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으로 책읽기가 시들해지는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쨌든 마구잡이로 만화책이든, 소설이든 닥치는 대로 읽어서 다시 책읽기의 재미를 느끼고 거기서부터 고전문학이나 논픽션 같은 책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의 방법이 다른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책읽기에서 한 동안 멀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 어떻게 하든지 다시 재미를 느끼고 읽어가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한 3-4년, 새로 사들인 책도 별로 없이, 책장에 멋지게 꽂아놓고 지나갔던 때가 있는데, 꽤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지금 돌아봐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  마침 알라딘에 주문한 책들이 한 시기에 들어왔고, 추리소설, 무협지, 고전문학, 논픽션 등 다양한 녀석들을 받게 되어 일단 읽고 싶은 책들부터 달려들기로 했다.














[선례후병]이라고 했으니, 일단 칭찬부터 하자.  금사벽혈검은 내가 유일하게 갖지 못했던 김용의 작품이다.  처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것이 1993년이니까, 중간에 구했을 법도 한데, 어쩌다 보니 나온 것도 모르고 지나갔던 것.  최근에 사조삼부곡과 녹정기, 천룡팔부와 비곡소오강호를 새로 구하면서 이 책도 함께 사들여 읽은 것으로 난 김용이 쓴 모든 작품들을 읽었고, 갖고 있게 되었다.  녹정기-비호외전-설산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편에 해당하는 이 작품의 배경은 명나라가 망하기 직전의 중국인데, 주인공은 당시 반간계로 억울하게 죽은 명나라 마지막 명장 원숭환의 아들이다.  워낙 뒷날 언급되는 철검문의 구난, 오독교의 하척수, 화산파의 귀신수 부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주요인물로 등장했기 때문에 그간의 많은 궁금증이 풀렸는데, missing link를 찾은, 딱 그런 기분이다.  여기까지는 좋은 이야기.


나쁜 이야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일단 번역.  이건 중국어를 모르는 내가 봐도 발번역이 분명한데,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부분에서 한국어로 말이 되지 않는 표현, 그러니까 초중국어를 하는 초보가 문장을 직역해 놓은 듯한 번역이 많았다.  무협지를 많이 읽었고, 스토리와 문파의 배경을 잘 아는 나였기에 스토리를 파악하면서 읽을 수 있었진, 초심자가 이 책을 봤으면 다시는 무협지를 찾지 않았을 정도로 무성의한 번역, 감수 및 편집과 교정이 아니었나 싶다.  1993년에 처음 나왔고, 최근에 다시 나왔는데, 거의 있는 그대로 재출간한 것 같다.  번역의 문제도 있지만, 개발로 편집하고 교정한 티가 너무 많이 난다.  누구냐 넌?


여기에 너무도 자주 등장인물이나 주요배경의 명칭이 이상하게 나왔기 때문에 역시 기존의 무협진와 배경지식이 아니었더라면 다 읽지 않았을 것 같은 부분이 많다.  점창파를 정창파로, 황옥도인과 황목도인이 왔다갔다 하는 건 애교. 


중원문화사는 그간 영웅문으로 대표되던 김용의 다양한 작품들을 번역해 들여온 공로가 있다. 불법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난 영웅문 말고도 천룡팔부 (대륙의 별), 녹정기, 비곡소오강호 (아! 만리성), 협객행, 연성결, 설산비호, 비호외전 등의 다양한 작품을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맘을 갖고 있다.  그리고 사실 번역도 이제까지의 경우 금사벽혈검처럼 이상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유독 이번의 작품은 문제가 많은 것이 좀 이상하다.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십팔사략도 구할 계획인데, 좀더 나은 번역이었으면 한다.  


이 책은 김용의 두 번째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작가가 다시 고쳐서 출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과관계나 진행이 매끄럽지 못하다.  김용 하면 역사소설 수준의 무협지를 쓴 작가라고 알지만, 이 책의 완성도는 처녀작인 서검은구록 (소설 청향비)보다도 못한 것 같다.  명나라 숭정황제-틈왕 이자성-오삼계-금나라의 역학관계에서 명나라가 망한 건 이자성에 의해서인데, 이자성은 정권을 잡자마자 바로 민심을 잃고, 특히 산해관을 지키던 총병 오삼계의 애첩을 빼앗은 탓에 금나라와 오삼계의 연합으로 바로 왕권을 잃고 말았으니, 대업을 이루는 것은 어렵지는 이것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한가지 특이한 건 역시 협사의 역할인데, 원승지는 그토록 고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대세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사태판단도 너무 순진하다고 할 만큼 부족한 모습을 보이는데, 이런 점들은 나중에 나온 작품들에서 많이 고쳐진 것으로 생각된다.  예전 홍콩영화 클래식에서 나온 금사벽혈검 영화에서의 유치한 액션이 자꾸 떠올라서 몰입도가 떨어지는 탓에 살짝 고생을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많은 무협지, 하고도 한국의 무협소설들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한 구도와 기승전결을 보이는 반면에 좌백의 소설들은 굉장히 특이한 이야기와 주인공, 배경과 반전을 보여준다.  '대도오'난 '생사박'에서의 주인공들도 그랬고, 간혹 보는 단편에서도 그렇다.  덕분에 오히려 이 책은 금사벽혈검보다 훨씬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거부가 아들이 돈도 지키고 잘 살 수 있게 고수로 만들었지만, 정작 돈을 벌고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죽은 탓에 가난해진 이야기나, 순전히 우연으로 세상을 떠돌다가 흑도 고수의 제자가 된 정생의 이야기도 그렇고, 허무와 반전, 그리고 거창함을 쏙 빼버린 강호와 기인협사의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데, 이게 좌백식 이야기의 매력이 아닌가 싶다.  진산이 보여주는 영상미에 가까운 묘사나 구성은 볼 수 없고, 매일 보는 우리 세상의 삶과 아귀다툼이 좌백이 보여주는 강호의 모습이다.  '대도오'는 언제든 나오면 다시 구할 생각인데, 다른 작품들도 일단 나오는 건 다 봐야한다.


이들 외에도 두 권을 더 읽었는데, 일단 따로 정리하기로 한다.  비곡소오강호를 다시 읽을까 고민하고 있으나 너무 바쁜 스케줄과 다음 주에 잡힌 출장을 make-up하려고 주말에 나와서 일을 하고 있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이렇게 물을 붓다보면 파이프에서 콸콸 신선한 지하수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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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2016-04-17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들도 있구나 했습니다. lol 저도 조금씩이라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 뭔가 팍 터지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나름 노력하고 있습니다.

많이 바쁘시다니 좋습니다 (만) 글 좀 자주 써 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다리거든요. ㅎㅎ

transient-guest 2016-04-18 11:45   좋아요 0 | URL
무협지는 안 보셨나봐요. 흥미위주가 대부분이지만 작품성과 가독성이 높은 것들도 꽤 있습니다.ㅎㅎ 늘 up and down이에요. 책이 많아지면서 더 그런 듯 합니다. 원래 한 권씩 구해서 귀하게 읽어야 하는건데...ㅎㅎ 기다려주신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저 한 권이라도 더 소개하는 정도면 바랄 것이 없네요..

오드득 2016-04-1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책 읽기가 시들한 시점인데 닥치는 대로 읽어서 넘기려고 하고 있어요. 저랑 비슷한 방식이라 놀랐습니다^^
저는 소오강호를 가장 좋아합니다. 호금전의 영화 때문에 읽게되었는데 정말 좋더군요. 그것이 김용과의 첫만남이었습니다. 벽혈검도 장철의 영화로만 봤는데 언제 한 번 만나봐야겠네요^^

transient-guest 2016-04-18 11:4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ㅎㅎ 세상이 넓고 사람도 많은데, 또 이렇게 비슷한 경우도 보네요. 읽을수록 소오강호의 매력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소오강호의 영호충은 참 멋진 협객이라서 저도 아주 좋아합니다. 호금전 감독은 `협녀`로 접했구 영상미와 디테일이 좋은 감독이라고 봤습니다. 김용의 작품은 우수한 것들이 꽤 있습니다. 드디어 전작했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