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서경식 지음, 박광현 옮김 / 창비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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쁘리모 레비는 유대계 이탈리아인으로서 2차대전이 끝나가던 무렵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가 망한 후에 이루어진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수용소로 끌려갔던 사람이다.  여기서의 경험과 유대인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많은 책을 썼는데, 모든 것을 그렇게 다 털어냈다고 생각하던 무렵 갑자기 자살한 사람이다.  서경식 교수는 쁘리모 레비가 죽은 후 그 자취를 따라 또리노를 돌아다닌 후 이 책을 썼다.  여러 모로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서경식 교수를 통해 다른 이들을 만나는 것은 책에서만 찾게 되는 즐거움인데, 문제는 서경식 교수, 그리고 그가 다루는 주제나 인물의 특성상 즐거움은 씁쓸함을 함께 가져온다는 점이다.


악한 사람들을 타자화하여 욕하는 것, 즉 그들은 괴물인 "이해의 바깥"에 존재하는, 이성을 초월한 괴물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단순하고 쉬운 방법으로 어떤 사건이나 행위를 이해하는 것이다.  서경식 교수가 쓴 이 말 (살짝 paraphrase한)을 본 순간, 그의 책을 읽으면서 느낀 피로감과 절망감의 원인에 조금은 다가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괴물이 자기 자신이나 다른 보통 사람들과 같은 인간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어찌될까..."  '병신년의 얼굴들'이란 제목으로 올린 어떤 사진속의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 또한 집에 가면 누군가의 엄마이고, 할머니이고, 아내일 것이란 생각에 아뜩해지는 건 이런 이유다.  


일전에 서경식 교수가 쓴 "내 서재 속 고전"을 보는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이유는 그의 삶 내내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이에 못지 않은, 모국에서의 시선, 게다가 학내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국내 공안세력이 조작한 북한 스파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고문 받고, 재판을 받은 후 실형을 살았던 두 형들을 생각하면, 그의 인생에서 반대쪽에 서 있는 저편의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시도는...그야말로 심신을 갉아먹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이는 쁘리모 레비에게 있어 독일인을 악마가 아닌 사람으로 바라보면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펑범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그를 "소통 불능의 깊은 균열 속으로 빠져"들게 했음을 서경식 교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사 청산과 화해를 부르짖는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음은 매한가지.  거기다 타자화도 어려운 그들은, 너무도 평범한 선의를 가장하는 그들은  상황을 교묘하게 왜곡하여 피해자를 가해자로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다.  이런 사례는 재일조선인인 서경식 교수가 너무도 잘 알고 있고, 그간 일본의 우익정치인들과 이 땅의 친일파와 독재부역세력을 경험한 우리도 또한 너무 익숙하다.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그때는 '시대'가 좋지 않았고 '전쟁'은 그런 것이며, 일부의 '광신적 군인'이 폭주한 것이지 국민도 (왜왕)도 이 '사실을 몰랐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공생'을 위해서는 서로 '원한'을 버릴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이때 서경식 교수는 "조선인이 일본인에게 '원한'을 품는 이유를 얼마든지 댈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서로'라는 말이" 수상하게 느껴진다.  이런 자들은 한국이나 왜를 가리지 않고 "실제 '증오'의 원인이 된...현실을 개선하려고 하기는커녕 가해자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다 털어버리라고 강요한다고 한다.  이게 일본의 우익이나 소위 온건중돈만의 현실이 아니라는 점이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고, 가끔은 이유도 없이 분노하고 잔인한 생각을 하게 한다.


하나씩 서경식 교수가 저술한 책과 그가 소개한 책들을 읽으면서 천천히 이 가슴아픈 역사를 깊이 가슴에 새길 것이다.  선행학습을 통하여 미리 피로감을 느끼는 체험을 통해, 아무리 심각하고 긴 반동의 세월을 살더라도, 더 나이가 들어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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