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건만. 어쩌다 보니 이번 일요일도 사무실에서 반나절을 보내버렸다. 그만큼 내일의 일이 줄어든다는 계산과는 달리, 하지만, 주말에 일을 하므로써 얻어지는 건 다른 일을, 그리고 더 많이 할 시간이라는 역설이다. 그래도 가뿐하게 몇 개의 업무처리를 마치고 어제 IKEA에서 사온 플라스틱 박스에 그간 종이박스에 보관하던 종료된 케이스 파일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여기까지 마치고 나니 대략 오후 한 시반. gym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가려다가 BN에서 책이나 읽자고 하면서 왔다. 그리고 아이스 커피 한 잔과 앉아서 다시 한 시간 반 정도를 보내고 나니, 어제부터 읽던 장정일의 책이 끝났다. 같이 구입한 공룡에 관한 책을 마저 읽으려다가 조금 쉬면서, 다시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뽑아 노트북을 켜고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 최근에 알게 된 것인데, 일반 brew커피처럼 아이스 커피도 50센트면 refill이 된다. espresso야 당연히 refill이 없지만. 어쨌든 덕분에 가끔 시간이 있으면 커피 두 잔을 마시곤 한다. 갑자기 날이 풀려 한껏 봄햇살을 받은 오늘이라면 아이스 커피 두 잔도 괜찮다. 여기에 서점 내의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공짜 WiFi 덕분에 앱을 통해 스트리밍되는 KUSC의 클래식이나 KPLU의 재즈를 듣고 있으니 잠깐이지만 정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다.
어제 새벽의 감성을 이어 이 책을 읽었다. 앞서의 책이 나오고 나서 3년 정도가 지난 다음에 나온 책이다. 시간대가 달라서였을까, 새벽에 느낀 정도의 필이 충만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 흠이지만, 이 책에서 다룬 또다른 영화들 덕분에 예전에 무심코 넘긴 영화들 몇 편을 다시 들여다볼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와 잉마르 베리만의 작품들이 지금 생각하는 리스트의 일부. 아무래도 이야기를 듣고나면 좀더 깊은 의미로 다가올 것이기에 이들 영화를 보는 것을 기대하게 된다. '다운'받는 것을 하지 않을 생각이다. 갖고 있는 DVD나 비디오테잎을 뒤져서 꼭 아날로그하게 - 비록 매체가 이미 디지털이고 하더라도 - 볼 것이다. 과정이 결말보다 중요하다는 말처럼, 우리의 일상과 정신에서 하나의 '행위'가 차지하는 부분이 생각보다 큰데,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좋았던 여행도 있고, 캐스트 어웨이를 따라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나 어려웠던 티벳에서의 머묾을 보면서, 그래도 비용과 준비차원에서 지원을 받고 이런 여행을 한 후 책을 쓰는 건 참 좋겠다며 계속 부러워했다. '영리'목적의 여행이지만, 이런 여행과 평소의 감성이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생활속에 녹아있기에 이동진이 읽어주는 책은 한 귀절씩 그렇게 맘속 깊이 들어온다. 평범한 곳이야 나 정도의 초보라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어떤 지역은 언론사의 취재를 위해 미리 협조를 받아 arrange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들이 있어 살짝 공감도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제공받은 CD의 음악도 듣고 하면서 꽤 좋은 시간을 보냈다.
다 읽고 나니 살짝 후회가 밀려온다. 사들이고 싶은 책을 가득 추천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정말 "책 많으면 부자"가 아니라 "책 사느라 적자"가 될 판이니까. 그러나 개가 똥을 끊지, 내가 책을 사들이는 걸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43인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났다. 내가 알던 인물은 김기협, 이다 도시, 조용헌을 비롯해 다섯 분도 채 되지 않았던 것 같고, 거의 다 모르는 사람들이, 희곡인으로, 소설가로, 인문학자로, 다양하게 등장했다.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아도 짧은 삶이라지만, 계속 익숙한 것만 보고 듣고 접하는 삶은 - 그 나름대로의 평화가 있겠지만 - 적어도 지금의 나에게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싫어하는 사람의 책을 굳이 사서 보거나 하지는 않고 있다. 기실 공론도 좋고, 공평한 시각도, 열린 마음도 좋지만, 어디까지나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아무리 맘을 열고 상대방의 시각에서 보려고 한들, 변희재나 2000년대 이후의 조갑제의 글을 읽을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수준에서 다른 것에도 맘을 열어야 하는 것이다.
평소 장정일의 책을 읽으면서는 밑줄을 많이 긋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더 자유로운 flow를 느끼면서 읽기 위해 아예 자와 펜을 챙기지 않았고, 좋은 말이 있어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과연,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던 때보다 훨씬 더 생각의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전체적인 구도를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밑줄긋기가 좋은 습관이기는 하지만, 간혹 밑줄긋기라는 행위에 또는 전체적인 내용을 보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그저 좋은 문장을 찾고 있는 건 아닌가 한번 정도 생각하게 된다. 운동도 같은 걸 계속 하면 plateau (사전을 보니 고원현상이라고 하는데, 이 말의 의미가 더 어렵다)가 오는 것처럼, 책읽기도 한 가지 방법만이 능사는 아닐게다.
어느덧 오후 3시 반. 오전에 UFC를 보려고 했는데, 자다 회사로 뛰어나가느라 놓쳤고, 주말은 그렇게 지나가고 있다. 그래도 꽤 행복한 이틀이었다. 이런 여유가 자주 오지 않기에 더욱 소중한 일상의 추억이 된, 그런 행복한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