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또 첫 몇 작품들에 대한 느낌이 그저 그랬다고 해도, 모리스 르블랑이 대가임에는 틀림이 없다. 출판된지 백 년이 지난 지금에도 수 십개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꾸준히 출판되고 구매된다는 점, 그리고 계속해서 다양한 만화와 영화 등의 모티브가 된다거나 하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문학적인 작품성, 완성도 같은 것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일단, 첫 몇 권을 읽을 때에는 적응이 되기 전이어서 그랬는지, 번역상의 이슈였는지, 내가 생각하던 뤼팽의 느낌을 받지 못한 부분이 많았고, 이에 따라, 작품 및 작가에 대한 이미지 역시 그저 그렇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리즈의 50% 가량을 읽어내려간 지금, 스토리 자체의 완성미나, 캐릭터 구성 등에 있어 훨씬 더 안정된 감을 받고 있다. 상당히 만족하면서 읽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최근 1-2주간, 상당히 힘들었던 책읽기라는, 어쩌면 살짝 마른 펌프에 fresh한 물을 뽑아내기 위한 물붓기같은 독서를, 다행스럽게도, 뤼팽이라는 괴도를 통해 만끽할 수 있었고, 이는 다른 독서를 이어갈 양분이 되었기에 더욱 만족스럽고, 고마운 마음으로 남은 시리즈를 읽고 있다.
파타마 운하를 둘러싼 정계의 스캔들을 바탕으로 하여 썼다는 이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협잡과 협박은 정치/경제의 element를 구성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홈즈와 마찬가지로, 뤼팽도 때로는 그를 능가하는 듯한 악당들을 만나게 되는데, 특히 흥분하기 쉬운 성향과 (프랑스인과 영국인의 차이를 보는 듯) 함께, 살인을 하지 않는 뤼팽 vs. 살인도 불사하는 그의 적들의 대결에서 카타르시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는 점점 뤼팽을 응원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둑은 도둑인 법. 역시 뤼팽의 가장 큰 목적은 재물이다. 그 과정에서 물론, 악인들을 응징하게 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정의감의 발로이며 이를 위한 성취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byproduct으로써 말이다.
일종의 외전으로써, 장편으로 소개되지 않았던 작은 일화들을 모아놓은 책인데, 괴도로써, 아니 그 이상, 뤼팽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스토리들도 들어 있어, 매우 신선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뤼팽의 사랑이야기, 뤼팽을 좋아하게 된 적편의 여자덕으로 위기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이야기, 그리고 가장 압권인, 한 에피소드에서는 뤼팽이 비록 의뢰받은 재물을 모두 잧아냈으나, 뤼팽 자신보다 훨씬 더 욕심이 많는 의뢰인단 덕에 계약으로 보장 받았던 보석들을 포기하는, 다소 우스운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두 작품 모두 일차대전 (및 그 이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포탄파편'을 보면 일차대전 당시 프랑스인이 가지고 있던 독일인에 대한 이미지를 여과없이 보여준다. 기실, 지금은 서방에 편입되어 있지만, 오랜 역사의 시간에서 독일은 동유럽인으로 야만시 되어왔었다. 마치 중원의 제국들이 진나라를 보듯.
'황금 삼각형'은 전후, 금을 둘러싼 상이용사와 악인의 wife, 그리고 그들을 돕는 뤼팽의 이야기인데, 이 시절이면 유럽의 황금시대는 이미 지났고, 서서히 스윙과 재즈의,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의 (그리고 겟츠비의) 시대로 진입하려는 시기가 된다. 이 시기면 뤼팽의 나이는 약 오십대 전후로 추정되는데, 다음 작품은 어떤 시기를 배경으로 하려는지 궁금하다.
이 밖에, 주말에 드디어 소설 '은교'를 읽었다. 이 작품에 대한 감상은 좀더 자세히 써보고 싶기에 일단 남겨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