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만 보고 테마를 유추하여 책을 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물론 제목과 저자, 소개글, 페이퍼 등을 좀더 들여다보고 사는 책도 있지만, 이렇게 짧은 순간에 구매를 결정하게 되는 책들이 없지는 않은데, 아무래도 실패할 확률이 높다.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이번에도 그런 책을 한 권 구해서 읽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최소한 책의 부제라도 읽어보고 구매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제목이 맘에 들었다. 또 그간 읽었던 노명우의 책에서의 연결선상에 있는 이야기를 좀더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그저 그렇다. 강XX, 박XX, 김XX 같이 독서/자계를 합쳐 교묘하게 강연장사를 하는 사람의 글빨처럼 논리를 가장한 주장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저자의 말에는 일관성도 부족하고, 논리도 부족하며, 심지어는 자신이 주장하는 바와 반대의 의견과 자신의 의견을 전혀 다른 잣대로 이야기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의도도 알겠고, 심지어 공감할 수 있는 몇 가지 결론 또는 선언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내용의 구성이 이다지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내 탓이기만 할까? 내가 포인트를 놓쳤을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있다. 하지만, 주제에 따라 전개를 바꾸고 이야기의 논리를 바꾸어 나가는 표현방법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저자가 살고 있는 방법으로써의 고독 이야기는 그나마 조금 나은 편이지만, 이것을 자꾸 일반화하는 것은 저자가 비난하는 대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고독은 누군가에게 좋은 것이라고, 꼭 필요한 것이라고 강요하는 듯하다. 나는 고독하게 사는데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어우러져 사는 너희들이 이상한 거야 라고 항변하는 듯한 논조 또한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여하튼 부정확한 시각과 논리가 아닌 논리까지 상당히 묘한 책이다. 알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것 같다. 결론을 정해놓고 계속 이를 향해 논리를 만들고 예제를 끼워 넣는 책은 별로다.
왜 짜장면을 자꾸만 자장면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왜 국어 맞춤법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건드려지는 것일까? 왜 뉴스 아나운서는 된소리를 하지 않으려고 이상한 발음을 하는 것일까? 늘 궁금하다. 물론 이 책은 이런 궁금증에 답을 주는 책이 아니지만.
작중 화자인 나는 17세의 모범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을의 인격자이자 자상하기 그지없는, 하지만 엄마에게는 매우 폭력적인 아버지가 내가 낸 오토바이 사고 때문에 엄마를 두들겨 패는 것에 반발하고 도시로 뛰쳐나가 중국집에서 먹고 자며 배달일을 하면서 반항으로 가득한 청춘 한 때를 보내게 된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 겪는 일들을 담담하고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 나이가 되어 이런 글에 마음이 동하지는 않고, 연애담도 그저 그런 이야기 정도로 밖에 연상되지 않지만, 문득 인생의 고비에서 나도 이렇게 한번 정도 다 집어던져봤더라면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역시 아저씨라서, 짜장면 배달, 미용실 시다, 다른 오토바이 배달부 아이들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그저 머리를 염색한 앳된, 그러니까 매우 정형화된 자퇴 청소년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사유를 낭비했다.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그리고 자상한 아빠와 대비되는 엄마에 집중된 가장의 폭력에서는 내 세대의 아버지상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역시 나는 나이가 많이 먹어버린 것 같다. 안도현 시인의 다른 책도 이렇게 맛깔나는 글을 선사할지 궁금한데, 그의 백석 평전을 읽어보고 싶다.
나는 organic이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위에는 natural food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거의 모든 것을 natural하게 생산하여 빵을 구워 파는 한 고집센 탈시스템화한 일본인의 자본론적인 삶에 대한 고찰이다. 적게 벌어서 잉여자본을 남기지 않고, 탈구조화하여 자본주의적인 착취를 피하는 것이 테제인데,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나마 작은 가게에서 비교적 낮은 rent로 그리고 시골의 삶이 주는 넉넉함이 전제되어 가능한 시도라고 본다. 일단 도시에서 남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현재의 대세를 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런 movement가 반갑지만, 모두에게 퍼질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구조를 고치지 못하면 향후 10-15년 내에 다가올 엄청난 innovation의 세상이 그야말로 생지옥으로 변할 수도 있음이다.
자본주의가 극에 달한 지금은 분명히 무엇인가 큰 변화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다. 당장 자본은 생산과 설비나 개발에 투자되지 못하고, 그 자체를 불리는 금융시장에 집중된다. 결과 돈은 늘어나는데 풍요는 늘어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하층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게다가 회사들도 디지털 산업이라는 허울아래 정작 필요가 되는 그 무엇을 생산하거나 개발하지 않고 소위 나까마 짓을 하는 회사만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 현 실리콘 밸리의 벤처붐의 다른 실상이다. 서비스이든, S/W이든, 실제로 소용이 되는 무엇을 생산하는 회사는 극히 적기 때문에 이미 2016-17년에 다시 한번 버블이 터지는 때가 온다고들 한다. 그 전조일까, 엊그제 트위터가 300여명의 엔지니어들을 해고했다.
이런 구조적 결함을 당장 고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은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만 모두에게 해당할 수는 없기 때문에 더더욱 많은 이들이 성찰하고 고민하여 탈구조화, 아니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만 이 사회가 계속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앞서 읽은 책들 두 권을 포함한 세 권의 책과 함께 읽으면 더욱 이해하기 쉽다.
김애란은 참 글을 잘 쓰는 작가이다. 그녀의 책을 몇 권인가 읽었는데, 한번도 실망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은희경처럼 너무 성적인 개방에 집착하거나 좀 떠들어대는 느낌도 없다. 개인적으로 은희경 작가도 좋아하는 편이지만, 너무 수다스럽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는데, 김애란의 경우는 참 차분하게 글을 전개한다.
'침이 고인다'는 각각의 스토리가 일견 따로 읽히면서도 묘하게 장편처럼 연결이 되는 구조인데, 아직도 난 이 책이 한 편의 스토리인지, 단편의 모음인지 헷깔려하고 있는데, 모두 20-30대의 이야기, 주로 여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지금 그들 대부분일 도시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에 읽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겉으로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아주 극히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는 도시인부터, job과 job사이를 뛰는 계약직부터, 거의 대부분 사실상 도시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을 20-30대의 모습이 슬픈건 그들이 돈을 벌지 못하거나 결혼하지 못했거나, 성공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내 마음이 아픈건 그들 대다수가 어떤 꿈을 꿀 수조차 없는 환경에 놓인채 하루살이처럼 눈앞의 삶에 급급하게 살고 있다는 것이고, 대다수의 경우 현재의 구조에서는 절대로 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헬조선이니 망한민국이니 하면서 20-30대의 대한민국탈출이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한참 맘이 아팠다.
책을 계속 사들인 작년보다도 더 많은 책을 사들인 것 같다. 회사가 안정되면서, 수입이 늘어난 덕분에 정말이지 책은 원없이 사들여 보고 있다. 비록 영세한 자영업자라서 매년 매출에 신경을 쓰면서 살아가지만, 이렇게 조금씩 커간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