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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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선물, 타인에게 말걸기의 은희경 작가 장편소설이다. 대학교 전공수업 때 `새의 선물`을 읽는게 과제였는데 그렇게 책을 많이 읽던 시절에 소설 한권 더 읽는게 뭐가 어렵다고 안읽고 학점도 뭐 C나 D 받았을거다. 굳이 졸업한 후 같은 작가의 `타인에게 말걸기` 읽곤 꽤 마음에 들어서 아 `새의 선물`도 괜찮은 소설이었겠다 읽으랄 때 읽어볼껄 생각했었다. 난 성실하지 못할 뿐더러 현재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아주 치명적인 특성이 있다. 이건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이혼한 엄마와 함께 살고있는 고등학교 1학년 강연우가 새 동네에 이사하고 새로운 학교에 입학해서 태수, 마리, 채영이라는 친구들과 알게되고 시간을 보내며 사건들을 겪는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남 눈에 띄길 싫어하고 언제나 심드렁한 태수의 침착하고 분석적인 시선으로 그 주변의 사람과 시간을 해석해가는데 ... 뭐 저 나이가 다 그렇지 하면서도 자잘한 것까지 포착하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게 유치하고 오글거렸다. 중간 중간 나오는 힙합 가사들도. 연우가 좋아하는 채영이라는 아이를 되게 남과 다른 궁금한 구석이 많은 아이로 계속 묘사하는데 언제나 큼직한 후디를 뒤집어쓰고 얼굴도 보일랑말랑하는 채영이가 내 눈엔 그저 중2병으로 보일 뿐이고. 그렇지만 서른한살이 보기에 뭐 저리 심각한가 뭐 저리 중요한가 하는 게 사실 저 나이 애들의 삶이니까 `유치한 책`이라고 평가하는 게 아니고 `십대의 시선에 충실한 책`이라고 평가한다.

연우의 상처와 채영의 상처가 얼마나 담겼든 그 줄거리는 뭐 하나 중요치 않았다. 사실 소설에서 치명적인 부분이지만 읽는 내내 등장인물이 진짜 존재하고 있다는 착각이 한번도 안들었다. 그냥 소설 속 사람들. 뭐 대단한 `소설같은` 이야기가 진행된 것도 아닌데 그냥 그랬다. 어차피 픽션이라 감정이 휩쓸릴 필요가 없다고.

읽으면서 줄거리보단 계속 내 과거의 감정에 집중하게 됐다. 강연우의 엄마 신민아씨의 말들이 학생과 어른의 온도 차를 느껴지게 만들면서 아 저땐 그랬고 지금은 이렇지.하며 10대의 나와 30대의 나를 각기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줬던 것 같다. 얼마전 일기에 중학교1학년 때 있었던 작은 사건을 쓴 것도 이 책을 읽다가 떠올라서였다. 사이가 멀어진 진슬기 때문에 울고, 선생님의 오해를 사게 만들어서 화난 박은비랑 싸워서 울고, 갑자기 장기 무단 결석을 하던 양혜령 때문에 속상해서 울고 뭐 반은 울고 반은 배꼽잡고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어찌나 지금의 나와 다른지 청소년기 강현주는 그냥 내가 아는 사람 중 하나인 다른 강현주로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어쩜 이렇게 타인에 시큰둥한지.

발췌

며칠 사이에 꽤나 늙어버린 기분이 든다. 과연. 방향은 일정하지만, 시간이란, 밀도와 속도에서는 절대로 균일하지 않은 것.


열일곱 살 우리가 폭발물이면서도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것은, 도화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에 옮길 만한 기회와 행동력과 돈과 시간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분노와 불안을 극한까지 상상할 수 있는 안전장치다.

재욱 형이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 아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야. 연우야, 이거 중요한 문제야. 약간 멀리 있는 존재라야 매력적인 거야. 뜨겁게 얽히면 터져. 알았지?

나라는 녀석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대체 어디까지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소유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면 지레 포기하면서 마치 원하지 않는 척 허세를 부려온 건 아닐까.

은행잎이 이주일 전 처음 이 거리를 뛰었을 때처럼 마냥 푸르게 보이지는 않는다. 아주 조금이지만 시간이 지나쳐갔구나.

자신이 없어지면 되나 안 되나 한번 물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짐부터 싸는 게 신민아씨 스타일이다. 그렇게 해서 자존심만 지키면 뭘 해. 원하던 것은 평생 못 가져볼텐데.
-옮기다가 눈물났다. 나도 이성보다 갈망이 앞설 수 있는 사람이었음 좋겠다. 이미 되긴 글렀지만.

서로 사이가 좋아서 가족이 행복한 게 아니라,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가족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야.
-맞는 말이고 친구 사이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남녀까지는 모르겠지만. 음. 남녀관계에서 예외같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궁금하다.

성장이란 자신이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을 자각하는 거야. 자신이 위치한 좌표를 읽게 되면 그때 비로소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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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윗듀 2016-09-07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히려 가족보다 남녀관계가 더 그런 것같아요... 각기 제 인생이 행복하다고 느끼면 정말 가족의 사이가 좋아질까요?...ㅠㅠ

Cindy.K 2016-09-07 21:11   좋아요 0 | URL
오잉 저랑 반대로네요? 가족은 그야말로 공동체이니까 1순위인 개개인의 만족이 그 다음 순위인 공동체에 긍정적으로 협조, 이해,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주지 않을까 싶어요

Cindy.K 2016-09-12 17:43   좋아요 0 | URL
반대로 연인관계는 순전히 개인의 행복을 위해 택한 관계이기 때문에 상대인 남자친구가 그만의 삶에 만족한다고 해서 저의 행복까지 영향을 줄 것 같지 않아요.

Cindy.K 2016-09-07 21:13   좋아요 0 | URL
런닝머신위에서 운동하며 써서 내가 뭔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알아들어주실테죠

스윗듀 2016-09-07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현주씨 런닝머신 위에서도 엄청 이성적으로 생각하시네요. 전 그냥 제 상황만 생각해보고 성급하게 댓글썼어요. 전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가족이랑 사이가 좋지 않아서 ㅋㅋㅋ 근데 생각해보니 지금 행복하지 않아서 여유가 없는 게 맞네요. 젠장. 두번째 댓글은 완전 공감해요. 남친이 그만의 삶에 만족하면 짜증만 날듯요. 아 이 짦은 생각er

2016-09-16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indy.K 2016-09-21 10:53   좋아요 0 | URL
저는 딱 두권만 읽어봐서 소설 속 주인공과 은희경씨를 일치시키진 못했어요. 저 역시 잎으로 딱히 은희경 작품을 찾아 읽을 것 같진 않아요. 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eBook] 독일인의 사랑 (한글판) 더클래식 세계문학 22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지음, 배명자 옮김 / 더클래식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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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사랑이 진짜 독일인의 사랑이야기였구나. 읽으면서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의 중반부까지랑 되게 비슷한 느낌이었어. 신분 차가 있던 시대 배경에 종교가 가장 큰 가치인 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순수하고 일방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에의 지향도 그래. 그래서 특별함을 느끼기 보단 저런 모습의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작가가 생각보다 많구나 싶은 마음.

어릴적 부모님을 따라 방문한 성의 후작 부부를 만나고 그들의 병약한 딸 마리아와 친구가 돼. 시간이 한참 흐르고 마리아에게 먼저 연락이 와 만나게 되고 마음 속 수호천사처럼 자리 잡고 있던 그녀가 사랑과 존경이 되어 우정을 빙자한 만남을 이어가다가 용기를 내 고백을 해. 하루하루 생사를 넘나드는 마리아게게 희망을 꿈꾸게 하는 사랑은 욕심일 뿐이고 마리아는 고민해. 뭐 이런 진부한 옛날 사랑이 이야기야.

아름답다고 해야할까. 사실 언제가부터 남녀간에 사랑이란 건 없다고 단정짓고 있었기에 이런 사랑 이야기를 읽으면 `몰라서 하는 말이지.`란 식의 빈정대는 감상을 하게 된다. 내가 꼬인 것도 아니고 과거에 상처가 있어 방어가 생긴 것도 아니고 그냥 날이 갈수록 사랑이란 잡히지 않는 순간의 허상이고 사랑처럼 보이는 관계를 이어나가게 하는 것은 의리, 동정, 성욕, 책임감, 관습 등이 아닌가 싶더라고. 당장은 죽을 듯 사랑해도 시간이 지나 그 감정이 흐트러지고 다른 요소로 지치게든 질리게든 되면 그 때는 또 다른 자극거리에 눈이 돌아가고 낭만의 열정은 옮겨가게 마련이고.

좁은 문도 독일인의 사랑도 상대가 지체 높은 가문의 따님, 본인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연상이었는지는 모르겠음) 여인, 어떤 누구와도 대체 불가능한 높은 경지의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 어릴적부터 마음에 담아 온 첫사랑이다. 고전 작가들의 취향인지 남자들의 취향인 몰라도 정신적으로 성숙한 여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현재 내 주변의 남자들과는 참 다르다싶네. 어리고 발랄한 친구들의 애교에 침 흘리는게 대다수 아니었나.

아픈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도 이곳 저곳에서 간간히 나오는 데 그것도 희한하다. 그냥 콜록콜록 아픈게 아니고 당장 오늘 내일 하는데도 아무 두려움 없이 사랑한다고 한다. 성욕이 밀려난 경지의 사랑인건가. 그런 사랑은 왜 어쩌다 하는거지(막스 밀러가 마지막 발췌로 대답합니다)

발췌

우리는 일어서기, 걷기, 말하기, 읽기를 배우지만 사랑은 배울 필요가 없다. 사랑은 생명처럼 태어날 때부터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사랑을 존재의 가장 깊은 바탕이라 하지 않던가.

어린아이는 `남`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요구하는 사랑일 뿐 헌신하는 사랑이 아니다. 나의 것이 되겠느냐고 묻는 사랑일 뿐 너의 것이 되겠다고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의심하는 사랑일 뿐이다.

살면서 격한 마음은 누그러뜨리되 유순한 마음을 완강하게 하진 마.

인간을 일생에 한번쯤 자신이 하찮은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거야.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고 자신의 존재와 기원 그리고 영원한 생명은 초자연적인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뿌리 박고 있음을 느껴야 하지.

인간은 어째서 오늘이 마지막 날일 수도 있음을 생각지 않고, 시간을 잃는 것은 영원을 잃는 것과 같음을 모른 채, 자신이 하는 최선의 것과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아름다움을 다음으로 미루는가.

˝그런데 너는 왜 나를 사랑하지?˝
˝왜냐고? 마리아! 어린아이에게 왜 태어났냐고 물어봐. 들에 핀 꽃에게 왜 피었냐고 물어봐. 태양에게 왜 햇빛을 비추냐고 물어봐.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그럴 수 밖에 없기 때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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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과열정 2017-11-04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찌보면 요즘 시대에 이 책은 조금은 진부하게 보일 수 있는데 리뷰를 너무 잘 써주셔서 이 책이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Cindy.K 2017-11-10 14:29   좋아요 0 | URL
덕분에 저도 다시 제 감상을 오랜만에 읽어보네요 ^^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해요!!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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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아니지만 가장 좋아하는 작가를 알랭 드 보통이라고 하던 때가 있었다. 낭만을 품고 분석을 하는 사람이라 내 취향과 잘 맞았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입만 산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좋아할 문장을 잘 쓰는 사람. 관찰력과 표현력은 뛰어나지만 점점 깊이랄까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더라고. 여전히 좋아하는 축에 드는 작가이긴 하지만 이제 그의 책이 유치하게 느껴졌고 한참을 안 읽다가 출장 중 읽을 책을 역시나 yes24중고에서 고르던 중 안 읽은 `공항에서 일주일을`이 있길래 해외 출장과 잘 어울리네 하며 샀다.

세상에서 제일 불편한 미국행비행기 유나이티드에어라인과 아리아호텔 만달레이베이 로비에서 읽었다. 폰트 크고 줄간격도 넓고 사진도 2페이지 한장 꼴로 나와서 사실 저렇게 이곳 저곳 갖고다니며 읽을 책도 아니었는데. 사진이 세 장이나 쌓였다.

런던 히드로 공항에서 알랭 드 보통에게 일주일간 공항에서 지내며 글을 써달라고 요청을 했다. 공항 측의 `돈 안되는` 문화 사업 아이디어에 감동을 받은 드 보통이 승낙했고 공항에서 지내며 공항 내 직원들, 오고가는 승객들, 비행기, 기내식 뭐 공항에 보이는 모든 걸 닥치는대로 이야기 하고 있다.

솔직히 너무 많이 실망했다. 히드로 공항과 작가의 주거니 받거니, 그들만의 감동 그들만의 찬사 시간이었다. 얼마나 밑도 끝도 없이 감상적인지 읽으면서 내가 지금 TV동화 행복한 세상을 보고 있나 했다. 단락이 많이 나뉘는데 꼭 그 마지막 문장마다 이 상황에선 이러 이러한 감동을 느껴야해! 하는 강요하는 식의 감동 문구가 등장했다. 예로들면 기내식을 준비하는 26살 루마니아 출신 리사를 식사 중 먹는 중 떠올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식의 쓸데 없는 감정이입. 유치하고 괜히 불쾌하다. 보통이 얘 완전 배렸네... 하며 읽었어. 공항이라는 명확한 투자자가 있어서일까 이건 뭐 헌사 수준. 읽으면서 생각한 건데 히드로공항에서 처음 요청한 작가는 알랭 드 보통이 아닐 것 같다. 상업작가 말고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서 특별함을 뽑아내는 그 날카로운 시선과 감정 포착은 여전히 뛰어나고 문장에 재치가 있어 적어도 읽으면서 지루할 일은 없다.

-발췌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니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연료 펌프가 작동을 멈추거나 엔진이 폭발하여 하늘에서 떨어지곤 하던 때에는 조직화된 종교의 주장들을 물리치고 과학에 대한 신뢰를 택하는 것이 지혜롭게 느껴졌다.다급한 과제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오작동의 근본 원인을 연구하고 이성을 통하여 오류를 박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비행이 점점 꼼꼼한 정밀조사를 받게 되고 모든 부품이 위기에 대처할 장치를 별도로 갖추게 되자, 역설적으로 미신에 의존해야 할 이유도 늘어났다. 참사가 일어날 확률이 줄어들면서 오히려 우리는 과학의 장담을 외면하고 우리의 약한 정신이 억누르려고 애쓰는 위험의 가능성을 향하여 더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힘겨운 1년간의 훈련 과정을 거쳐 이곳에 온 사람들로, 훈련의 기본적인 목표는 모든 인간을 항공기 폭파범 후보자로 보는 것이었다. 새로 알게 되는 사람과 어떻게든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관례적인 충동을 완전히 뒤집는 셈이다.

카버가 글로 쓰기 전에는 미국 서부의 고립된 작은 도시들의 적막과 슬픔이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난 적이 없지 않았을까.

죽음을 생각하면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하게 됩니다. 죽음이 우리에게 우리가 마음속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삶의 길을 따라가도록 용기를 주는 거죠.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 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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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호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2
외젠 다비 지음, 원윤수 옮김 / 민음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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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헌책방에서 약간 누렇지만 상태 좋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여서 얼른 샀다. 듣도 보도 못한 작가에 제목이라 사놓고 한참을 안 읽다가 미국가기 전 남은 3일 사이 욕심없이 슥 읽을 아무 책을 고르다 보니 아무 애정없던 북호텔을 집게됐다.

북North호텔이라는 저렴한 호텔(민박이나 여인숙에 가까운 느낌)을 운영하는 한 가족이 투숙객들과 엉켜 보내는 하루하루를 일기장에 적어놓은 듯한 소설이다. 주인장 부부 역시 가난한 하층민으로 친척의 도움으로 지저분하고 낡은 호텔을 인수하게되어 갑이라할 수 있는 운영자와 을이라 할 수 있는 투숙객(반대도 가능)이 서로 위화감 없이 그저 이웃처럼 먼 가족처럼 어울리고 트러블이 생기고 위로하고 아낀다. 일과 도박 여자 밖에 모르는 남자, 사랑하는 남자만을 바라보고 파리에 왔다가 임신 후 버림 받아 미혼모가 된 여자, 매일 술에 취해 싸우는 노부부, 악취를 풍기며 노동을 마치고 돌아와 호텔 바에서 술 한잔으로 하루 피로를 푸는 노동자들 수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데 굳이 이름과 직업 특성을 기억하며 읽을 필요 없이 그들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사람들이다. 그 많은 사람이지만 파리의 서민으로 묶일 수 있는 보통의 사람들의 보통의 하루들.

지저분하고 퀴퀴하고 무식하고 미래도 밝지 않지만 전혀 밉거나 불쾌하지 않다. 그리고 그들을 묘사하는 화자 역시 전혀 그들을 비하하거나 동정할 생각이 없다. 그들은 하나의 풍경이고 무더기로 역사이고 시간이다. 읽다보면 점점 마음이 따뜻해진다. 주인 내외의 불평없이 하루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도 좋고 언젠 달랐냐는 듯 항상 퀴퀴한 투숙객들도 정이가. 인물이니 사건보단 풍경으로 읽히는 좋은 소설이었다.

외젠 다비라는 작가 난생 처음 들어봤는데 속표지를 읽어보니 앙드레지드의 절친이었대! 둘이 여행도 다니고. 듣고보니 참 어울리는 친구들이다 싶어. 모든 것은 아름답다는 맑고 어린애같은 호기심과 인류애를 가진 앙드레 지드와 수십명의 하층민을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 외젠 다비. 문득 그들의 대화가 궁금해진다. 표정은 어땠고 목소리는 어땠을까.

발췌

여자가 그의 앞을 지나간다. 그러면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나서는 길을 딱 막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이것 봐! 키스를 해야 지나갈 수 있어.˝
대개는 언제나 그가 이겼다. 이 복도에서 몇 번이고 이런 식으로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벨 아미도 그렇고 대체 1900년대 파리는 왜 저따위인거야?


의외의 일이란 생길 수 없는 그런 생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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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6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indy.K 2016-09-21 10:52   좋아요 0 | URL
저도 호퍼의 그림은 좋아하는데 소설의 분위기와 영 안어울려서 아쉬웠어요. 그렇지만 최근 읽은 책 중에 손에 꼽을 정도로 전 북호텔이 좋았답니다. 뭐 그리 다른 사건 사고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냥 그 시대에 잠시 속한 기분이 들었어요.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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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책 찾았다.. 책을 덮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와.... 우와..... 했네. 가끔 시원찮은 책 열 권을 연달아 읽고 지금 뭐하는 건가 싶을 때가 있어도 이런 말도 안되는 책이 준비도 안된 나에게 불쑥 튀어나오니까 새로운 책 읽기를 멈출 수 없다. 헉헉. 진짜 좋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가 제목 속의 그 노인이다. 산간 지방에서 살던 이 남자는 아이가 안 생기는 탓에 동네 사람들의 입방아에 지쳐 아내와 마을을 떠났다가 우연히 문명이 닿지 않은 인디오들의 밀림에 오게돼. 원주민들과 자연을 통해 밀림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배우게 된 노인에게 힘든 건 외로움이었는데 느즈막히 본인이 글을 쓰진 못해도 읽을 줄 안다는 걸 알곤 아주 가끔씩 밀림에 들어오는 의사를 통해 책을 얻어 독서를 하게 돼. 소설 속에 나오는 단어, 장면, 감정을 아주 작은 단서까지 파고들며 독서를 즐기는 노인에게 귀찮은 사건이 생겨. 밀림을 모르는 외지인에게 죽임을 당한 살쾡이의 어미가 인간들에게 복수를 시작한거야. 그 살쾡이에게 희생되는 사람이 늘어남에 따라 읍장의 지시에 노인이 앞장을 서 암살쾡이를 추적해.

밀림, 원주민, 야생동물 내가 호기심도 관심도 전혀 가지지 못한 배경 속에 티안나게 내내 흐르고 있는 낭만의 의뢰의 밸런스가 사람을 황홀하게 만드네. 험한 자연 속에서 살고 있는 거친 노인이 연애 소설 구절을 읽으며 미소 짓고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에 눈물을 흘리는 모습은 당최 섞일 수 없는 두 가지 장르가 보란듯이 섞여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 것 같은 느낌이었어. 군더더기 없이 질질 끄는 것 없이 속도감 있게 이야기가 진행되고 문장은 모호한 부분 없이 간결하고 말끔해.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장면이 전혀 애쓰지 않아도 영화처럼 보이고 그 장면 하나하나가 아름다워 계속 감탄하며 읽게 돼. 그 와중에 피식피식 웃게되는 포인트를 제대로 알고 적재적소에 슬쩍 흘리는 위트도 정말 좋아(웃음의 9할은 읍장이었다.). 마지막 살쾡이과 노인의 일대일 대치, 그 부분이 나오기 전까진 그저 참 재밌고 잘 읽히는 마음에 드는 소설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는 읽으면서도 얼떨떨했어. 내가 대체 뭘 읽고 있는 거지?하며.

모든 것이 좋았지만 더 좋았던 건 노인을 통해 독서 중 얻는 다양한 감정을 새삼 깨닫고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던 느낌을 글로 만났다는 거였어. 그래! 그 느낌이야!하며 독서를 하는 노인을 보며 그가 말하는 `독서의 즐거움`에 공감하다 문득 스스로를 보니 그 노인과 다를 바 없이 그 `독서의 즐거움`을 주는 책을 읽으며 흥분하고 있더라고. 상상을 자아내고 감정을 동요시키는 책을 읽는 노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상상을 하고 감정이 동요되고 있는 나를 만난, 문득 되게 놀라운 체험.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중에서 아쉬운 점은 딱 하나였다. 169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발췌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나는 글을 읽을 줄 알아. 그것은 그의 평생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이었다.

직각삼각형에서 빗변은 직각의 맞은편에 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읍장 각하.˝
일행은 모두 실탄을 장전했다. 그러나 시늉뿐이었다.

두 구의 시신이 깜짝 놀란 두꺼비들와 수풀을 끌고 늪 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며 뽀얀 거품을 뿜어 올리는 광경을 지켜본 뒤에 발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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