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행공포 ㅣ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에리카 종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갖고 있는 세 권의 비채 출판사 책 중 두 권 성공 후, 남은 한 권 `비행공포`까지 재밌다면 앞으로 비채 출판사의 소설은 무조건 아껴주리라 했었지. 오! 비채 모던&클래식 시리즈는 사랑이네. 600페이지 장편을 단숨에 재밌게 읽었다.
콜롬비아 대학에서 주목 받고 쉽게 대학원에 진학해 뉴욕대에서 강의와 꽤 성공적인 시집을 몇 권이나 낸 매력적인 여자 이사도라가 주인공이야. 페미니스트이면서도 일상에서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해내지 못할 때 죄책감을 갖고, 독립적인 삶과 본인만의 영역에 엄격하면서도 완벽히 일치되는 남자를 찾는 아이러니한 성질의 캐릭터. 그렇지만 실제 주변에도 되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어설프게 독립적인 현대 여성 중 하나야. 사랑의 갈구, 성적 욕망, 독신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인정, 부자연스러운 자아 의식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언제나 공허하고 언제나 미완성이며 언제나 불안한 존재인 보통 여자. 두 번 째 결혼 생활도 지루해질 무렵 나타난 남편과 반대 형질의 실존주의자. 그 두 남자 사이에서 갈등하고 결정하고 후회하고 방황하는 이야기야. 자전적 소설의 형식으로 그녀의 일생 지난 기억들과 고민들이 담겨있어. 읽는 내내 주인공 이사도라와 단 한 번도 감정 불일치가 없었어. 멋지든 흉하든, 이성적이든 감성적이든 모든 행동과 감정이 이해됐어.
여성 작가의 책은 어떻게해도 여성 작가 냄새가 나잖아. 그 소재가 뭐든 간에, 매가리 없고 모호하고 감성적이고 결국 이야기를 제대로 못 끌고나가며 혼잣말 꿍얼대는 그 특유의 느낌들을 안 좋아해. 근데 `비행공포`를 읽으면서 그.래.도. 그만이 가질 수 있는 매력과 가치를 오랜만에 시원스럽게 느꼈네. 사춘기 시절 겪어 본 그 세상 비극이 모두 내 것인 양 진지한 짝사랑의 감정을 남자가 어찌 알 것이며, 어제보다 살 찌고, 옆 친구보다 못난 생긴 기분 그 근거없이 끝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어찌 알겠어. 비참하리만큼 처절하고 사소한 진짜 속내를 풀어내니 그 모습이 니 모습이고 내 모습이고. 들킨듯한 기분에 감히 소내리어 공감하지 못하고 비웃는 척이라고 해야할 것 같은 진짜 여자 이야기. 여자들이 읽으면 `딱 나정도로만 못난 여자들`과 ˝맞아!맞아! 어머 얘˝하며 수다 떨고 온 정도의 위안과 공감이 될 것이고, 남자들이 읽으면 세상 차갑고 이성적이고 매력적인 여자의 머리 위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길거야. 장담하는데 외모 불문, 능력 불문, 매력 불문 모든 여자의 이야기야. 여자를 알고 싶다면, 여자를 꼬시고 싶다면 항상 어렵게만 느껴지는 여자를 무시하고 싶다면 읽으세요. 우리 패는 다 깠다 여자들아. 비행공포 남자편이 필요하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자란 정말 한없이 나약한(육체보다 정신이 더 문제다) 동물이고 아무 문제 없는 상황에서도 틈새를 발견해 기어코 문제를 만들어 내는 이해할 수 없는 참 피곤하고 가련한 동물이야. 그리고 이 나약함은 내가 지금까지 그래왔듯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심해질 것 같아. 요즘 내 모습으론 내가 피크 같지만 불행히도 더 심할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걸 느낌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인상깊은 번역가 이진. `비행공포`에 매료되어 에리카종에게 번역을 맡겨달라고 편지를 보내는 둥 몇 년 간 노력을 했다 한다. 작품에 대한 욕심과 이해가 깊어서인지 보지, 씹, 성기, 섹스 등의 단어가 난무하는 한 권에서 욕, 신체기관, 행위, 상황에 그저 적절한 단어를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번역된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사전적으론 문제 없는 `동의어`에서 품위를 지키고 뉘앙스와 분위기를 망가뜨리는 바보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책 띠지에 적힌 말들 중 하나도 공감이 안됐다. 그리 신선하지도 음탕하지도 않고 모든 여성들이 반드시 읽을 필요도 없다. 그차피 그들의 이야기로 더 새로울 것이 없는걸.
-발췌
그럼 그렇지. 왜 정신분석의들은 모든 질문에 질문으로 답할까?
결혼하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재미있는 남자들로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가 혼자인 것은 언제나 선택이 아닌 포기의 결과로 간주된다. 그래서 최하층민 대접을 받는다. 여자가 품위 있게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란 도무지 없다. 물론 남자만큼은 아니어도 경제력이 있을 수 있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도 그런 여자를 평화롭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친구들, 가족,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사실, 아이가 없다는 사실, 한마디로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열등하다는 증거였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것이야말로 평범하다는 증거이니까.
결혼은 분명 독신보다 나았다. 그러나 훨씬 나은 것은 아니었다.
이상적인 중산층의 결혼이었다. 함께 보낼 시간이 없는 부부. 결혼한 이유 중 한 가지를 결혼이 빼앗아버린 셈이었다.
왜 항상 남자 둘을 합쳐야만 완벽한 남자 하나가 되는 건지.
왜 여자가 남자를 거부하면, 진심으로 마음을 다해 거절하면, 남자는 여자가 예의상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그의 곁에 머물기 위해 많은 걸 버릴수록 그는 내 곁에 머물기 위해 점점 덜 버렸다. 그러고보면 나를 가장 사랑했던 남자들은 내가 가장 스스럼없이 대했던 남자들이었던 것 같다. 에로스와 필로스는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것일까? 아주 잠시조차? 끝도 없이 번갈아 찾아오는 이 상실감은, 욕망과 무관심, 무관심과 욕망의 반복되는 주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어린 시절의 잔재인지도 모르지만, 이상하게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적어도 잠재적으로 들어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도 없으면, 시원하게 울 수가 없다. 원하는 만큼 처절하게 울 수가 없다.
잠들지 못하리란 게 확실해지자 일어나기로 했다. 숙련된 불면증 환자답게, 나는 불면증을 극복하려면 선수를 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잠자는 것 따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마치 거절당한 연인처럼 시무룩해진 잠이 살금살금 다가와 당신을 유혹한다.
-관음이웃 엄마, 참고하세요.
나는 내 몸을 이루는 여분의 지방을 죽도록 혐오한다. 이것은 평생에 걸친 나의 투쟁이었다. 살이 쪘다 빠졌다 이자까지 보태어 다시 찌는 것. 여분의 지방은 나 자신의 나약함과 나태함, 자기탐닉의 증거였다.
-3월3일 삼겹살 데이라는 핑계로 야무지게 쌈 싸먹고 여분의 지방 복리이자까지 붙어서 배에 입금됐습니다.
나는 무슨 권리로 나의 미래를 암울하게 예측하는가? 나이가 들면 나는 아마도 내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수백 가지 방법으로 달라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두고 보는 것뿐.
왜 나의 고통은 이렇듯 품위가 없을까? 다른 작가들의 고통은 서사시이고 범우주적이며 전위적이지만 나의 고통은 늘 이런 식의 슬랩스틱코미디다.
(초경을 한 그 날) 어른들의 세계에 들어섰다는 우쭐한 기분에 하루에 열두 번 생리대를 갈았다.
-귀여워서 현웃 터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