 숙식을 포함한 하숙비 치고는 터무니없이 저렴해서 오히려 불안할 정도의 액수를 불렀다. 나는 잠시 생각해보는 체했지만 속으로는 당장 여기서 도망쳐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러나 구세계 특유의 예의범절이 몸에 밴 나로서는 이 시련을 묵묵히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소녀와 굳이 성교까지 가지는 못하더라도 달착지근한 신음 소리가 절로 나올만큼 짜릿짜릿한 육체적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성범죄자의 대다수는 사실 그리 사악하지도 않고 소극적이며 소심하고 서투르기 짝이 없는 풋내기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은 다만 우리가 가벼운 성적 탈선 행위를 저질렀을 때 경찰과 사회가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뿐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이 지나치게 다정다감하고 감수성도 병적으로 예민한데다 한없이 신중한 성격이라서 다소 짜증이 나겠지만 지금 이 장면은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니 절대로 건너뛰지 마시라! 여러분이 상상해주지 않으면 나는 존재할 수 없다.
혹시 이 책을 영화화하고 싶다면 내가 지명수배 포스터를 바라보고 있을 때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서서히 내 얼굴로 변해가는 장면을 넣어주길 바란다.
읽다가도 너무 변태적인 문장들에 주변의 시선이 의식돼서 책 덮기를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건 그래도 사랑이다.` 싶었던 몇 문장은
이야기를 하는 동안에도 나는 내 곁에 앉은 L를 아프도록 의식했고
정말 유능한 소아과의사처럼 이 갈색머리 소녀의 육체를 훌렁 뒤집어놓고 롤리타의 어린 자궁에도,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은 심장에도, 진줏빛 간에도, 모자반 같은 허파에도, 귀여운 쌍둥이 콩팥에도 탐욕스럽게 입맞춤을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자연의 심리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를 빼앗기느니 차라리 만사를 끝장내리라.
소아성애를 떠나서 적어도 주인공은 사랑을 했고 다 바쳤고 절절했다는 건 인정해야돼. 그리고 그 무조건 적인 사랑을 받은 롤리타가 부러운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고. 심리학과 범죄학 토론은 몇십년 전에 끝났겠지. 나는 그냥 섹시하고 발칙하고 절절한 사랑이야기를 읽은 걸로 할래. 다음 책은 알레산드로 바리코의 `이런 이야기`입니다. 뭐 이렇게 살다간 5월 쯤 리뷰 쓸 수 있지 않을 까 싶은데. 어쨌든 분발할게요. 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