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 전3권 세트 - 유재주의 초한지
유재주 지음 / 돋을새김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내가 처음으로 접한 초한지는 정비석님의 소설 초한지다. 고려원에서 출판된 5권짜리였는데, 전국시대말기에서 유방의 중국통일, 그리고 그 후일담을 다룬 책으로써, 당시의 시가로 권당 15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 이런 책들이 한권에 만원에서 만이천원이고, 활자도 두배로 커졌으니, 지금 다시 나온다면 한 10권에서 12권으로 편집되어 권당 만원정도로 팔릴 책이겠다.

소설 손자병법으로 정비석풍의 역사소설 (정확히는, 역사소설을 표방한 통속소설 내지는 그 반대)에 한창 재미가 들렸던터라, 이 초한지는 못해도 열번을 읽었을 것이다.

삼국지는 여러 작가의 역을 읽어 보았으나, 초한지는 그렇지 못하다. 최근에 이문열씨가 평역한 본이 나왔다는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하던 차, 우연한 기회에 유재주의 초한지를 읽게 되었다.

저자는 군더더기를 떨어내고, 기존의 초한지와는 조금 더 다른 관점으로 스토리를 풀어 나간다 (이는 저자가 책머리에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야기 자체도 전국시대의 통일이 아닌, 시황제가 죽기 거의 직전부터 시작하고, 전개도 매우 빠른 편이다. 스토리 전개가 빠르니만큼, 작은 이야기들에 얽매이지 않고 굵직한 줄거리들을 중심으로 하여 단 3권에, 그것도 요즘 활자크기의, 초한지의 gist를 담아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장점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후세에 나온 term이나 사상이 버젓이 유방시대의 사람의 것으로 둔갑하여 나오는 것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면, 유협에 대한 정의 같은 것인데, 전국시대 말기의 사람의 입에서 사마천의 사기에서 define한 유협에 대한 정의가 술술 나온다, 순서까지 거의 비슷하게. 이런 부분들이 여럿 눈에 띄기 때문에 소설의 시간적 사실감을 많이 떨어뜨리는 것 같다. 즉, 누군가 벌써 결론을 알고 소설을 구성하여, 그 결론에 맞는 모드로 스토리를 전개하는 냄새가 너무 강하다는 것이다. 역사소설이던 일반소설이던, 이는 피할 수 없는 creation의 운명이겠으나, 그 냄새가 너무 심해서, 스토리가 저자의 결론을 뒷받침하는 것 외의 다른 생명성이 보이지 않는 것은 좀 심하다.

또한 저자가 밝힌 집필 관점에 충실하기 위하여 유방에 대한 부분은 많이 깎아내리는데, 이는 사실에 충실하기 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나, 너무 과하다. 과유불급이라 했던가? 역시 소설의 사실성이나 역사성을 훼손하는 부분이다.

Focus를 유방의 신격화 무너뜨리기에 맞추다 보니, 다른 전투나 전략에 대한 묘사도 많이 떨어진다. 물론, 기존의 초한지의 “뻥튀기”도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중국을 두고 일전을 벌였던 초나라와 한나라의 중심들인 범증, 장량, 한신등 당대 최고의 모사들과 명장이 어떻게 전략전술을 운용하고 용병을 하며, 모략을 꾸미는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

끝으로 군더더기를 덜어내는 과정에서 스토리의 중요한 연결부분들 마저 같이 덜어진 것은 아닌지 절로 생각해보게 되는 중간중간의 미약한 전개상의 인과관계가 부족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주요부분의 맺음이 매우 허무하고 갑작스럽다.

초한지는 오랜 세월 동안 동양삼국의 여러 작가들이 평역, 번역 등을 통하여 서술해온 고전이다. 이런 고전들이 어떤 보편적인 형태와 내용, 그리고 전개를 가지고 있는 데에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것을 작가가 임의로 용감하게 편집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로써는 의미가 있지만, 서객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정말로 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면 상당히 불만스러울 것이다. 내가 진순신의 책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라고도 하겠다.

이렇게 쓰고 나니, 유재주님이 열심히 쓰신, 처녀작도 아닐, 이 책이 매우 볼품없이 느껴진다. 하지만, 쉽게 읽혀지는, 또 하나의 초한지라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 볼만하다. 떠드는 것이란 원래 창작보다는 훨씬 쉽다는 점, 그리고 이 떠들어 대는 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의견에 바탕한 점이라는 것을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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