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podcast에 올라온 강신주의 감정수업 (보충수업)편을 듣고 있다. 강신주 박사가 하는 일에 대한 존경도 있고, 뱃심있게 센소리를 하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원래 사람은 젊고 경험한 것과 아는 것이 적을 때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쉽게 한다. 배우고 경험한 것이 적으니까 세상은 단순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조금씩 사람은 너그러워진다. 타인의 실수에도 모자람에도. 세상이 그리 단순하게 흑백으로 양단될 수 없다는 것을 배워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신주 박사는 나이도 배움도 경험도 적지 않을터인데, 어떤 이야기에 있어서는 에누리가 없이 강한 발언을 한다. 그 중에 내가 공감하는 이야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는데, 아마도 누구나 개인적인 호불호가 있을 듯 싶다.
문예창작과에 대해서:
무척 신랄하게 비판을 한다. 글은 그렇게 쓰는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기교를 배워서 끼워 맞춘다는 뜻 같다. 기실 예전에는 작가로 등단하기 위해서 사숙을 하거나 다른 일을 하면서 부단히도 습작을 하여 그 과정이 쌓이면 등단을 하곤했다. 조정래 선생도 그랬고, 대다수의 작가들이 다른 일을 하면서 자신의 속을 긁어들어가 글을 쓰고 버리고를 되풀이 한 끝에 전업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깊고 넓은 다각도의 경험을 통해 다양한 배경을 가진 작가들의 글이 나왔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인지 작가가 되려면 문창과를 가야하는 것이 정설이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보수적이기는 하지만 강신주 박사의 관점에 공감한다. 나 역시 문학적인 글을 그렇게 깊이 내면으로 들어가서 다양한 경험 끝에 쓰여지는 것이지 기교를 배워서 쓰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문창과가 생산할 수 있는 글쟁이는 방송작가 정도가 아닌가 싶다.
문창과는 학교마다 유명한 전대의 소설가나 문학가를 데려다가 교수를 만들어주고 그 댓가로 학맥을 만들어냈다고 하면 심한 비판일까? 이제는 등단을 위해서 any 문창과가 아니라 특정 문인이 교수로 있는 특정 대학교의 문창과를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도 어디선가 보았다.
강신주 박사의 발언이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하겠지만, (그런 이유로 나는 심한 표현은 삼가는 편이다) 상당부분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문학으로써의 글쓰기는 그렇게 4년간의 교육과정을 통해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키 비판:
일종의 문학적인 포르노라고까지 말한다. 인생 경험이, 찐한 사랑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나 먹히는 정도라고. 하지만 진짜를 경험한 사람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라고. 하루키를 좋아하는 나 자신에게 비추어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만, 그래도 일단 하루키는 좋다. 그가 들려주는 심각한체 하는 이야기도 좋고, '노르웨이의 숲'같은 이야기도 좋다. 오에 겐자부로는 인정하면서 왜 하루키는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궁금하다.
희재류의 인간들이 강경발언을 쏟아내는 것은 주목받고 싶고 먹고살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강신주 박사의 거침없는 발언은 그가 그만큼 이제는 어느 경지에 올라 세상의 이목을 초월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나아가서 그는 care하니까, 사람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되도록 빠른 시일내에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 그리고 그 발언에 대한 타당성을, 특히 하루키 비판에 대한 부분을, 따져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