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이 필요했던 것일게다. 아니면 그냥 농땡이 치는 시간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오전의 일정을 마친 후, 넉넉하게 다른 잡무를 끝낸 오후 3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사무실을 나왔고, 갈 곳이 없어서, 잡지를 보러,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둘러보기 위해서 그렇게 방앗간에 가는 참새처럼 서점으로 와버렸다. 어제 느즈막히 잡은 '대낮의 사각'을 새벽 2시까지 붙잡고 읽은 끝에 최근에 후기가 밀린 추리소설만 네 권이 되어버렸다. 그들을 기억해보는 것으로 다시 후기를 남겨보기로 했다.
부제하여 '헤라클레스의 모험'이다. 에르큘 포와로가 친구와의 대화에 따른 고전신화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헤라클레스의 열 두가지 모험의 테마를 하나씩 적용한 열 두가지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각각의 스토리가 짧은 편이고, 헤라클레스가 수행한 열 두가지의 과업을 대입한 이야기라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물론 이 정도가 되면 진지한 추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보면 그만이다. 헤라클레스라는 희랍어를 로마-영어로 바꾸면 허큘리스가 되는데, 프랑스어로 이는 '에르큘'이 된다. 비록 신체적인 조건은 고대의 반인-반신과 비교할 수 없겠지만, 헤라클레스에게 있는 근육량만큼의 회색세포를 갖고 있는 에르큘은 그만의 방식으로 열 두가지 과업에 대입한 사건들을 해결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논다. 그것을 보면서 남자는 역시 놀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 지하 30평에 가득찬 LP와 오디오 기기든, 방 하나를 가득채운 게임 소프트건, 무엇인가 나 자신을 즐겁게 하는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것은 어지간한 여행이나 음주가무보다 더 중요하다. 착실히 모아가고 있는 이 가상현실의 자료들을 어디에 어떻게 구현하여 틀어박히는가는 내 40대의 화두가 될게다. 거기에 시간이 나를 위해 일하게 하는 수단을 찾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가 될 것이다.
열 두가지 과업을 끝낸 시점인지, 그 이전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50여 권을 읽어가면서 충실하게 흘러가는 시간의 느낌에 따라서 꽤 나이가 들어가는 포와로의 모습을 본다. 치과를 싫어하는 멋진 수염의 겁쟁이 천재탐정이 가는 치과에서 하필이면 담당 치과의사의 죽음이 자살로 위장된 것이 범인의 불행이라면 불행이다. 그까짓 몇 명을 죽여도 자신의 존엄성과 선함, 그리고 국가에서 요구되는 정치력에 의해 보호될 수 있다고 믿는 범인은 참으로 많은 한국의 그 누군가들을 쏙 빼닯았다. 그럭저럭 무난하게 읽은 책이지만, 특별히 나를 흥분시키는 모티브나 설레임은 없었다.
검은숲-북스피어의 조인트 프로젝트 덕분에 정말 좋은 추리소설들이 여러 권 나와주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나 에도가와 란포는 이들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친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매우 감사하고 있는데, 다카기 아카미쓰의 작품을 꾸준하게 출판해 주시니 더욱 감사할 수 밖에 없다.
다카기 아카미쓰는 '문신살인사건'이래 계속 관심을 갖게 된 전후 일본의 추리소설의 명인이다. '문신살인사건'이 처녀작이고, 지금 읽게 된 몇 편은 그 이후에 나온 책들인데, 개인적으로는 역시 '문신살인사건'만큼의 강렬한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란포의 기괴한 상상과 마쓰모토 세이초의 대담한 현실반영을 적절히 섞은 듯한 이 작품은 어제 오후에 잡고 오늘 새벽까지 내려놓지 못해, 끝내 다 읽고 늦잠을 자게 만들었다.
마쓰모토 세이초도 다룬 바 있는 패전-한국전쟁이 끝나가는 시대를 무대로 하였고, 역시 그가 다룬 바 있는 굵직한 미제사건들과 당시 사회를 흔든 대담한 사기를 모티브로 구성된 스토리는 범인을 미리 알려주고 단지 그 이야기를 따라가는 형식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재미있게 나왔다. '문신살인사건'도 이번에 다시 나왔던데, 사서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해주었으니 한 푼 더 보탤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읽었는지 잊기 전에, 스토리의 끝자락마저도 놓쳐버리기 전에 써야한다. 가능하면 읽고 나서 바로 써야하고, 책과 삶을 적절히 조화시켜서 책을 빌려 하고 싶은 말을 써야하는데, 이게 어렵다. 참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