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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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가 된 요즘, 논현에서 미팅하고 월요일 대낮 교보문고에 가서 책 구경하다가 제목과 표지가 마음에 들었다. 침묵의 기술. 요즘 내가 가장 갖고 싶은 능력 중 하나인 `입 좀 다물고 있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자리 잡고 앉아서 읽었다. 서점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은 건 처음이었다. 아 애초에 조금이라도 읽은 적이 없는 것 같기도. 문장 간격이 넓고 폰트도 커서 요즘 읽는 책들에 비해 눈과 머리가 훨씬 편해서 서점에서 슥슥 읽기 좋았다.

처음 두 챕터는 침묵의 종류를 임팩트있게 구분지어놓았고 각각의 긍,부정적 자세와 영향을 와닿게 설명해놓아 흥미가 확 왔다. 그리고 이어서 쓸데없이 말을 많이하거나 필요 이상의 침묵에 대해 이야기는데 어라 싶었다. 이건 침묵의 중요성을 말하는 게 아니라 종교를(에서 시작해서 점점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부정하거나 무관심한 자들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었다. 황당할 지경이라 저자 소개를 찾아봤더니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1716~1786) 나 태어나기 200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어. 그 땐 그랬나보지. 정치가 종교고 종교가 문화였으니 말로 종교에 대해 섣불리 비난하는 것이 `말`의 가장 나쁜 짓이었나보지.

필요한 말만 적당히 하고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신중하게 하라는 이야기는 뭐 당연한 소리임에도 나포함 많은 사람들이 따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라 읽으면서 내 언행들을 되짚어보기도 하고 반성하기도 했다. 종교와 같이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이슈에 대해 감정적으로 극단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얼마나 경솔하고 편협한 태도인지 세삼 느끼며 부끄러워지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말조심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는 저자 역시 무신론자에 대한 이해 따위 없이 종교를 부정하는 모든 자를 무지하고 경솔하다 말하고 있으니 ˝너부터 말 조심해.˝가 나오며 뒤로 갈수록 길거리 예수천국 불신지옥 전도쟁이 새끼들이랑 뭐가 다르냐 싶어 짜증내며 독서를 마쳤다. 발췌보면 알겠지만 상당히 보수적이고 꼰대롭다.

분명 중요한 가르침을 담고 있으니 200년 전 죽어 이제는 하느님 품에 안겨 천사님의 하프 소리 들으며 행복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랑 싸울 생각 말고 필요한 것만 발라내서 기억하면 되겠다.

아 그리고 1부는 말하기에 대해 2부에는 글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입에서 나오냐 손에서 나오냐 차이 빼곤 1, 2부에 완전 같은 이야기 반복이라 황당했다. 성의가 없는건지 오리지널에 충실한 건지 모르겠다.

발췌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사람은 자기 밖으로 넘쳐나게 되고 말을 통해 흩어져, 결국에는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젊은이들은 어떤 불가해한 광기에 갑작스레 휩싸이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튀어나오는 말은 제멋대로이기 일쑤고, 그 의도는 모호하고 부실한 데다 관심사 역시 가소로운 수준이다. 아마도 자기 주제를 망각한 나머지 격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창피만 키울 뿐인 세계 속의 어떤 역할에 무작정 매달리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기들 집단에 속하지 않은 모든 것이 무시의 대상으로 보이고, 비난과 차가운 야유를 유발한다.

종교의 보편타당한 문제, 특히 풍속에 직결되는 진리를 거론할 경우 젊은이들은 자신의 연륜과 식견을 먼저 자성한 뒤 발언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 좋다.

신을 가벼이 여기고서 무사한 이 없음을 명심하라. 그분께선 그대가 망동하는 바로 그 자리에 벌을 내리시리니, 딴에는 재기 부린답시고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순간 그대의 권위는 빛을 잃고, 평상시 그대를 우러르던 이들이 한꺼번에 고개를 돌릴 것이다.
-협박하냐?

말을 하기 위해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침묵보다 나은 쓸거리가 있을 때에만 펜을 움직인다.

자고로 사람의 마음이란 본능적 성향을 만족시켜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취하려고 안달이어서 온갖 타락의 지침들로 스스로를 부풀리기 일쑤다. 게다가 마음의 기능이란 본래 합리적 추론이 아닌 무조건적 애정에 있는 만큼, 구미에 맞고 안락해 보이는 모든 대상에 무작정 경도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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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밀레니엄 북스 24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동완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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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익숙한 안톤 체호프의 단편집으로 흙서점에서 집어왔다. 아마 단편인 줄 알았다면 안 샀을텐데 펼쳐보지도 않고 그냥 샀네. 난 중고서점에서 유난히 과감한 쇼퍼가 되곤 한다. 저렴한 가격과 지금 안사면 내일 없을 거라는 쫄림 그리고 단골가게에서 꾸준한 소비를 해야한다는 일종의 책임감 등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 귀여운 여인 / 약혼녀 / 6호실 / 등 불 이렇게 총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이 들어있었다. 민음사 고전문학 시리즈에도 체호프 단편선이 있던데 얼마나 겹치려나. 헉 지금 찾아봤는데 충격적이다. 민음사 단편선엔 10편이 수록돼있는데 한 편도 겹치지 않아. 다른 체호프인가 했는데 같은 체호프야. 뭐지.

처음 세 편을 읽고선 참 고전답게 여자를 수동적이고 어리석고 비일관적이고 감정적으로 묘사해놨다 느꼈다. 모두 여자가 주인공인데 모두 한 캐릭터같이 남자 가슴 투닥투닥 때리며 미워미워! 몰라몰라!하는 느낌. 음...... 싫다. 그래도 하나같이 감정에 충실하고 그래서 모두 성인여성인데도 마치 어린아이같고 보호본능이 들었다. 다섯 편 중 세 편이 이렇다보니 되게 고민없이 지역 아마추어 신문에 스캔들란을 담당하는 이야기꾼이 쓴 글 같았어.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이야 어멋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야?라고 가십거리로 읽겠지만 아무 연고 없는 독자에겐 큰 흥미도 감동도 줄 수 없는 정도의 그냥 무의미한 단편소설. 그러다 마지막 두 편을 읽었는데 체호프가 쓴 시기가 달라졌을는지 몰라도 앞 세 편과 되게 다른 느낌이더라고. 인간 존재에 대한 고민과 허무함, 젊음에 대한 미화가 있어서 나이 들어서 쓴 글인가.. 싶더라고. 그리고 가볍게 끄적여대는 작가는 아닌가보다 느꼈고. 문제는 앞에 가볍게 쓰인(듯 보이는) 소설이 훨씬 작가의 개성을 보인다. 철학적이고 심오할거면 굳이 체호프 것을 읽진 않을 것 같아. 피식피식 웃음나며 어른 동화 읽듯 슥슥 읽어내는 소설을 읽을 때 체호프가 즐기며 썼겠다는 인상을 받았거든.

그나저나 귀여운 여인은 명작이다. 살면서 읽은 단편 중에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사실 많지 않은데 귀여운 여인은 말그대로 귀여워서 기억이 남을 것 같다. 사랑스러워......

다음 책은 (야하다길래 산)헨리 밀러의 북회귀선/남회귀선 입니다. 엄청 두꺼운데 백수 때 아니면 읽기도 힘들고 들고 다니기에도 너무 무서울 것 같아서 집에서 읽으려고.

발췌

개개인의 사사로운 생활은 결국 비밀 덕분에 보장되므로, 교양인이 그렇게 지나칠 정도로 혹은 신경질적으로 사생활의 비밀을 존중하는 것도 아마 일부는 그러한 까닭인 듯했다.-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그녀는 눈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를 껴안고는 제발 화내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행복했다.-귀여운 여인

우리에게는 책이 있죠. 하지만 그것은 살아 있는 대화와 교제하곤 전혀 다릅니다. 서툰 비유이겠지만, 책은 악보이고 대화는 노래라고 할 수 있겠죠.-6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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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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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행을 가면 꼭 책을 가져가기 시작했는데, 여행지에서 독서하는 그 순간도 좋지만 다녀와서 그 책과 여행지가 함께 어우러지는 그 느낌이 더 좋았다. 가장 잘 나온 단체사진처럼 나와 여행지와 그 책이 함께 기억된다. 이번엔 어떤 책을 읽을까...... 집에 사놓고 안 읽은 책이 산더미임에도 불구하고 확 끌리는 책이 없었고 그래서 여행가는 전 주에 책 8권을 주문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이번 여행에 가져가고 싶은 책이 한 권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미 작년 이맘 쯤 읽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손이 갔다. 분명 이상한 일이다. 난 같은 소설을 두 번 읽어 본 적이 없고, 한 권 한 권 읽은 책의 수가 늘어나는 게 내 즐거움 중의 하나인데 여행지에 읽었던 책이라니. 그리고 처음 읽을 당시 그리 엄청나게 좋아한 책도 아니었다는 게 더 이상하다. 희승언니와 함께 여행하는 동안은 1페이지도 읽지 않았고 Suprina네 집에서 잠들기 전에, 혼자 남은 이틀 간 숙소와 예쁜 카페에서 읽었다. 이 책을 택했던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결과는 요즘의 내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철학적 고민을 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 이미 답 안나오는 고민을 많이하는 사람은 오히려 체한 기분 드니까 멀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난 후자이지만 이게 또 즐거움이라는 아이러니.

테레자와 토마시, 토마시와 사비나, 사비나와 프란츠. 이렇게 세 커플, 네 인물이 등장한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어느 누구이고 미묘한 감정까지 다 우리에게 전달해준다. 네 인물 각자의 사정과 감정, 감각까지 충실히 묘사하기 때문에 네 인물 모두 주인공이고 1인칭 시점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전지적 시점으로 진행된다.

넷이 모두 아주 다른 캐릭터인데 `알고보면 나쁜 사람 없다.`고 여성편력도 지루함도 외도도 방어기제도 그 넷의 각각의 사정이 다 내 것인 양 하나같이 이해가 된다. 그게 완전 대치되는 반대 성질의 것이라고 해도 이건 이거대로 그건 그거대로 이해가 돼(납득이 아니고 공감이다.).

아주 흥미로운 질문거리가 끝없이 나오는데 500페이지 내내 그 모든 질문에 `결국` 답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 진중함과 경솔함 중 무엇이 더 진실된 것일까. 운명은 있을까 어쩌면 우연이 만들어낸 착각은 아닐까. 지금 내 감정은 사랑일까 망상일까.

러시아에 점령당한 프라하를 배경으로 무엇도 옳다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념은 무너지고 존재는 불투명해진다. 시대적 혼란 때문인지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연인에게 감정적으로 많은걸 기대하고 실망하고 좌절한다. 누구하나 만족스럽지 않다. 묘사되는 모든 감정이 모두 내 것 같다. 갑자기 웃기다ㅋㅋ 이래서 사주보면 점쟁이가 다 맞춘 것 같고 형액형 별자리 성향이 다 맞는 것 같았구나. 유난히 눈에 띄고 안 띄고의 차이지 내면의 감정은 이 세상 모두가 공유하고 있나보다. 너 외향적이지? 어! / 너 혹시 겉으론 웃어고 속으론 힘들지? 어머어머 어어! / 너 남자친구한테 헌신적이지? 소오름! 나 간쓸게 다줘. / 남자친구 있는데 다른 남자한테 끌릴 때 있지? 오 시발 어떻게 알았어. / 음....... 모두가 모든 성향을 갖고 있어서 간파당할 수 밖에 없구나.

나이가 들수록 의문은 많아지고 해결이 되는 것은 한 가지도 없다. 진리는 알겠는데 그 진리를 내 인생에 어떻게 적용해야한 지는 모른다. 그래. 한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한낮 먼지처럼 있다 없어지는 거라고 하자. 그래서 우리의 어떤 행위도 실은 아무 것도 아니며 결국 중요하고 심각하게 여기는 것도 실은 전혀 의미없는 거고. 그래서?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내 삶이기에 더더욱 내 고집을 부려서 내가 원하는대로 쟁취해서 즐기다 가야 한다고? 아니면 결국 별 것도 아닐 것이기에 욕심 부리지 말고 흘러흘러 적당히 보내다 기억할만한 것도 없이 기념할만한 것도 없이 때되면 죽으라고? 가벼우라고 무거우라고?

네 주인공이 모두 너무 외롭다. 나를 포함한 이 세상 모두가 너무 외롭다. 그래서 그렇게 상대를 통해 나를 채우려하고 나를 확인하려 한다. 근데 모두가 딱 나만큼 이기적이어서 상대를 채워주려하기보단 본인을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헤맨다. 참...... 이 쯤에서 또 안물어볼 수가 없다. 왜 태어나서 이렇게 답 안나오는 삶을 살아내야만 하나. 책을 읽으면 읽을 수록 비관적이 되는 것 같다. 특히 고전에 집중한 최근 2년 그냥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이 씁쓸하거나 쓸쓸한 감정도 기억할 필요도 의미도 없는 것이라니 이렇게 끄적이는 것도 다 무언가 싶고. 근데 참 아이러니한 게 ˝우리 존재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 적당히 살다 가라.˝고 말하는 과거 작가들은 그들의 인생동안 그렇게 글을 쓰고 남겼다. 남의 생은 적당히 하면 되는 거라고 쉽게 말해놓고 본인들의 생에선 울고 화내고 욕심 부렸다. 인간은 문제가 없어도 문제를 만들어 사서 고민하는 이상한 동물이다. 이 것도 예외는 없다. 모든 인간이 그렇다. 오늘따라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술 안마셨다. 그냥 핸드폰으로 쓰니까 큰 그림이 안보여서 말도 안되는 소리, 앞뒤 안맞는 소리 하고 있나보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이 되었다. 책 때문인지 혼자 보낸 시간이 쓸쓸했다. 얼른 지우 보고싶다. 쌍둥이도 보고싶고. 당분간 여행 안가야지. 나 지금 수중에 70TWD(2500원)있다. 귀여운 기분이다.

발췌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 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사람이 무엇을 희구해야만 하는가를 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한 번밖에 살지 못하고 전생과 현생을 비교할 수도 없으며 현생과 비교하여 후생을 바로잡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정사를 나누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라(이 욕망은 수많은 여자에게 적용된다.) 동반 수면의 욕망으로 발현되는 것이다.(이 욕망은 오로지 한 여자에게만 관련된다.)

동정심보다 무거운 것은 없다. 우리 자신의 고통조차도, 상상력으로 증폭되고 수천 번 메아리치면서 깊어진, 타인과 함께,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해 느끼는 고통만큼 무겁지는 않다.

˝Es muss sein! 그래야만 한다!˝라고 되뇌었지만 금세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정말 그래야만 할까?

그녀는 여자들 중 가장 평범한 여자들이 하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를 버리지 마세요. 당신 곁에 있게 해 주세요. 나를 노예로 만들고 당신은 강해지세요! 하지만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없고 할 줄도 몰랐던 말들이었다.

삶이 잔인했기에 공동묘지에는 항상 평화가 감돌았다.

그에게 관능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명령할 힘이 없는 것이다. 세상에는 폭력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있다. 육체적 사랑이란, 폭력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다.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항상 철저한 미지의 그 무엇이다. 사비나 역시 배신의 욕망 뒤에 숨어 있는 목표가 무엇인지 모른다.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목표일까?

영혼을 흥분시키는 것은 자신의 의사에 반해서 행동하는 육체에 배신당하는 것, 그리고 그 배신을 목도하는 것이다.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 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도무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사람이 그들의 판단에 그토록 매달릴 수 있는 것일까?

인간을 여러 범주로 나누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이 일생 동안 종사하는 이런저런 직업으로 그들을 인도한 이러한 깊은 욕구에 입각한 것이리라.
-그 방법 별롤세.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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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 알마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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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The manwho mistook his wife for a hat]

꽤 오래 전에 흙서점에서 샀던 책인데 책에 대한 정보 아예 없이 제목이랑 일러스트가 좋아서 집었었어. 그런데 이렇게나 유명하고 의미있는 책이었네. 나의 무의식중에 빛나는 안목인건가 찍기 운인건가. 어릴 때부터 찍기는 참 잘했지. 8학군 애들이 모이는 핫한 영어학원에서 진심 `찍기`만으로 제일 높은 반에 배정되어서 엄마가 원장에게 낮은 반으로 조정해달라고 했을 정도. 어쨌든 두께 때문에 괜히 쫄아서 그간 미뤄두다가 읽었는데 오!

신경학자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가 그동안 만났던 환자들 중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사례를 마치 소설처럼 풀어낸 책이야. 의료는 과학과 기술, 원리 같은 다소 딱딱하고 이성적이고 얄짤없는 이미지인데 신경학이라는 분야의 특성인지 아니면 신경학자 올리버 색스의 태도인지 환자와의 대화도 관찰도 환자에 대한 평가도 참 따뜻하고 인간적이고 너그러워.

제목에서 보듯 안면인식 장애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20여 가지의 실제 환자의 질환과 그로 인해 벌어진 헤프닝 등이 소개돼. 그 당시 컴퓨터로도 할 수 없던 8~20자리 소수를 특별한 계산 없이 거침없이 내 놓던 자폐 쌍둥이 형제, 귓가에서 어릴 때 듣던 가곡이 멈추지 않고 들려 대화도 할 수 없는 할머니, 거울을 보지 않으면 몸을 20도 가까이 기울어지는 아저씨, 200곡의 오페라 곡을 외우는 저능아 등이 나오는데 소설 속 만들어진 캐릭터라도 해도 놀라울만큼 개성있고 별난 사람들의 삶을 단편 소설 읽듯 읽었어. 읽으면서 웃음이 터지기도 했고 안쓰러워서 코가 찡해지기도 했지만 읽고 나니 따뜻한 동화를 읽은 훈훈한 기분이다.

불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환자의 삶에서 긍정적인 면모를 끌어내는(혹은 발견하는) 올리버 색스의 자세도 감동적이고 환자 가족들의 헌신도 참 따뜻하지만 무엇보다 환자 본인들의 순수함과 긍정적인 태도 유쾌하고 단순한 대화법 등이 읽는 나를 정화하는 느낌이었달까(오글오글 죄송). 신경질환을 겪는 환자에 대한 선입견에도 영향을 많이 줬을거고 그들의 부모와 친구에게 기운을 줬겠다. 참 좋은 의사선생님이다.

신경, 정신학에는 철학이 바탕인게 참 마음에 들어. 근데 결국 결정적인 것은 뇌 손상이더라. 신기해. 과학과 철학의 콜라보레이션.

읽으면서 내심 무서웠던 건 나도 언젠가 아니면 지금도 그들과 같은 증상을 가진 환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오래 건강하게 무리없이 살고싶다.

발췌

기억을 조금이라도 잃어버려봐야만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기억이 없는 인생은 인생이라고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언어상실증 환자들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진실인가 아닌가를 이해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언어는 상실했지만 감수성이 특히 뛰어난 그들은 찡그린 얼굴, 꾸민 표정, 지나친 몸짓, 특히 부자연스러운 말투와 박자를 보고 그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알아차린다. 그래서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던 것이다.

중독이나 병에 의해 해방과 각성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정신과 상상력은 무뎌진 상태로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얼마나 역설적이고 잔인하며 아이러니한 일인가!(중략) 병리상태가 곧 행복한 상태이며, 정상 상태가 곧 병리 상태일 수도 있는 세계이자, 흥분 상태가 속박인 공시에 해방일 수도 있는 세계, 깨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몽롱하게 취해 있는 상태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세계 말이다.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우리는 서로 그다지 다를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로서 우리 모두는 각각 고유한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필요하다면 되살려서라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뇌는 그 사람의 전 생애에 걸친 기억을 완전하다고 말해도 좋은 정도로 보관하고 있다. 모든 의식의 흐름은 뇌에 보존되며, 생활 속에서 필요할 때마다 언제라도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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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공포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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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세 권의 비채 출판사 책 중 두 권 성공 후, 남은 한 권 `비행공포`까지 재밌다면 앞으로 비채 출판사의 소설은 무조건 아껴주리라 했었지. 오! 비채 모던&클래식 시리즈는 사랑이네. 600페이지 장편을 단숨에 재밌게 읽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주목 받고 쉽게 대학원에 진학해 뉴욕대에서 강의와 꽤 성공적인 시집을 몇 권이나 낸 매력적인 여자 이사도라가 주인공이야.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일상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해내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고, 독립적인 삶과 본인만의 영역에 엄격하면서도 완벽히 일치되는 남자를 찾는 아이러니한 성질의 캐릭터. 그렇지만 실제 주변에도 되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어설프게 독립적인 현대 여성 중 하나야. 사랑의 갈구, 성적 욕망, 독신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인정, 부자연스러운 자아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언제나 공허하고 언제나 미완성이며 언제나 불안한 존재인 보통 여자. 두 번 째 결혼 생활도 지루해질 무렵 나타난 남편과 반대 형질의 실존주의자. 그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정하고 후회하고 방황하는 이야기야.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그녀의 일생 지난 기억들과 고민들이 담겨있어. 읽는 내내 주인공 이사도라와 단 한 번도 감정 불일치가 없었어. 멋지든 흉하든,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모든 행동과 감정이 이해됐어.

여성 작가의 책은 어떻게해도 여성 작가 냄새가 나잖아. 그 소재가 뭐든 간에, 매가리 없고 모호하고 감성적이고 결국 이야기를 제대로 못 끌고나가며 혼잣말 꿍얼대는 그 특유의 느낌들을 안 좋아해. 근데 `비행공포`를 읽으면서 그.래.도.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과 가치를 오랜만에 시원스럽게 느꼈네. 사춘기 시절 겪어 본 그 세상 비극이 모두 내 것인 양 진지한 짝사랑의 감정을 남자가 어찌 알 것이며, 어제보다 살 찌고, 옆 친구보다 못난 생긴 기분 그 근거없이 끝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어찌 알겠어. 비참하리만큼 처절하고 사소한 진짜 속내를 풀어내니 그 모습이 니 모습이고 내 모습이고. 들킨듯한 기분에 감히 소내리어 공감하지 못하고 비웃는 척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 진짜 여자 이야기. 여자들이 읽으면 `딱 나정도로만 못난 여자들`과 ˝맞아!맞아! 어머 얘˝하며 수다 떨고 온 정도의 위안과 공감이 될 것이고, 남자들이 읽으면 세상 차갑고 이성적이고 매력적인 여자의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길거야. 장담하는데 외모 불문, 능력 불문, 매력 불문 모든 여자의 이야기야. 여자를 알고 싶다면, 여자를 꼬시고 싶다면 항상 어렵게만 느껴지는 여자를 무시하고 싶다면 읽으세요. 우리 패는 다 깠다 여자들아. 비행공포 남자편이 필요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자란 정말 한없이 나약한(육체보다 정신이 더 문제다) 동물이고 아무 문제 없는 상황에서도 틈새를 발견해 기어코 문제를 만들어 내는 이해할 수 없는 참 피곤하고 가련한 동물이야. 그리고 이 나약함은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심해질 것 같아. 요즘 내 모습으론 내가 피크 같지만 불행히도 더 심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상깊은 번역가 이진. `비행공포`에 매료되어 에리카종에게 번역을 맡겨달라고 편지를 보내는 둥 몇 년 간 노력을 했다 한다. 작품에 대한 욕심과 이해가 깊어서인지 보지, 씹, 성기, 섹스 등의 단어가 난무하는 한 권에서 욕, 신체기관, 행위, 상황에 그저 적절한 단어를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된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사전적으론 문제 없는 `동의어`에서 품위를 지키고 뉘앙스와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책 띠지에 적힌 말들 중 하나도 공감이 안됐다. 그리 신선하지도 음탕하지도 않고 모든 여성들이 반드시 읽을 필요도 없다. 그차피 그들의 이야기로 더 새로울 것이 없는걸.

-발췌

그럼 그렇지. 왜 정신분석의들은 모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까?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재미있는 남자들로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가 혼자인 것은 언제나 선택이 아닌 포기의 결과로 간주된다. 그래서 최하층민 대접을 받는다. 여자가 품위 있게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란 도무지 없다. 물론 남자만큼은 아니어도 경제력이 있을 수 있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도 그런 여자를 평화롭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친구들, 가족,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사실, 아이가 없다는 사실, 한마디로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열등하다는 증거였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평범하다는 증거이니까.

결혼은 분명 독신보다 나았다. 그러나 훨씬 나은 것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중산층의 결혼이었다. 함께 보낼 시간이 없는 부부. 결혼한 이유 중 한 가지를 결혼이 빼앗아버린 셈이었다.

왜 항상 남자 둘을 합쳐야만 완벽한 남자 하나가 되는 건지.

왜 여자가 남자를 거부하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거절하면, 남자는 여자가 예의상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많은 걸 버릴수록 그는 내 곁에 머물기 위해 점점 덜 버렸다. 그러고보면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남자들은 내가 가장 스스럼없이 대했던 남자들이었던 것 같다. 에로스와 필로스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아주 잠시조차? 끝도 없이 번갈아 찾아오는 이 상실감은, 욕망과 무관심, 무관심과 욕망의 반복되는 주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어린 시절의 잔재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적어도 잠재적으로 들어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없으면, 시원하게 울 수가 없다. 원하는 만큼 처절하게 울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리란 게 확실해지자 일어나기로 했다. 숙련된 불면증 환자답게, 나는 불면증을 극복하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자는 것 따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거절당한 연인처럼 시무룩해진 잠이 살금살금 다가와 당신을 유혹한다.
-관음이웃 엄마, 참고하세요.

나는 내 몸을 이루는 여분의 지방을 죽도록 혐오한다. 이것은 평생에 걸친 나의 투쟁이었다. 살이 쪘다 빠졌다 이자까지 보태어 다시 찌는 것. 여분의 지방은 나 자신의 나약함과 나태함, 자기탐닉의 증거였다.
-3월3일 삼겹살 데이라는 핑계로 야무지게 쌈 싸먹고 여분의 지방 복리이자까지 붙어서 배에 입금됐습니다.

나는 무슨 권리로 나의 미래를 암울하게 예측하는가? 나이가 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백 가지 방법으로 달라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고 보는 것뿐.

왜 나의 고통은 이렇듯 품위가 없을까? 다른 작가들의 고통은 서사시이고 범우주적이며 전위적이지만 나의 고통은 늘 이런 식의 슬랩스틱코미디다.

(초경을 한 그 날)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우쭐한 기분에 하루에 열두 번 생리대를 갈았다.
-귀여워서 현웃 터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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