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엘 니뇨가 그 효력을 발휘하려는지 오늘부터 주말까지 계속 비가 온다고 한다. 목요일인 오늘, 새벽부터 지금까지 on-off로 계속 비가 오는 덕분에 아침부터 소녀감성에 흠뻑 취해 있었다. 오전부터 어두운 바깥을 보면서, 잔잔하게 우효의 노래를 듣다가 내친김에 아이유까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슬프게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가슴이 설렐 일이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때가 있는데, 오늘 만큼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소년이 되어 설레는 맘으로 하루를 보냈다. 물론 정신 없는 하루였지만, 배경에 이렇게 예쁜 소녀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슈베르트의 '숭어'를 듣고 있다. 비는 잠시 멈춘 듯. 경쾌한 5중주가 사뭇 즐거운 듯 하지만, 오늘의 감성에는 맞지 않는 것을 느낀다. 곡을 바꾸려고 하였으나 막상 떠오르는 것이 없어 그냥 두었다. 우효와 아이유 CD는 회사에 두고 왔기 때문에 미니컴퍼넌트를 켠 후 CD를 꺼내고 기계에 넣거나 아니면 미니 LP Player를 연결해서 판을 얹는 ritual은 생략된다.
생각해보면 카세트 테잎으로 음악을 듣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LP를 사고, 토요일 오전수업을 마치고 돌아와서 빈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거실 한 쪽을 거의 차지하던 인켈전축의 문을 열고 기기를 하나씩 켠 후 워밍업이 되면 LP에 판을 올려 놓던 시절의 예식은 스트리밍으로 그때의 필요에 따라 음악을 찾아 듣는 요즘에는 거추장스러운 호사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렇게 물리적인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과거의 유물 같은 사람이지 싶다.
그때 사들인 LP는 지금도 대부분 갖고 있지만, 잦은 이사와 관리부실 덕분에 판이 자주 뜬다. 버릴까 하다가 혹시 이걸 어떻게 좀 잘 나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는 마음에 갖고 있다. CD로 듣는 소리와 LP로 듣는 소리는 지금와서 들어보면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 가능하면 LP로 듣고 싶다. 책도 많은데 김갑수 선생처럼 판을 사들일 수도 없고, 그 정도의 귀를 갖지 못해서 그냥 기회가 될 때 한 두개씩 복각되어 나온 물건을 사거나 중고상점에서 몇 개씩 구하는 정도다. 넉넉한 공간이라면 책과 음반, 그리고 엄청 많이 갖고 있는 영화 비디오/DVD를 잘 펼쳐놓고 즐기련만. 남자는 역시 작업실이 필요한게다.
페이퍼를 연 것은 책을 남기기 위해서였는데 모처럼 다른 얘기를 하게 되어 이대로 남기고 싶다. 오늘의 여운이 조금만 더 길게 남아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