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생각보다 자주 reading block이라는 것이 온다.  정해진 term은 아니고, 내가 그냥 생각해서 쓰는 표현인데, 책이 잘 읽어지지가 않는 것이다.  읽기 싫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해도, 집중도, 흥미도 떨어지는데 당사자로서는 아주 답답한 노릇이다.  강박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하던 것이 그렇지 못하게 되면 매우 갑갑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무엇인가 패턴에서 벗어난 reading을 하려고 발버둥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대상은 SF, 장르를 가리지 않고, 특히 확 눈에 들어온 영어책, 무협지, 아니면 추리소설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내용을 너무 빤히 알고 있는 책들의 경우 이 reading block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 즉 예전에 많이 읽어서 내용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현재 가지고 있는 김용의 작품들이나 홈즈, 또는 일본의 괴 추리소설들은 도움이 안된다는 뜻.  생각다못해 캐드팰 시리즈를 이곳에서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 이번 달에 좋은 케이스를 수임했다는 이유로 - 주문할까도 내심 망설였지만, 그 값이면 한국에서 1.5배의 책 값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일단은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서고 - 라지만, 사실은 내 사무실의 IKEA 책장 (예전에 사진으로도 보인) - 를 뒤지다가 보물을 발견한 것이니, 작년 연초에 구해놓고 읽는둥 마는둥 모셔놓았던 아르센 뤼팽 전집이 되겠다.  정통 추리물보다는 고전으로서 대접을 받는 작품이라서 그랬는지, 두어권을 읽다가 조금 흥미가 떨어져서 내버려두었던 것인데, 역시 책이란 사두면 언젠가는 읽게 되고, 때로는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다는 나의 믿음을 다시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까치글방과 황금가지에서 각각 전집을 번역해 출판했고 - 홈즈와 마찬가지로 - 나는 홈즈의 인연에 따라, 그리고 책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들었기에 황금가지판을 가지고 있다.  지금보니 까치글방의 20권 전집이 약 10여만원에 세일 (40%)중이다.  내가 한국에 있었다면 당장 주문했을 것으로 매우 심하게 추정된다.  어쨌든, 지금까지 첫 두 권을 읽었는데, 간략하게 남겨두고 싶어서 페이퍼를 썼는데, 뜻밖에도 장황한 intro가 되고 말았다.

 

'괴도 신사 뤼팽'이 세상에 등장하는 순간이다.  예고된 탈옥과, 상대의 함정을 미리 알아보는 그의 행각, 그리고 기상천외한 도적질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는 그는, 심지어 propaganda를 위한 신문사도 소유하고 있으니, 이 정도라면 괴도라는 칭호가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다.  하지만, 아직까지 뤼팽에게는 그런 그를 빛나게 해줄 호적수가 없다는 것이 아마도 불행이라면 불행일 것이다.  가니마르 경감 정도로는 절대로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같은 대결구도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니까. 

'신사'라는 부분은 매우 낮은데서 출발한 그의 컴플렉스를 보여주는 것일까?  어디를 봐도 '신사'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만, 작중에서, 적어도 대중앞에 나타나는 그의 겉모습은 그럴듯한 프랑스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때로는 매우 광폭하고 음험하다.  그런 의미에서 '신사'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낭만적이 이미지는 산산조각이 나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천명관 작가보다 먼저 일인칭과 삼인칭 시점을 오가는 작법이 살짝 신선하다가 혼란스럽다가 했다.  정리가 조금 덜 된 느낌이었다.

 

'아르센 뤼팽 대 헐록 숌즈'라는 부제가 붙는 두 번째 이야기는 말 그대로 뤼팽과 숌즈라는 영국의 명탐정이 한판 승부를 벌이는 이야기.  누가봐도 홈즈의 오마쥬이고 르블랑이 선배인 코난 도일에 대한 존경을 담았다고 하는데, 난 그 말에 절대로 공감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묘사된 숌즈는 홈즈의 장점을 모두 떨궈내고, 단점만 부각시킨 인물이다.  심지어는 허영과 거드름, 조급함까지 더한, 어쩌면 프랑스인의 시각으로 보이는 홈즈라는 '추리기계'에 대한 이미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data와 통계자료를 compute해서 이 둘의 가상대력을 분석하면 홈즈가 이길 것임은 분명하다.  이렇게 결점이 많은 숌즈가 뤼팽보다 약 반 걸음정도가 늦었다면 흠즈는 뤼팽의 머릿속에 들어있을 것임이 분명하니까. 

 

 

정통 추리소설을 읽는 재미는 적지만, 가볍게 머리를 식히면서, 이 시대의 낭만과 함께 - 1905년이 작품의 원년이니 1차대전보다 먼저이다.  소위 말하는 황금시대의 막판이었을 듯 - 고전을 대하는 마음으로 한 권씩 읽어내려가면 좋을 것 같다. 

 

그나저나 캐드펠 시리즈 20권, 아가사 크리스티 전집 모음은 언제쯤 내 품에 안기려나?  크리스티 전집은 정말 기념비적인 출판물인데, 권 당 가격을 아무리 낮게 잡아도 40만원 이상이 필요하고, 60권이 넘는 책을 이곳으로 가져오는 것도 큰 고민거리가 된다.  일단은 마음속에만 담는 요망사항이 될 것 같다.

 

 

 

 

 

 

 

 

50권에 플러스 14권이 더 나왔다.  그런데, 벌써 품절된 상품들이 보인다.  조바심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지만, 나와 인연이 있다면 이 길에서 또 만날 날이 있겠지 하면서 달래본다.

 

 

 

사족: 뤼팽의 일러스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아이템들 중 하나는 외눈안경이다.  이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좋은 렌즈를 생산하는 것도, 그리고 많이 생산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하고, 또 렌즈 두 개를 연결하는 테를 만드는 기술, 나아가서 이 두 개의 렌즈의 형평을 맞추는 것도 어려웠다고 한다.  ergo, 외눈안경 (monocle). 그런데, 예전에 보니, 이걸 오래 쓰게 되면, 다른 한 쪽의 눈이 적응을 하느라고 자주 찡그리거나 작게 뜨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까, 장난으로라도 이제는 이런 것을 가지고 놀지는 않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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