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pyright 마크를 보면 1999년에 쓴 소설 같은데, 구성이나 무대설정의 편의를 위해서인지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지만) 이 소설의 무대는 퍼스널 컴퓨터가 처음 나오던 무렵을 전후하여 시작된다.  어느 빈터에서 살해된 전당포 주인.  이 사건을 잇는, 그러나 모두가 간과한 단서인 두 아이.  그들의 성장과정.  seemingly 시간과 공간상 전혀 관계가 없는 사건들을 연결하는 단서인 두 사람.  그들의 주변 사람들.  종국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두 사람. 

 

추리소설의 특성상 독후감을 써버리면 거의 무조건 spoiler가 나와버리는 현실 때문에, 어지간한 고전 - '셜록 홈즈'같은 - 이 아니라면 간략한 리뷰를 쓰고 마는 것이 앞으로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같은 '헌신'이나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 작품에도 나오는 테마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 건지, 또 그걸로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것인지에 대한 답, 저자는 주지 않는다.  강한 운명론, 그리고 엮이고 꼬인 인간관계와 업보의 윤회가 어떤 모티브를 주는 것 같다.  비교적 light한 편이고, 조금 읽다보면 어느 정도의 추리가 가능하다.  즉 정통 추리물과 같은 두뇌게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야기.  하지만, 꽤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시대설정 때문에 퍼스널 컴퓨터가 처음 나오던 시절 '카세트 테잎'을 돌려 데이타를 저장하고 사용하는 것에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상용화 되는 시대를 다시 그려볼 수 있는 부가적인 재미도 찾을 수 있다.  이름난 작가에 걸맞는 책.  DC된 가격으로 구매가 가능한 점도 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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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가 어릴적부터 집안 어디엔가 꽂혀있는 것을 보았던 책이다.  '백년'과 '고독'이란 말이 머리에 남아 항상 어떤 책인지, 얼마나 끔찍하게 오랜 외로움이길래 '백년'이나 '고독'한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막상 읽게 된 것은 매우 최근의 일로, 이미 동 작가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란 책을 나름 감명깊게 읽은 후 '백년의 고독' (혹은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어볼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콜레라 시대의 사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신화, 환상, 몽환적 요소들을 '부엔디아' 가문의 부침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풀어낸, 나로써는 아직까지 작가의 의도가, 즉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는 책이다.  마르께즈는 이 책으로 노벨상을 받았는데도 나는 왜 이 책이 훌륭한 작품인지 아직은 모르는 것이다.  공부가 더 필요한 것 같다.

 

정확하게 테제를 잡을 수 없는 책의 경우 적당한 시간이 흐른뒤에 읽어보면 매우 surprising하다고 할 수 있을만큼 잘 정리되어 읽히는 것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읽었을 때에는 그리 재미없게 느껴졌던 책도 재독을 하게되면 가슴에 깊이 와 닿는 것을 이미 여러번 느낀 바 있기에 경험으로 아는 것이다.  '백년의 고독'역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다음번에나 (운이 좋다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렴풋이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듯 한데, 아직까지는 꿈속과 현실의 경계사이에서 눈에 보이는 그 무엇 마냥 정확한 형상화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았다는 경험, 그리고 또다른 문학작품 한 개를 읽어냈다는 기쁨이 남는다.  저자의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잔잔함과는 다른, 색다른 맛이 있는 것 같다.  노벨상은 '개'나 '소'나 받는 것이 아니다.  캠브리지 인명사전이나 마르퀴즈 인명사전 같이 적절한 커리어를 가진 자가 돈을 주면 올려주는 것도 아니다.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은 전 세계의 문학작품들 중에서 선택되어진 것이니만큼, 깊이 다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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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다락방 2 - 실천편 - 부의 격차보다 무서운 꿈의 격차
이지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꿈꾸는 다락방 2 실천편'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이 책은 '꿈꾸는 다락방'의 후기이지 보강으로써 조금 더 실질적인 방법론과 구체적인 예를 다루었다고 한다.  이 책은 역시 '긍정의 배신'을 읽은 후 느낀 바가 있어 시작된 성공학-계발서적 다시 읽기의 두 번째로 읽게 되었는데, 처음에 읽었을 때보다 좀더 critical하게 읽은 것 같다.  매우 좋은 메시지와 이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 논증하면서 보다 확실한 방법론, 즉 field manual을 제시하려는 저자의 의도는 그 메시지 만큼이나 잘 정리가 되었기에 매우 apparent하다.

 

일전의 책에서 다룬 VD=R의 법칙은 잘못 이해하면 그야말로 안드로메다로 정신이 날아가버리는 데,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또는 R에 위배되는 행동을 해도 VD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기실 '긍정의 배신'에서 문제로 삼는 메시지, 내지는 이 메시지에 영향을 받은 행동 trend의 상당부분이 여기서 기인한다고 보는데, 저자는, 특히 개신교적인 관점에서 이런 'false' 메시지는 (1) 강사들의 본질적인 자질문제, (2) 비개신교적인 개념의 도입, 그리고 (3) follower들에 문제가 있다고 저자는 보는데, 상당부분의 공격은 (2) 비개신교적인 개념의 도입에 치중된다.  이는 저자의 개신교도로서의 바탕과 경험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본인도 인정하듯이 저자는 '스승'으로 생각했던 나폴레온 힐의 사상이 힌두이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와 '결별'할 정도로 개신교도적인 성향이 강하다.  '꿈꾸는 다락방 2 실천편'은 이런 면에서, 적어도 나의 관점으로 볼 때에는 너무도 편협한 감이 없지 않다.  실증적인 예로 자주 반복되는 VD=R과정의 '기도'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은 결국 그가 주장한 VD=R 위에 기도가 있음으로 결론지어지는데, 이는 그간 VD=R의 개념에 대한 그의 설명과 이론을 볼 때 살짝 모순됨이 느껴진다.  물론 Catholic Christian으로서 기도의 효과나 필요성에 의심을 품지는 않지만, VD=R과 연계한 저자의 이론/설명이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더욱 이슈가 있다고 보이는 부분은 (1) 정주영, (2) 이건희, 그리고 (3) 이명박을 예로 든 VD=R의 성공사례인데, 사실 이들 중 정주영 회장을 제외한 사람들이 과연 VD=R의 사례가 될 수 있는지 큰 의문이디.  초판 발행시점이 2008년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물론 저자는 이들의 사례나 개인적인 성향에 동조하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그 이상, 열거된 이 셋이 과연 일반인의 관점에서 볼 때 얼마나 VD=R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VD=R을 나쁘게 사용한 예가 더 사실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의견이다.  또한 인용된 사례들은 - 이건희/이명박의 경우 - 그들이 자신들을 promote하기 위해 출판된 책에서 주장한, 그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과거의 사건들인데, 그것을 액면 그대로 끌어다가 사용했다는 점에서 저자의 구체적인 fact search와 이에 대한 critical한 분석이 아쉽다.  온갖 편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결과가 이건희/이명박 성공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고 할 때, 과연 이 둘이 VD=R의 효과적이고 교육적인 예가 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또한 기업의 성공사례의 인용도 이런 관점으로 볼 때 문제가 있다.  이건희 체제하에서의 삼성의 성공을 예로 들 때, 이건희의 VD=R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저자의 눈에는 이건희의 vision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생하고, 죽고, 다쳤는지는 보이지 않는 것 같다.  또한 저자에 의하면 이건희는 밤에 생각하고 아침에 자면서 VD=R을 하면서 이를 '노력'보다 중요한 것인 VD=R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역설하는데, 이 역시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리더의 역할은 VD=R에서 끝나지 않는다.  즉 목표를 설정하고 비전을 내세우며 모두를 독력하고 희생을 강요하려면, 보다 더 큰 리더의 희생과 앞장섬이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요컨에 앞서 열거된 - 정주영 회장까지도 - 이런면에서 고통은 나누게 하면서 성공의 결과물은 나누는데 너무 인색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인데, 이 경우 VR=R의 실례가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VD=R을 이루는 과정의 수많은 범법, 편법행위와 법의 구멍을 이용한 요식행위, 뇌물수수, 노조탄압과 같은 외부효과들은 그들의 VD=R은 잘해야 매우 그릇된 형태로 사용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한다.

 

이런 구성상의 이슈나 저자의 개인적인 종교적 preference를 빼고, 이 책의 메시지는 간결하고 훌륭하다.  즉 Action은 VD=R을 지속시키는 에너지라는 것인데, 노력과 VD=R은 얽히고 섥혀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음양과 같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는다).  행동없는 믿음, 믿음없는 행동은 있을 수 없다는 표현과도 일맥상통하는데가 있는데, 결국 VD=R을 이루기 위한 각고의 노력이 없다면 VD=R은 허무한 개그와도 같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접하기 전 자주 써온 표현은:

 

Dream/Vision - 중장기적인, 즉 거시적인 비전과 꿈을 가질 것.

Plan - Dream/Vision에서 나온 중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꿈과 비전을 단기적인 목표로 설정하여 구체화 하는 것.  즉 행동을 위한 전초단계.

Walking - 이제 설정된 미시적인 단계목표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는 것.

 

이 세 가지의 단순화/시각화가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나 후배들에게 말해주는 내 버전의 VD=R인 셈이다.  책을 쓸 만큼 성공하지도 못했고, 구체적인 예도 조사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돌이켜보면 나의 삶의 패턴이 되었던 법칙이기에 여기서 써 보았다. 

 

이슈가 되는 부분과 군더더기를 다 떨어내면 내가 찾은 '꿈꾸는 다락방 2 실천편'의 결론은 이렇다. VD=R - 내가 잘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라.  그것이 VD=R을 지속시키는 꾸준한 action으로 연결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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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도
펠릭스 J. 팔마 지음, 변선희 옮김 / 살림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19세기말 영국.  공상과학 (Science Fiction)이라는 장르가 정확하게 정립되기도 전, 쥘 베른같은 거장의 뒤를 이어 H.G. 웰스라는 걸출한 작가가 Time Machine이라는 책으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한편, 시대를 더욱 열광하게 만든 이가 있으니 쥘리암 머레이가 바로 그 사람.  무역과 모험을 통해 부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진 그에 의하면 시간여행을 가능케하는 것은 과학이 아니라 마법이었으니, 원주민 부족에게서 시간의 막을 뚫어놓은 상태를 거대한 상자에 봉인하여 런던으로 가져와 시간여행시대를 연다, 매우 비싼 값으로...  

과학과 기술의 진보에 열광하는 시대.  20세기는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던 이 '순수의 시대' 뒷편에는 가난한 절대다수가 런던의 배설구에서 나오는 쓰레기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터운 안개속을 활보하는 Jack the Ripper에 의해 뒷골목의 창녀들이 하나씩 살해당하고... 

이 책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누어질 수 있는데, (1) 헤링턴의 과거여행을 통한 애인 구출작전, (2) 미래에서 온 데릭 셰클튼 대장과 19세기 귀족 아가씨의 사랑, 그리고 (3) 미래인의 유명작가 납치살해극이 바로 그들이고, 이들은 또 서로 시간과 공간으로 맺어져 있다.  이 이야기의 모든 포커스, 나아가서 시작과 끝은 쥘리암 머레이와 H.G. 웰스.  소설의 특성상 이 이상의 줄거리는 스포일러가 될 뿐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재미있게 쓴 소설이고, 'Time Traveller's Wife'라는 책/영화에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theory가 일부 사용되었기에 더욱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매우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나의 이상향 (셜록홈즈전집 리뷰에서, 그리고 그 후에도 종종 밝혔듯이)인 이 시대의 런던이 주요무대로 등장하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PS 영어번역본을 먼저 읽고 쓴 후기를 일부 고쳐서 한국어 판 발간에 따라 다시 올린다.  요즘 이상하게도 영어책 리뷰는 '책'의 그림이 모두 깨져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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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다락방 - 생생하게 꿈꾸면 이루어진다
이지성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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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바쁘게 꿈꾸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때인데, 이때의 나의 한주는 대략 주당 20시간의 아르바이트, 졸업논문준비, 수강과목공부, 그리고 로스쿨 입학시험공부로 짜여져 있었다.  정말이지 바쁜 나날들이었는데,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꿈꾸는 다락방'의 저자인 이지성님 (그리고 수많은 자기계발서적들의 저자들이 아울러 말하는)이 말하는 R=VD가 가장 강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그후에도 꾸준한 행동과 노력으로 비전을 실행하하여 왔지만, 좌절하거나 의심하는 때가 많았고, 결과적으로 이는 나의 underachievement로 나타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지금, 나는 처음으로 창업을 앞두고 있다.  다시는 남의 밑에서 일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평생 실현하기 위한 첫 발걸음을 내딛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의 각오를 다지고, 무엇보다 예전의 나, 꿈이 이루어짐을 믿어의심치 않던 나로 돌아가기 위한 독서가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으니, 최근의 경제불황의 여파와 그간 난무하던 자기계발서적 및 성공학 강사들, 그리고 faulty한 대기업들에 의한 무분별한 성공학오용 및 남용에 따른 reaction으로 나온것 같은 '긍정의 배반' 이란 책을 읽고 나서 든 의문 때문이다.

 

'긍정의 배반'에서 지적하는 포인트는 매우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진다.  다만 저자가 지적하는 모든 것을 다 수용하여 그간 읽은 계발서적들 및 리더들을 모두 부정하는 것은 또 하나의 extreme이라 생각되어 일단 판단을 보류하기로 하고, 모아놓은 책들을 다시 읽어보자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어젯밤부터 다시 읽기의 첫 번째로 이지성의 '꿈꾸는 다락방'을 잡게 된 것이다.  '긍정의 배반'에 대한, 그리고 그간 읽어왔던 - 앞으로 다시 읽게될 - 수많은 계발서적들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는 이때까지 아껴두려고 한다.

 

'꿈꾸는 다락방'에 의하면 Vivid한 Dreaming은 Reality로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를 이루는 방법들은 크게 (1) 쓰기, (2) 보기 (시각화), (3) 장소에 가기, 그리고 (4) 행동하기로 형상화 하는 것임을 저자는 여러가지 예를 들어 역설하고 있다.  계발서적들을 읽기 전부터 이런 연습을 - 그때는 몰랐지만 - 해온 나로서는 그리 낯설은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의 개신교인으로서의 일부 수정주의가 조금 이채로울 뿐이다.  

 

용기를 얻어야 하는 지금, 이 책을 읽고 느낀 바가 있어, 그간의 부지런하지 못했던 나의 영성생활과 이로 인하여 더욱 힘들게 느껴진 현실, 그리고 이것으로 인해 cause된 수많은 내외적인 나의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하여, 그리하여 다시 꿈을 현실로 이룰 수 있는 '믿어의심치'않는 나의 모습을 찾기 위하여 마침 바닷가에 위치한 성당의 11시 미사를 다녀왔다.  카톨릭이라면 알겠지만, 그간의 불성실한 생활을 바로잡기 위한 고백성사도 기회가 되어 마쳤고, 지금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나의 VD=R을 위한 실천을 시작하였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메세지는 다르게 해석되고 이에 따라 실천도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극단적으로 말해 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가 마시면 독이되고 양이 마시면 양모가 되는 것처럼 (물론 계발서적의 저자들이나 강사들의 책임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자기 자신의 마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지금까지는 생각이 된다, 전적으로 나에 비추어 말이다.  힘들때,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이 필요할 때, 아니면 어릴 때, 꿈많고 믿어의심치 않던 시절이 그립다면, 필요하다면, 이렇게 다시 시작하는 것도 좋지 않을까?  이지성이라는 저자를 떠나서 이 책은 그런 의미로 추천하고 싶다.

 

PS. 11시 미사에서 강독된 말씀이 하필이면 '믿음'에 관한 것이었다.  강한 '믿음'이 있으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테마의 신약 에피소드였는데, 우연으로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필 강하게 믿어의심치 않는 나로 돌아가기 위한 결심을 행동으로 옮긴 첫 날 간 미사의 말씀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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